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창비시선 4
김광섭 지음 / 창비 / 197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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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섭. 호는 이산怡山. ‘기쁜 산’이라는 뜻. 1905년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에서 출생해 중앙과 중동학교를 거처 와세다 영문과를 졸업했으니 이만하면 초년 운은 괜찮다. 와세다를 졸업하고 33년, 스물여덟 살에 모교 중동학교에 영어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41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했다는 혐의로 3년 8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 제3 동 62호실, 북편 독방에서 생고생을 하고 풀려나, 이후 일제에 의하여 주요감시대상 리스트에 올랐다. 당시 중동학교에서 교사를 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하긴 했으나, 이름 김광섭金珖燮, 성씨를 김 다음에 별 성자를 붙여 김성金星으로만 바꾸었다. 그리하여 블랙리스트 상 이이의 이름은 금성광섭金星珖燮이 되는 것.
  이 시집 《겨울날》에는 그의 초기 작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시인 자신과 당시 창비시선의 편집책임자였던 백낙청이 고른 대표작 86편을 싣고 있다. 초기 시들은, 초기의 대표작인 <동경憧憬>을 포함해 1930년대 초기 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정서를 담고 있어서 그리 특별한 감상을 느낄 수 없었으나, 1930년대 말 혹은 1940년 언저리에 쓴 <우애友愛 - 소천형宵泉兄에게>라는 시에 와서 시절에 대항하는 의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상은 차디차고 인생은 애처로울지라도
  우리 사이에 얽힌 마음 수정같이 낡질 않고
  푸른 바다 밑 산호같이 변칠 않았으니
  우리들은 불행에 울고 영원성에 애정을 붙였다


  그러나 보라 우리들은 세기의 어두운 등불 아래서
  고달프고 초조하고 불안한 잠을 이루며
  아침 어지러운 꿈자취를 헤치고 나아가는 자
  언제까지나 여윈 손등에 눈물을 씻을 것인가 (부분. 작 중 한자어는 전부 우리말로 고침. 이하 인용 시도 같음.)


  위의 시를 쓴 이산은 다음해 또는 그 다음해에 또 이렇게 노래하며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마음이야 어땠을까는 다음으로 하고, 겉으로는 마치 소풍을 가는 어린 아이나 된 듯이 “나는야 간다.”라고 앞과 뒤를 무지르면서.



  이별의 노래 - 서대문형무소행



  나는야 간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깊은 산 묏골 속에
  숨어서 우는
  작은 새와도 같이


  나는야 간다
  푸른 하늘을
  눈물로 적시며
  아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나는야 간다  (전문. 1941. 5. 31)


  출소를 하고 시간이 지나 해방을 맞은 김광섭. 그에겐 여름이면 파김치처럼 추근해지고, 겨울 긴긴 밤 추위에 허리가 꼬부라지던 시기를 회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 <벌罰>이란 시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푸른 하늘 아래로 거닐다가도
  아지 못할 어둠이 문득 달려들어
  내게는 이보다도 더 암담한 일은 없다


  그리하여 어느덧 눈시울이 추근해지며
  어데서 오는 눈물인지는 몰라도
  나의 눈물은 이제 드디어
  사랑보다도 운명에 속하게 되었다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처벌된
  이 어둠의 보상으로
  일본아 너는 물러갔느냐
  나는 너의 나라를 주어도 싫다 (부분)


  마지막 행, “나는 너의 나라를 주어도 싫다.”를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몰라도 이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비식민주의를 웅변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행을 일본에 대한 증오로 읽으면 오독 아닐까 싶다. 나는 너희 나라를 통째로 주어도 싫은데, 너희는 어찌 35년 동안 조선을 겁박했는가, 하는 꾸짖음.
  이렇게 해방이 되자 김광섭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공보비서관을 지내고, 이후 주로 경희대학 국문과에 적을 두고 후학을 기르는데 힘을 쏟는다. 그러면 1950년대까지를 관통하고, 이 시절엔 처음엔 좌우 대립과 혼란, 미군정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을 건국하지만 곧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나 국토가 완전히 초토화 된다. 이어지는 60년대는 정치군인들에 의한 독재가 이어지고, 일찍이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을 지낸 경력의 대학교수는 적당한 선, 그러니까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서대문형무소에 가지 않을 정도의 사회비평시를 써낸다. 내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으니,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성북동 비둘기>가 아니라 <서울 크리스마스>. 독후감에 소개하기엔 조금 길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문을 인용한다.



  서울 크리스마스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다


  고요가 흔들리며
  바람이 불어
  풍조가 인다


  먹구름이 초생달빛에 찢기며
  한조각 푸른 하늘이
  면류관을 쓴
  예수의 얼굴로 번진다


  서울길
  인파에 밀려
  예수는 전신주 꼭대기에 섰고
  성탄의 환락에 취한 무리들
  붐비고 안고 돈다
  번화가의 전등은 장사치들의
  속임과 탐욕이 내놓이지 않도록
  경축의 광선을
  조심스레 상품 거죽에 던진다


  모든 나무들은 벌거벗었는데
  성탄수만은 솜으로
  눈오는 밤을 가장했다


  예수는 군중 속에서 발등을 밟히다 못해
  그만 어둠을 남겨두고
  새벽 창조의 시간을 향해
  서울을 떠났다
  가로수들만이 예수를 따라갔다


  어디선가 맨발로 뛰라는 소리가 났다
  그날 밤 서울서는
  한 방화범이 탈주했다
  성탄야의 종소리가 잉잉 울었다


  서울은 테두리만 퍼져나가는 

  속이 텡 빈 종소리였다


  산 등성이에서 빈대처럼 기는
  오막살이 지붕들만이 모여서
  이마를 맞대고 예배를 올렸다
  이튿날 아침 서울거리에는
  예수의 헌 짚세기
  한 켤레가 굴러다니는 것을
  맨발로 가던 거지가 끄을고
  세계의 새 아침으로 갔다



  왜 이 시를 길게 인용했는가 하면, 1950년생으로 김광섭을 사사한 시인 정호승이 있는데, 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 《서울의 예수》가 있다. 또 54년생으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시인 김정환 역시 실천문학사에서 《황색예수전》을 낸 바 있다. 나는 정호승과 김정환의 시에서 등장하는 한반도의 예수를 먼저 읽었던 바, 이번에 김광섭의 <서울 크리스마스>를 읽으면서, 과연 이산이 없었으면 두 시인들의 예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를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왔겠지. 나올 수도 있고. 그러나 특정하게 딱 민중(이건 옛 말이니 세련되게 좀 더 예전 말로 바꾸어), 소외된 시민들의 곤고한 삶을 예수를 통해 노래한 건 김광섭의 밑밥이 없었더라면 적어도 더 어려웠을 수는 있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이 시가 내 경우엔 팍, 꽂혔다는 얘기다.
  세월은 더 흘러서 70년대 중반이 되고, 시인 역시 자신도 알았겠지만 마지막 날을 향하면서 지난 시절을 뒤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북에 두고 온 누님을 떠올리고, 먼저 가신 아버지, 어머니, 아내를 그리워하며, 특히 자신이 넘쳐 아내의 몸에 메스를 대 의료과실로 먼저 보내게 한 신씨 성을 가진 의학박사에 대한 원망까지 쏟아낸다. 스스로가 이야기하듯 좋은 시는 아니지만(그래서 인용 역시 하지 않겠지만) 시인으로 자신의 아내가 죽게 된 일을 시로 써야만 했던 시절도 다 지나간다. 시는 초기 시처럼 쉬워지고 일상의 이야기를 하면서,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시인은 마지막 침상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그리하여 1977년, 일흔 세 살의 일기로 작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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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9-2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처벌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대신 분단된 우리의 현실을 속에서 아직도 물러가지 않은 일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인용하신 <벌罰>의 마지막 부분에 다른 의미로 공감하게 되네요...

Falstaff 2020-09-24 08:42   좋아요 1 | URL
불행하게도 식민지를 겪은 거의 모든 나라가 완전한 탈식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우리는 한때 식민모국이었던 일본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습다고 깔보는 시민의식이라도 있습니다만, 물론 그게 다가 아니지만 다른 나라들하고 구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