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부터 6월까지, 언제나 그렇듯이 좀 읽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좋았던 책 열 권을 소개합니다. 딱 열 권 만 고르는 일이 특히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기간보다 읽은 권 수는 적었지만 좋은 책들은 더 많았습니다. 아쉽게 여기에 끼지 못한 것들로 이기영 <고향>, 안젤라 카터 <매직 토이숍>, 서보 머그더 <도어>, 다니엘 켈만 <명예>, 조이스 캐롤 오츠 <카시지>, 아룬다티 로이 <지복의 성자>, 애나 번스 <밀크맨>, 박태원 <천변풍경>, 보후밀 흐라발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등이 있습니다. 이 대단한 작품들의 목록을 보더라도 오늘 소개하는 ‘괜찮은 책 열 권’이 얼마나 제 주관적인 감상에 의하여 결정을 한 것인지 금방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 아마추어 독자의 취향임을 감안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순서는 책을 읽는 날짜순이며, 장편소설은 <  >, 소설집은 《  》으로 표시했습니다.



1. 미셸 트루니에, <마왕>

 

  북부 독일의 두터운 이탄층 속에서 몇 백 년의 동면을 끝내고 이제 음산한 모습을 드러낸 마왕. 그는 구름 같이 커다랗고 까만 말을 탄 채 프로이센 지방을 돌아다니며 소년들을 모집한다. 아이들은 국가의 군사교육기관인 ‘나폴라’에서 소년병으로 키워져 앞으로 고국의 땅을 무단으로 침범할 군대와 자신의 생명을 교환하려 한다. 그러나 소년들을 품에 안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마왕은 또한 모든 인간들의 무게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죽을힘을 다해 어린 예수를 강 건너까지 건네주는 생크리스토프의 모습까지 태생에 가지고 있으니 어찌 고뇌가 없을 수 있을까. 거대한 말을 타고 척박한 프로이센 지방을 음울하게 돌아다니는 죽음의 신 마왕, 아벨 티포주는 또한 알고 보면 포로로 잡힌, 급성 근시와 성기 왜소증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 군인. 그가 겪는 실로 다양한 에피소드와 스토리는 이 작품을 명작의 대열에 올려놓지 않을까 싶다. 적극 추천.



2.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

 

  사람 사는 이야기는 거의 언제나 독자들에게 공감을 준다. 모두 열 편의 단편소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크게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대표적인 연작 소설. 이야기는 엄한 아버지와 주인공 로즈가 절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계모 플로, 이렇게 흔하게 들은 삼각관계로 이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소설 속에서 시간은 흐른다. 로즈라는 어린 소녀가 청소년을 거쳐 청년이 되어 핸리티라는 작은 도시에서 벗어나 토론토로 떠나며, 이어서 결혼적령기의 여성, 권태기 주부,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이혼녀를 거쳐 옛 사랑의 사연을 전해 듣는 폐경기의 장년 여성이 될 때까지, 점점 깊어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계모 플로와의 관계에 빠져들게 될 것임을 보장한다. 이런 것들이 기교가 별로 섞이지 않은 무심한 듯한 문장으로 툭툭 던져질 때 오히려 더 공감의 폭이 커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을 읽을 만한 이유가 되리라.



3. 마거릿 드래블, <찬란한 길>

 

  마거릿 드래블의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결론을 맺지 않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으면 복잡하게 얽힌 ‘1980년대 초반 영국의 지역과 계급에 대한 상투적이고 사실적인 대작’ 한 편에 만족할 것임을 보장한다. 1950년대 초반에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세 친구들, 리즈, 알릭스 보웬, 에스터 브로이어. 이렇게 세 명이 주인공인데 삼부작 가운데 첫 작품이라 이 가운데 리즈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펼쳐진다. 1979년 12월 31일, 이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는 송년 및 영신 파티를 열고, 파티 장소에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여섯 명의 남자 가운데 다섯이 참석한 것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잘 나가는 부자 정신과 의사 리즈. 그러나 리즈에게도 보다 리얼한 삶, 가족이 있으며, 자정이 지난 새해의 첫 시각에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이 있는 것이 또한 현실. 리즈와 남편으로 대표하는 부르주아 속물들로 이제 새로이 전 세계에서 대두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는 가운데 저절로 후속작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는 수작.



4. 돈 드릴로, <마오 II>

 

  1992년에 펜/포크너 상을 수상한 작품. 제목이 분명히 중국의 지도자 마오저뚱을 일컫는 <마오 II>이며, 표지에도 마오의 사진이 올라 있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관심을 받는데 성공하지 못한 듯한데, 진짜로 읽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제목은 한 때 매릴린 먼로의 그림을 그려 유명해진 앤디 워홀이 그린 회화 작품으로 마오의 얼굴을 그려놓은 (복제)그림의 제목이다. 주인공은 은둔형 소설가 빌 그레이.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아 존재조차 의심받기도 하는 작가들, 토머스 핀천이나 제롬 데이비스 셀린저 같은 이들의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그러나 어느 날 결심으로 하고 작가들의 사진만 전문적으로 찍는 이색적인 사진작가 브리타 닐슨을 자기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여러 가지가 의심스러운 조수 스콧을 보내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첫 장면은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주재하는 6,500 쌍의 합동결혼식부터 시작한다. 드딜로답게 매우 다양한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마치 10년 후 뉴욕의 무역센터 빌딩 폭파를 예견하는 듯한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어 더 주목되기도 하는 책.



5.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아, 이이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은 것이 벌써 언제 적이냐. 그 후 《남해 금산》을 거쳐 이 시집까지 어떻게 이리 한결 같을 수 있으랴. 아직도 시어가 만들어내는 공감각 또는 그냥 공감에 독자는 그만 사스락, 작은 모습으로 기겁을 하고 만다. 그렇다고 시인이 독자의 감성에만 호소하는 감각의 시어를 남발하지 않는다. 이이의 본질은 모더니스트. 시를 다 읽기 전에 무슨 뜻인지 모를 사투리를 절묘하게, 여러 작품 속에서 같은 단어를 섞어 씀으로 해서 하나의 에스프리로 몇 몇 시를 작은 한 단위로 합치는 배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직 이성복의 변하지 않은 시구를 탐색하고 시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궁리하는 일은, 그것이 비록 옳든 틀리든 간에 시를 읽는 독자의 자잘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리라.



6.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오버스토리. 열대 우림이나 온대 밀림 지역에 빽빽하게 들어찬 높이 60미터 위에서 펼쳐지는 초록의 스카이라인. 이것을 ‘오버스토리overstory'라고 한다. 유럽인이 들어오기 전에, 들어와서도 백 년 동안은 거의 온전히 보존되어 오던 완벽한 숲에, 엔진으로 가동되는 강철 회전 톱이 등장함으로써 식민지 시대를 포함한 미국의 역사는 물론이고 예수의 탄생보다 오래된 나무들이 뭉텅이로 잘려나가는데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 스무 명의 사람이 올라가, 네 명의 추는 춤이 뭐더라, 아하, 카드리유를 추어도 괜찮은 그런 거목들의 숲이 한창 때에 대비해 99%가 사라진 현재, 각기 다른 탄생과 성장과 운명과 학식과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몇 명이 잃어버린 나무와 숲, 일찍이 신이 창조한 가장 거룩한 생명을 유지하고자 생명을 걸고, 삶을 걸고, 자기 재산을 걸고 걸신들린 천민자본주의와 한 판 승부, 패배가 확실하게 보장된 승부를 거는데 망설임이 없는 이야기, 나는 이 이야기를 세상의 모든 비문맹자들에게 권한다.



7.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

 

  상상하지 못할 것은 없다. 벨 에포크 시대를 맞이한 프랑스에서 책의 주인공 데 제쌩트 공작은 육지거북의 등껍질을 순금박으로 입히고 그 위에 갖은 보석으로 치장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를 즐기지만 안타깝게도 거북은 죽고 만다. 인류가 만든 라틴어라는 언어와 문자가 누린 온갖 화려함과 영화와 쇠락과 몰락을 보통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할 정도의 스펙트럼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걸 노골적으로 과시한다. 위스망스는 세기말을 맞이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지적 퇴폐와 향락과 부도덕을 특유의 부패의 향기로 세상을 덮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새로운 백년이 과학의 세기였던 19세기에서 비롯한 인조물의 유토피아, 지적 유희의 미로가 되기를. 그러나 조심하시라. 숱한 독자들이 이 책을 기대 이하, 읽을 만하지 못한 책으로 선정했다는 점을 참고하면 좋겠다.



8. 채만식, <탁류>

 

  이리 재미있는 우리의 근대소설을 이제야 읽다니 딱 한 마디로 해서 만시지탄이다. 중학교와 고교시절에 <탁류>에 관하여 하도 많이 들었고, 내용마저도 훤할 정도로 익숙해서 오히려 일독에 이리도 세월이 많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우리나라 소설문학을 우습게 아는 건방짐까지 더하여. 만일 아직 <탁류>를 읽지 않으셨으면 우선 읽어보시라. 정말 재미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작가라서 그렇겠지만 졸라보다 더 재미있다. 읽는 순간 무슨 말을 하는지 즉각적으로 알 수 있으며, 제주도를 뺀 각 지방의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독자들 역시 그게 어떤 의미인줄 아는 모국어의 힘. 아, 유럽인들은 이런 즐거움을 언제나 알고 있었을 테지. 한국식 자연주의의 최고봉. 작 중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다 쓰러져가는 양반 댁의 맏딸을 돈 많다고 거짓말하는 가망 없는 사기꾼한테 결혼시키면서 이 대책 없이 재미있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비극, 그러나 곳곳에 웃음과 해학과 골계와 풍자의 시한폭탄이 숨어있는 우리의 근대소설은 시작한다.



9. 존 스타인벡, 《붉은 망아지 · 불만의 겨울》

 

  네 편의 옴니버스 식 짧은 이야기로 되어 있는 중편소설 <붉은 망아지>와 작가의 마지막 소설인 <불만의 겨울>을 한 권에 실은 착한 책. <붉은 망아지>도 참 괜찮은 초기 중편이지만 <불만의 겨울> 역시 마지막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스타인벡의 작품으로는 매우 예외적으로 미국 동북부, 뉴욕과 알바니, 몬타우크를 포함한 동북부 지방을 배경으로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사략선, 쉬운 얘기로 해적단을 거쳐 세계최대의 포경선단을 합작 운영했지만 이제 완벽하게 몰락한 홀리 가문. 홀리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이선은 하버드 출신으로 선량하고 정직하고, 부정행위를 단호하게 물리치는 청렴이라는 무기로 1960년대, 부정과 부패와 뇌물과 차별로 얼룩진 미국 사회에서, 한 번 망하면 다시는 복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사실 또 그랬던 정글, 자본주의의 뒷골목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분명 정직하고 청렴해서 법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하여튼 교묘하고,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교활한 선량함으로.



10. 토니 모리슨, <솔로몬의 노래>

 

  토니 모리슨에게 처음으로 큰 상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안긴 작품. 라틴아메리카의 환상적 리얼리즘하고 조금 다른 아프리카 식 마술적 은유를 가미시키는 건 후속 작품 <빌러비드>와 비슷하지만 결코 작가의 후기작품들처럼 읽기 어렵지 않으니 도전해봄직 하다. 혼자 걷고 뛰며, 유치가 모두 나서 이제 다 컸다고 누구나 인정할 나이가 돼서도 엄마젖을 먹다가 동네 수다꾼 아저씨에게 들켜 졸지에 ‘밀크맨’이란 별명을 책이 끝날 때까지 들어야 되는 운명의 메이컨 데드 3세. 크게 말하자면 밀크맨이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미국 대륙을 뒤져 알아내는 내용이지만 그렇게만 말하면 재미없다. 초장, 1931년에 흑인들만 가입하는 보험회사의 모집원이 전혀 자비롭지mercy 않은 머시 종합병원의 돔 지붕 위에서 푸른색의 날개 비슷한 옷을 입고 하늘로 솟구치며 이야기는 시작하는데, 사실은 이게 수미쌍관법이라, 밀크맨의 흑인 조상과 원주민 조상들 역시 솟구치며 한 방에 아프리카와 옛 시절의 아메리카라는 고향, 자유가 무한히 보장되던 곳으로 순간이동하려는 꿈이 있었나보다. 어머나, 이를 어째, 엉겁결에 결론을 말해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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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30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왕>은 폴스타프님께 땡스투 하고 사놨는데, 하반기에 읽을 것 같습니다.
<오버스토리>도 꼭 읽을게요. 돌아오신 것 환영합니다.

Falstaff 2020-06-30 15:1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환영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