펭씨네 가족
케빈 윌슨 지음, 오세원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19세기까지 저 폴란드 혹은 벨라루스의 깊고 깊은 숲 속에 베오울프 족이 있었다. 베오울프 족들은 그곳에서 눈이 그치고 보름달이 뜨면 송곳니를 드러내며 밤의 숲 속을 배회하다가 외딴 인가를 급습해 사람들을 죽여 피를 마셨다. 깊은 계곡 속에 은거하며 밤의 제왕으로 몇 세기를 잘 살았지만 인간이 총기를 발명해 널리 사용하기 시작했고 과학의 19세기에 접어들어 이들을 멸종시키려는 집단적 활동이 거세짐에 따라 소수의 베오울프 족은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극소수는 북아메리카를 향하는 수송선에 올라 미국 땅에 도착했고, 여전히 북유럽의 숲 속을 배회하던 대부분의 베오울프들은 가차 없이 학살을 당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에 도착한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팽Fang, 즉 ‘송곳니’라고 지었으나 미국 땅에서도 사람을 죽여 피를 빠는 관습으로 인해 사막의 모래알처럼 종족을 번식시키지는 못했다. 사막의 모래알? 모래알은커녕 겨우 대만 끊지 않고 가냘프게 생존해왔을 뿐인데 1970년대 중후반께는 비참한 교통사고로 유일한 베오울프의 후손 부부가 동시에 절명하는 바람에 그들의 오직 한 명의 아들, 케일럽 펭만이 남았다. 케일럽 펭은 1954년 유명한 피아노 퍼포먼스 <4분 33초>를 만든 존 케이지와 필적할 만한 위대한 행위예술가 호바트 왁스만의 수제자로 스승을 능가하는 예술적 재능을 보유한 젊은이(였)다. 1977년 호바트 교수의 조교를 하다가 회화를 공부하던 열 살 아래의 캐밀 양에게 행위예술의 마력을 전파하여, 무려 서른여섯 번의 결혼 퍼포먼스 끝에 임신하게 된 캐밀과 서른일곱 번째 결혼식을 통해 정식 부부를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또 다른 베오울프의 후손을 소개하자면 누나 애니 펭과 동생 버스터 펭. 부모는 이들을 아이 A, 아이 B라고 부른다.
  이들이 어떤 행위예술을 했는지 한 번 보자. 이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장chapter의 제목을 윌슨은 (윌리엄 포크너의)“소리와 분노”라고 지었거니와, 이거 말고도 다른 장의 제목으로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 (헨리 제임스의)‘여인의 초상’, (너새니얼 웨스트의)‘메뚜기의 날’, (찰스 디킨스의)‘크리스마스 캐럴’ 등으로 짓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소리와 분노”의 시대적 배경은 1985년, 애니가 여덟 살, 버스터가 여섯 살 때다.
  동생은 드럼채를 거꾸로 들고 베이스 드럼을 두드리고 있고 애니는 전기 기타를 뚱땅거린다. 길거리 버스킹. 이들이 하는 노래는 케일럽 펭씨가 작곡한 헤비메탈로 엉망진창의 반주를 뒤따르는 후렴이 독특하다.
  “슬픈 세상이에요. 아주 혹독한 곳이죠. 계속 살아가려면 부모들을 모두 죽여야 해요.”
  애니의 열어놓은 기타 케이스 속에는 일 달러짜리 지폐 한 장과 동전 몇 개가 들어 있고, 포장박스에서 떼어낸 마분지에는 “우리 강아지 코르넬리우스의 수술비가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우리 강아지를 살려주세요.”라고 비뚤비뚤하지만 맞춤법에 꼭 맞게 쓰여 있다.
  어느 새 행인들이 여럿 모여 이들을 둘러싸고 있을 딱 그 시점에 맞추어 군중들 한 가운데 서 있던 펭씨가 아이들에게 소리친다.
  “얘들아, 얘들아. 우리는 네 치료비를 댈 수 없어. 연주가 엉망이잖아. 안 그래요, 여러분. 해도 해도 이건 너무 한 거 아녜요?”
  이에 맞추어 펭 여사가 거들기를,
  “저 양반 말이 맞네요. 쟤들 연주는 최악이에요. 쯧쯧. 가서 제대로 연주하는 법을 다시 배워 오려무나.”
  이미 퍼포먼스에 익숙한 애니는 이 시점에 맞춰 가장 불쌍한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버스터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자기 아버지를 째려본다. 이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펭씨를 향해, 입 닥치지 못해!, 라는 호통이 들리기 시작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얘들아 계속 연주하렴.”하고 격려의 목소리를 보탬과 동시에 잔돈이 우수수, 애니의 기타 케이스 속으로 떨어진다. 군중들은 다수의 지지파와 소수의 야유꾼으로 양분되어 점점 달아오르다가 분위기가 심각해지고, 시끄러운 목소리가 퍼져나갈 때 쯤, 애니는 기타의 목을 잡고 크게 원을 그리며 땅바닥에 기타 몸통을 패대기쳐대 버린다. 버스터 역시 작은 북을 베이스 드럼에다가 거칠게 내리꽂고 동시에 남매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달음박질 하며, 이왕 도망할 거 같으면 기타 케이스 속에 든 돈이라도 몽땅 가져올 것을, 하고 조금 후회한다.
  몇 분이 지나 카메라가 장착된 안경이 부러지고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들고 거의 눈이 감긴 펭씨와 머리를 산발한 펭여사가 도착하는데, 군중들의 대응방식이 다 예견했던 결과였을 뿐이란 결론과 함께이다.
  “개차반인 인간들도 처음 얼마 동안은 예의를 차릴 수 있지.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런 오만들은 이내 본성을 드러내 비열한 짓거리를 하게 마련이란다.”
  그러니까 펭씨 부부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 예술. 그것도 한 물 간 행위예술이다. 이제는 더 이상 행위예술에 관한 찬사와 관심,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는 2010년 즈음해서도 이들은 오직 하나, 행위예술에 천착을 하지만, 어려서부터 진짜 딸과 아들인 애니와 버스터조차 예술행위를 위한 존재로만 여겨왔던 것을 머리가 굵어짐에 따라 저절로 알게 된 이들은 당연히 법적으로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부모를 떠나버린다. 그들에게서 물려받은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애니는 LA로 가서 배우가 되고, 버스터는 플로리다로 날아가 소설을 쓴다.
  애니는 몇 편에 조연으로 출연하다가 루시 웨인 감독과 호흡을 맞춘 <데이트 듀>라는 작품으로 오스카 상 후보에까지 오른 전력이 있고, 버스터도 장편 <백조들의 집>을 써서 주목받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가, 요즘, 그러니까 2009년 앞뒤로 해서 완전 죽을 맛이다.
  애니는 가장 최근의 영화 <자매들, 연인들>을 찍다가 어느 날 난데없이 감독 프리먼이 상반신 탈의를 요구했다. 애니는 계약에 없던 일이라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다가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도대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소연을 했더니 엄마 하시는 말씀이 상반신 말고 전면 누드로 하면 더 멋있겠다고 하는 거다. 그리하여 열을 받아 위스키를 벌컥벌컥 마시고 자신의 분장실로 쓰고 있던 트레일러에서 상반신을 벗고 거울을 보니, 술 마신 김에 좋은 건 더 좋아 보이는 법이라 자신을 얻어, 그냥 토플리스 상태로 약 50미터 떨어진 촬영장소까지 고개를 발딱 들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를 본 프리먼 감독, “자, 이 빌어먹을 장면을 빨리 해치워버리자고. 바로 그 정신이야, 그 분노를 연기에 쏟아 부으라고.” 그러나 숱하게 깔린 스태프들이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상반신을 벗어제낀 애니를 촬영하고 있었다는 거, 불과 몇 시간 후 미국의 SNS를 통해 애니의 젖꼭지 사진이 만방으로 전송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애니는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마저 쪽박을 찼으며 오스카 후보에 올랐던 작품에서 공동 주연을 했던 여자 주인공 민다와의 동성애 기사가 언론에 도배되어 카운터펀치를 맞았던 거다.
  버스터는 소설이 마음 같지 않아 프리랜서로 인터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라크 파병 제대 군인들 네 명, 케니, 데이비드, 조셉, 에이든과 이들이 심심해서, 그저 지루하기만 한 일상을 메우기 위한 취미생활인 감자 총 제작과 발사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네브래스카의 황량한 벌판에 도착한다. 여러 정의 사제 총으로 감자와 콜라병, 무 같은 것을 쏘는 장면을 보고, 직접 쏘아보기도 한 끝에, 총신 속에 강선鋼線을 넣어 보다 정확성을 높인 총의 시범을 보게 된다. 저 멀리 머리통 위에 따지 않은 맥주 캔을 올려놓고 쏘면 감자가 무서운 속도로 비행해 정확하게 맥주 캔에 맞아 퍽, 터지면서 공중에서 맥주 비가 내리는 모습에 반해버린다. 그래 자신이 직접 윌리엄 텔의 아들이 되어 맥주 세례를 받고, 이미 어둑해진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머리통에 맥주 캔을 세웠다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온 생감자에 오른편 얼굴을 맞아 가문의 증거인 송곳니 하나를 잃어버리고 입술에 별 모양의 열상, 귀가 너덜너덜, 눈을 비롯한 오른편 얼굴이 호박만큼 부어오르고 까무러쳐 열반하기 일보직전에 응급실에 도착해 질긴 생을 이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돈이 없어 프리랜서로 뛰는 젊은이에게 병원은 무려 만오천 달러를 청구하니 이것이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다.

  이제 겨우 책은 시작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사건을 통해 네 식구가 무려 십 몇 년 만에 다시 모였다는 말씀. 이해되시지? 이 천하에 둘도 없는 예술지상, 골통, 콩가루 집안의 구성원들이 이제 최후의 퍼포먼스를 준비하는데, 아이고,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지만 재미있기는 하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니콜 키드먼을 캐스팅해서 영화로도 만들었단다. 기발한 책. 그러나 품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0-12-18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제목은 <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이네요. ㅎㅎ

Falstaff 2020-12-18 19:50   좋아요 1 | URL
옙. 근데 제목이 엄청 후지죠? 부모하고 이혼이라니 말입죠. ㅋㅋㅋ 언제 엄마 아빠하고 내가/동생이 혼인한 적 있는 것처럼. 아오, 징그러워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