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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되기는 어렵다 ㅣ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5월
평점 :
이젠 한 시절의 전설 비슷한 자리에 오른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의 공동작업. 이 형제들의 작품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과 <노변의 피크닉>에 이어 세 번째다. 두 명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라 그런지 발표한 중장편만 스물일곱 편에 이르지만 우리나라에는 내가 읽은 세 권의 책만 번역되어 나왔다. 이들의 작품은 소위 ‘장르’문학으로 치는 SF 계열이라 아직까지는 읽는 사람들이 비교적 적어서였겠지만 이젠 SF 독자층도 상당한 두께를 갖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번역 작품들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확실한 SF 작품. <세상이 끝날....>에서는 지구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비밀을 풀 과학적 열쇠가, <노변의 피크닉>에선 지구를 방문했던, 놀러왔던, 외계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또는 오물을 인간이 대하는 방식 같은 것을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펼쳐놓았는데, 이번엔 한 편의 무협지를 썼다. 250명의 지구인들이 저 먼 먼 광년 떨어져 태양조차 작게 깜박이는 별로 보이는 곳에, 완전히 지구와 같은 환경에서 지구인과 같은 사람이 사는, 다만 아직 봉건시대에 머무는 별에 보내져 봉건사회가 어떻게 공산주의로 바뀌게 되는지 연구하는 학자들을 그리고 있다. 근데 무협지라고? 그렇다, 내 의견은.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은 지구인들이 22세기 정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별은 지구로 치면 약 천 년 전의 문명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방식대로 역사가 흘러가는 수천 개의 행성 가운데 하나로, 250명에 달하는 지구인을 이 별로 파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지 인류를 돕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일개 관찰자에 불과하여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어떠한 개입도 못하게 규정하고 있다. 총 대장의 이름은 돈 콘도르. 별에서의 공식 직위는 좀 거창해서, ‘소안상인공화국“이란 나라의 대법관이자 국가 인장의 수호자, 열두 무역상 협의회 부회장, 자비로운 기사단 소속 기사. 그러나 주인공은 이이가 아니라 아르카나르 나라의 난봉꾼 귀족을 참칭하는 돈 루마타, 안톤이란 본명을 갖고 있는 소련인이다.
안톤 또는 루마타는 22세기 미래 엘리트가 갖고 있는 지식과, 수없이 단련했을 뿐더러 현지에선 적어도 3백 년이 흘러야 개발하기 시작할 눈부신 검술과 체력, ‘미다스’라고 불리는 금화(이들이 보기엔 신만 창조할 수 있는 순수한 금화)제조기,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어져 창으로 결코 뚫을 수 없는 가벼운 재질의 갑옷 등을 겸비하고 있다. 심지어 대장 돈 콘도르는 헬리콥터까지 한 대 가지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그러니까 현지 사람들이 보면 신이거나 신의 수준에 달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소설 속의 인물. 복거일이 쓴 <시간 속의 나그네>의 주인공 이언오. 그는 21세기 인간으로, 26세기에 출발해서 불시착한 타임머신, 시간주머니라는 의미의 ‘시낭’ 가마우지 호를 고쳐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절름발이 과학자인데, 정작 타고 보니까 타임머신은 5백년 주기로 덜커덕, 고장을 내는 거였으니 이언오 역시 16세기 말에 불시착하고 만다. 26세기 인간은 자신으로 하여금 역사가 뒤틀려져버리기를 바라지 않아 불시착과 동시에 자살을 해버렸으나 이언오는, 내가 죽긴 왜 죽어, 라고 규정을 무시한 채 타임머신 밖으로 나와 10년 후에 닥칠 임진왜란에 대비하면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건 놀라운 과학적, 사회적 지식과 딱 세 번 쓸 수 있는 비 살상 호신용 무기 한 정, 자살용 독약 키트, 가벼운 재질의 운동성 좋은 옷 한 벌이 다다. 그는 튱쳥우도(충청우도)의 총 관찰사가 되어 자본주의의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이 작품도 무협지. <신이 되기는 어렵다>나 <시간 속의 나그네>나 외로이 중원을 방황하며 악의 무리를 타도하는 초고수의 맞장뜨기가 등장하지 않는 반면에 현대화된 지식을 무기로 종횡무진하기에 이르는데, 이런 것도 무협지 맞잖아?
실제로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저 먼 먼 광년 떨어진 행성이 아니라 천 년 전으로 간 타임머신의 승조원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어울렸으니, 다른 행성의 인류가 지구인하고 거의 완벽하게 같다는 건 좀 무리 아냐? 천 년 전이면 12세기. 귀족과 영주를 위해 모든 평민, 노예, 상인, 기타 등등이 복무해야 하는 최고의 불평등 시대. 그들의 신은 평민들에게 상전께 말을 하라고 혀를 준 게 아니라 주인의 장화를 핥으라고 주었으며, 그것도 만일 평민의 혀가 엉뚱한 장화를 핥는다면, 그러면 그 혀는 통째로 뽑히게 되는 것이었다. 큰길은 오직 귀족들과, 귀족들에게 물자를 바치기 위한 상인들만 다닐 수 있었고 평민들은 뒷골목이나 피치 못할 경우엔 벽에 납작 붙어 움직여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 ‘돈 레바’라는 악당이 왕의 측근에 등장해 모든 지식인, 문화인, 심지어 글을 읽을 줄 아는 귀족 아닌 자들을 잡아 모진 고문 끝에 계급에 따라 교수대에 매달거나 화형에 처하거나, 목을 잘라 죽였다. 그래 모든 지식인, 학자, 문학에 종사하는 자, 심지어 회계원들은 이웃나라로 망명을 가거나 고요히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니, 혹시 이거 스탈린 시대의 문화적 박대와 분서갱유를 풍자한 거 아냐? 그랬거나 말거나, 돈 레바의 경우 말고도 경향각지에서 쉬지 않고 평민 학대와 착취과 살인이 낭자한 꼴을 22세기의 휴머니즘을 몸에 익힌 인간들이 그냥 관찰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10년 전 스테판 오스트롭스키라는 파견자, 돈 카파다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궁병 중대장으로 잠입하고 있었다가 에스토르의 마녀 18명을 공개적으로 고문하는 형리들을 보다 못해 부하들에게 저 자들을 석궁으로 쏴버려라, 라고 명령해 제국법관, 법원 간부들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했다가 창에 맞아 죽은 적도 있고, 비슷한 시기에 독일과 프랑스 농민전쟁 연구의 권위자로 양모(양털)상인 ‘파니-파’로 위장하고 있던 카를 로젠블룸은 무리스 지역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켜 단숨에 도시 두 개를 점령한 후, 도시를 약탈하던 농민군을 저지했다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농민반란군이 쏜 화살에 목 뒤를 맞고 절명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루마타가 별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는 카이산 독재자의 벗이자 심복으로 훌륭하게 위장하고 있던 지구혁명역사 전문가 제러미 타프낫이 갑자기 궁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권력을 탈취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타프낫은 두 달 동안 동료 지구인들과 지구 측의 성난 추궁에 굳건한 침묵으로 답하며 자신이 아는 22세기 제도와 과학으로 황금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했으나, 12세기 정도의 문명을 갖고 있는 현지인들에게는 미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쳐 여덟 번의 암살 시도를 운 좋게 피했지만 결국 지구인이 운영하는 연구소 재난수습팀에 체포당해 잠수함에 실려 남극의 섬 기지로 송출된 적도 있다. 이런 것들이 꼭 나쁜가?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정상보다 조금 더 많은 정의감을 보유한 인간들이 이런 상황을 만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간 그렇다. 우리의 안톤 씨는 하필이면 난봉꾼으로 이름이 난 루마타로 위장을 해야 하니 온갖 상류층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적어도 책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질 못한다. 자신은 비록 노력을 해서 심지어 최고 권력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인물 돈 레바의 정부를 꼬여 침대에 눕히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아뿔싸, 12세기 여인답게 그녀는 이도 닦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목욕은 절대로 하지 않은 채 향수만 듬뿍 뿌려, 떡이 진 머리카락과 입과 겨드랑과 샅과 발가락과, 심지어 손가락 사이에서도 꼬랑 꼬랑 피어나는 악취로 인해 도저히, 도저히, 바지는커녕 조끼조차도 벗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거다. 이것으로 실제적인 최고 권력자 돈 레바와의 사이를 망가뜨린 루마타. 정말 돈 레바가 루마타와 다른 지구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종류의 탐욕스러운 악당이었을까? 오히려 욕심이 과해 누군가의 꼭두각시는 노릇을 한 건 아니었을까? 그건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확인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