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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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라뇨 좀 읽었다 싶은 생각이 들어 세보니, <제3제국>이 여덟 번째 읽은 볼라뇨의 책이다. 한 번도 로베르토 볼라뇨를 검색해보지 않았지만 눈에 띄면 그냥 읽게 되는 작가다. 처음 읽은 볼라뇨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느낌은 색다르고, 그래서 낯설었다. 무슨 인명사전을 그대로 복사한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쯤, 아하, 이 책에 거론되는 인간들이 실제로 생존했던 사람들도 있긴 있지만 거의 다 볼라뇨가 창작해낸 인물들이구나.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하고 감탄은 했으나, ‘낯섦’의 진동이 더 커서, 그냥 그렇게 읽었다. 다음으로 읽은 것이 짧은 소설 <안트베르펜>. 이 책을 읽고 볼라뇨와 멀어진다. 도무지 무엇을 주장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 그리하여 두 해가 지난 후에 두꺼운 책 두 권으로 된 <야만스런 탐정들>을 읽을 때는 조금의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대박을 친다. 아하, 로베르토 볼라뇨가 이런 작가였구나. 그가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안트베르펜>을 괜히 쓴 게 아니구나, 하는 불빛이 번쩍 눈앞을 스쳤다고나 할까. 이후에야 앞서 읽은 두 작품을 다시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을 먼저 말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그래서 <야만스런 탐정들>을 읽어본 이후에야 볼라뇨의 책이 눈에 띄었다 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집어 들게 된다. 이제는 그가 불과 쉰 살에 생을 마감한 것을 애통해할 정도로 볼라뇨의 팬이 된 듯하다.
  그가 작가로서 천착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테마는 나치즘이나 칠레의 군부정권 같은 일종의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인 것 같다. 지금 “것 같다.”라고 말하는 건 그의 작품 전부를 읽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 <제3제국>도 1934~1945년 사이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나치제국’을 뜻한다. 물론 그 시절을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다. 대신 2차 세계대전의 전황과 전사history를 넓게 알고 있는 볼라뇨가,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보드 게임의 독일 챔피언인 화자 ‘나’, 우도 베르거를 통해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하니, 소도구로 작품 내내 언급하는 보드 게임의 제목이 바로 ‘제3제국’이다.
  이 책은 볼라뇨 사후 7년이 흐른 2010년에 출간을 했지만 작품을 완성한 시점은 1980년대 후반이어서 시기적으로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 봐야 한다고 해설에 씌어 있다. 이 책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안트베르펜>도 1980년대에 썼지만 칠레 내 정치상황 때문에 2002년에야 출간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2008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볼라뇨의 출간 하지 않은 원고가 있다는 사실이 발표되면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뭐 이런 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긴 하다.
  <제3제국>은 당연히 정치소설의 범주에 들어야 하겠지만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는 독일의 진짜 제3제국 시절과, 하다못해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 같은 건 단 한 마디도 거론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99퍼센트가 바르셀로나 근처 스페인의 남동부(주의: 해설에는 ‘북동부’라고 함) 해안의 코스타 브라바 해변에 있는 여름 호텔 ‘델 마르’를 중심무대로 한다. 그러면서 또 스페인에 있었던 파시즘, 프랑코 군사독재에 대해서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소설의 형식은 화자 ‘나’의 일기로 되어 있으니 사건은 당연히 시간이 흘러가는 순서로 구성되어 있어 좀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이 정도만 되도 볼라뇨치고는 매우 친절하게 쓴 수준이라 할 수 있을 듯. 작품은 오직 하나 2차 세계대전의 보드 게임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는 슈트트가르트 출신의 화자와, 출신지를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스페인 사람은 아니며 얼굴과 팔 등에 화상의 상흔을 가지고 있는 페달보트 대여점 주인인 ‘케마도’의 롤플레잉 게임에 맞추어져 있다.
  화자 우도 베르거. 당 25세. 코스타 브라바 해변과 호텔 ‘델 마르’는 십 년 전까지는 매년 여름에 가족 여름휴가차 왔던 곳이라 익숙하다. 십 년 전이라면 열다섯 살. 절정의 사춘기 시절 이후 그에겐 꿈같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엘제라는 여인이 있었으니, 십 년 전 이곳 델 마르 호텔에서 가족과 함께 여름을 보낸 독일 여자로, 당시에 키가 크고 흰 정장을 입은 늘씬한 호텔 주인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는 남편을 도와 호텔을 운영해왔다. 십 년의 세월이 지나 이제 우도 베르거는 애인 잉게보르크와 함께 슈트트가르트에서부터 차를 운전해 단 둘이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다시 들른 것. 우도는 한 눈에 알아본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우아한 태도와 오히려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은 외모의, 자기보다 한 열 살 정도 더 많은 것이 틀림없는 여성 지배인. 그러나 엘제, 프라우 엘제는 수많은 휴가객 가족 가운데 한 팀의 막내아들, 그것도 지난 세월동안 급격하게 변한 우도 베르거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이 해마다 여름휴가를 지냈던 베르거 가문의 아들이라 하니 안개처럼 자욱한 기억 속에서 희미한 존재를 꺼낼 수 있었을 뿐. 이 날이 8월 20일. 휴가지에서의 첫날. 애인 잉게보르크는 객실에서 자고 있고 ‘나’는 비록 휴가지만 휴가 기간이라도 해야 할 일이 많다. ‘나’는 보드 게임 ‘제3제국’의 독일 챔피언이고 이제 쾰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 보드 게임을 주제로 전략, 전술, 군대의 배치 등에 관한 컬럼을 기고하여 가욋돈을 벌기도 한다. 그래 휴가 온 호텔에서도 보드게임을 설치할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이 필요하고, 잉게보르크가 해변에 나가 해수욕을 하고 일광욕을 해도 자신은 방에 남아 원고를 쓰거나 전략, 전술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야 하는 처지.
  이들 앞에 사건이 기다리고 있고, 사건을 위해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의외의 사람들을 만난다. 첫째가 앞에서 말한 호텔 여자 지배인 프라우 엘제. 두 번째가 독일 오버하우젠에 서 온 연인 카를과 한나. 카를은 자기 이름을 미국식으로 ‘찰리’라고 불러 달라 한다. 찰리. 드러운 이름이다. 내가 빌어먹는 회사의 사장 이름이 찰리다. 우린 그냥 ‘찰리새끼’, 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찰리와 한나는 같은 회사의 기술자와 비서로 근무하고 있고, 한나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는 이혼녀. 찰리는 신체 건강하고 스포츠라면 못 하는 것이 없는 술주정뱅이인데 그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축구하고 윈드서핑이란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 ‘나’의 눈에 띈 것도 흰색의 서핑 보드. 나중에 알게 되지만 찰리의 진짜 취미는 아내 또는 애인의 눈가와 광대뼈 부근을 퍼렇게 멍들이고, 아내 또는 애인이 다음날 밤이 되면 찰리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까지 썼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 사람들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고, 소설 속에 흔히 이탈리아, 스페인 등 라틴족 사람들의 취향하고 얼핏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지 찰리는 호텔이나 휴가객들과 어울리는 대신 스페인 원주민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해 ‘로보’와 ‘코르데로’라는 양아치들과 함께 휴가객 전용이 아닌 원주민들을 위한 디스코텍 등을 전전하며, 이 때 애인 한나는 물론이고 ‘나’와 잉게보르크까지 안 갈 수 없게 은근한 압력을 넣어 함께 다니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연인 출신지를 알 수 없는 화상흔의 남자이자 페달보트 대여점 주인 케마도. 합해서 여덟 명. 주인공 커플, 찰리와 한나, 스페인 양아치들인 로보와 코르데로, 그리고 프라우 엘제와 케마도. 제일 먼저 정말 있었는지 아니면 짐작인지 독자를 헷갈리게 만드는 건 찰리-로보-코르데로가 한나를 성폭행 했느냐 아니냐, 또는 다른 여성을 상대로 성폭력을 행사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수영 실력에 관해서는 말이 필요 없는 만능 스포츠맨인 찰리가 보드를 타고나가 바다에서 익사한 사건이 자살인가, 사고사인가, 하는 것. 그렇다. 사람이 한 명 죽어나간다. 성폭력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책에서 슬쩍 흔적으로 보여주는 성폭력은, 만일 있었다면 그건 다중에 의한 윤간의 형태다. 그리고 찰리의 사망은 자신이 진짜로 즐겨하는 취미생활 때문에 만들어놓은 한나의 퍼런 눈두덩과 성폭행에 기인한 자살로 이어져야 하는데, 현대소설에서 이런 거는 딱 알려주지 않으니 애초부터 결론이 나기를 바라는 건 허튼 짓이려니.
  ‘나’ 우도 베르거에게는 그러거나 말거나 첫날부터 특별하게 신경을 잡아끄는 시설이 있었다. 낡은 페달보트 대여점. 보트들은 대개 일렬종대나 이열종대로 배열해 놓는 것이 보통이지만 호텔 앞의 대여점엔 페달보트가 이상한 진陣 형태로 놓여 있어서 마치 진지나 성citadel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주인인 케마도는 보트를 쌓아 만든 가로세로 2미터, 높이 1.5미터 정도의 공간에서 생활하고. 어쩌다가 우도는 케마도에게 호감을 느껴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보드게임을 설명해주고 급기야 객실로 불러들여 게임의 방법을 일러준 다음 정식으로 둘만의 게임을 진행한다. ‘나’는 독일인이라 나치 군대를, 케마도는 연합군과 소비에트 적군을. ‘나’는 2차 세계대전의 과정에 박식하기 때문에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지만, 이게 웬일, 케마도가 만만하지 않다. 원래 좋은 지능을 가진데다가 옛 추억의 여인 프라우 엘제의 남편이 틈틈이 훈수를 두는 모양이다. ‘나’는 제3제국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쏟고, 케미도 역시 온갖 것들을 연구하여 점점 ‘나’ 우도 베르거를 압박하는데, 어떻게 될까? 우도에게는 게임일 뿐이지만 케마도는 전쟁게임에 진짜 목숨을 걸고, 한쪽이 승리한 후의 전범재판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걸 우도는 몰랐다.
  결론은 책에 씌어있지 않다. 그러나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다. 볼라뇨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니까. 화끈하게 일러드린다. 제3제국으로 대표하는 집단 광기의 파시즘은, 일찍이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에서 봤듯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재현될 수 있다는 경종. 이미 알게 모르게 인류의 머릿속에 파시즘을 펼칠 수도 있고 파시즘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볼라뇨는 암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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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0-16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볼라뇨의 참맛을 모르겠던데.... 오호! <야만스런 탐정들>을 읽어야 하는 것이군요! 이 두꺼운 책 사놓기만 하고 있는데 언제 읽나 *발동동*

그나저나 폴스타프 님이 읽으신 볼라뇨 작품하고 제가 읽은 볼라뇨 작품하고 겹치는 것이 거의 없는 거 같은데(전 주로 단편을 읽어서)...... 저는 그나마 <아이스링크>는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10-16 17:27   좋아요 1 | URL
ㅎㅎㅎ 흥미로운 작가긴 한데 취향 상 극과 극이예요. 백퍼 만족은 아니고 뭐 하여튼 그렇더라고요. 아이스링크는 꼭 기억해두지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