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송순섭 옮김 / 버티고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제 우리말로 번역한 보후밀 흐라발은 다 읽었다. 공산주의 체코슬로비아 치하에서 흐라발의 수다한 작품들이 판매금지 조치를 당해 생전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엔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영국 왕을 모셨지>와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이렇게 세 편만 소개되고 있어 아쉬운 바가 작지 않다. 출간한 책마다 금서의 딱지가 붙어도, 또 다른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이자 노상 노벨문학상 수상 예상자의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밀란 쿤데라와 달리 죽으나 사나 체코 땅 안에서 금서 작가의 면류관을 쓰다가 1990년 벨벳 혁명을 맞아 조국이 민주화되는 광경을 목도하였으니 감회가 새로웠으리라. 그러나 7년 후, 흐라발은 프라하의 한 병원 5층에서 아스팔트를 향해 자유낙하 해 죽었으며, 아직도 이 사건이 자살인지 살인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책의 부록 겸해서 실린 단편소설 <간이주점>을 읽어보면 혹시 자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가까이서 본 열차>라는 우리말 제목으로 개봉했던 모양이다.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이 영화가 죽기 전에 봐야 할 1,001 편 가운데 하나로 든다 하니 꽤 괜찮은 평을 받은 거 같아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보리라 마음먹었다.

 

 

 

  1945년 2월,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중부 소도시에 있는 작은 기차역이 작품의 배경이다. 이 역에 스물두 살 먹은 철도학교 졸업생이자 철도 업무를 배우고 있는 수습생 ‘밀로시 흐르마’라는 청년이 재직하고 있다. 소설은 이 밀로시 흐르마의 일인칭 시점으로 되어 있는 바, 먼저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 청년에 관해 설명을 좀 해야겠다.
  밀로시의 증조부 루카시 할아버지. 1830년생인데 18세 되던 1848년에 당시 보헤미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해 육군에서 북치는 고수鼓手로 카렐대교 전투에 참전한다. 카렐대교 전투? 보헤미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보헤미아의 독립혁명 중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루카시 할아버지가 전심전력을 다해 북을 쳐서 그리 됐는지 모르겠지만, 전투는 시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오스트리아 군대의 완벽한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루카시는 다리 위에서 동포 학생들이 던진 돌에 무릎을 맞아 평생 절름발이 신세로 보내야 했다. 막강한 국력과 국부를 자랑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충성스런 열여덟 살 먹은 보헤미아의 청년 상이군인에게 원호보상으로 매일 금화 한 닢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도 하고 진짜로 주기도 했다. 루카시 할아버지는 이 돈으로 하루도 빼지 않고 럼주 한 병과 담배 두 갑을 사서 일부러 힘들게 일을 해야 그저 먹고 살 수 있는 보헤미아 시민들 곁에 다가가 술을 마시고 고급 담배를 피우다가, 당연하게, 자주 시민들에게 흠씬 두드려 맞아 거의 분기에 한 번씩은 아들이자 밀로시의 할아버지가 손수레에 실어 와야 했을 정도였단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가 망할 때까지 무려 70년 동안을. 아, 오스트리아가 망했다는 이야기지 루카시가 죽었다는 건 아니다. 그는 1935년에 백다섯 살이 되는 해에 막 채석장을 폐쇄해 이제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 노동자들 앞에서 술과 담배를 자랑했다가 얻어터져 드디어 천국의 환희를 맛보았는데, 의사가 검사를 해보더니 앞으로 20년은 확실하게 더 오래 살 수 있었다고 했을 정도란다.
  할아버지는 서커스단에서 맹활약한 최면술사 출신이었으나, 동네 사람들은 이이가 최면술사가 된 건 일하기 싫어하는 자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그랬던 거라 결론을 냈다. 그러나 1938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를 침공하자 할아버지는 독일군 탱크를 저지하고자 나선 유일한 사람으로 기억되기에 이른다. 그는 부대를 선도하고 있는 탱크 앞에 맨 몸으로 우뚝 선다. 그러자 놀랍게도 정말로 선도 탱크는 할아버지 앞에서 우뚝 멈추고, 탱크를 따르던 모든 독일군 병력도 당연히 그 자리에 멈춰버리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할아버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탱크의 해치를 열고 지휘하는 사람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수십 년 동안 밥벌이였던 최면을 걸기 시작한다. 그러나 몰랐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최면이 통하지 않았던 지휘자는 탱크를 진격하도록 명령했고 절대로 최면을 멈추지 않았던 할아버지를 박살내며 전진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저주로 인해 탱크는 프라하를 앞에 두고 멈춰 서버리고 마니, 궤도 안에 이물질이 끼어 그것을 빼지 않는 한 꼼짝도 안 하는 상태가 된 것. 그래 크레인이 한 대 동원되어 탱크를 들어 올렸을 때 나타난 건 할아버지의 머리였는데, 온전한 장례를 치루기 위해 달려온 밀로시의 아버지 발아래로 얼굴이 또르르 굴러와 그나마 아버지를 잃은 위안이 되었더란 것. 어쨌거나 독일군이 체코를 침공했을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유일하게 나선 사람이 바로 밀로시의 할아버지였던 거다.
  밀로시의 아버지는 기관사 출신. 스무 살 때 시작한 기관사 일을 마흔여덟까지 하고 일찌감치 은퇴를 결정했는데, 28년간 노동의 대가로 지금은 재직할 당시의 두 배에 가까운 연금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면서 시간이 남으니 이것저것을 만드는데다가 취미를 붙이고 산다. 예를 들어 연합군 전투기에 격추되어 동네에서 좀 떨어진 벌판에 독일군 전투기가 추락하자 냅다 달려가 비행기 잔해에서 나온 항공유의 도관導管을 가지고 와 60개의 파이프로 잘라 샤프 연필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그러니 하여간 밀로시가 타고난 흐르마 가문을 보통사람이 본다면 이들의 집단적 특징으로 일하기 싫어하는 경향을 들지도 모르겠다.
  그럼 스물두 살의 밀로시는 어떤가. 밀로시가 프라하 카를린에 사는 노네만 사진사의 집에 며칠 묵은 적이 있었다. 밀로시를 위하여 내줄 방이 없어 촬영실의 카우치에 이불을 덮고 자기로 했는데, 노네만 씨의 조카인 사랑하는 마샤가 담요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뿔싸. 밀로시한테는 일종의 증상이 있었던 것을 본인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여태까지 숫총각이었거든. 에야쿨라치오 프레콕스. 이게 어떤 증상인가 하면, 성적 자극이 되어 잔뜩, 통증이 올 정도로 피가 몰린 생식기가 이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할 결정적 시기가 오니까 그만 급성으로, 급성이라기보다 특급열차처럼 생식기에 몰렸던 피가 순식간에 다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리는 현상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끔가다 겪는 일이지만 문제는 밀로시가 아직도 한 번의 경험도 없었다는 거. 뭐라? 당신은 한 번도 이런 증상을 겪어보지 못했다고? 그럼 기다려보시라. 곧 그런 시기가 도래할지니. 하여튼 밀로시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던 모양이다.
  밀로시는 역으로 가 아무 곳으로나 가는 열차표를 끊고 도착한 곳이 베네쇼프의 비스트르지체. 역 앞의 자그마한 여관에 들어 욕탕에 뜨거운 물을 받은 다음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이 주는 고통을 느끼면서 몸을 담그고 면도날로 오른 손으로 왼쪽 팔을 그은 다음, 바닥에 단단하게 고정해놓은 면도칼 위를 오른 손목으로 강하게 내려쳐 마치 로마의 귀족처럼 죽어버리기를 바랐으나, 세상에 주인공이 중간에 죽는 거 보셨어? 극적으로 구조되어 3개월 병가처리. 정신병원에 있을 때 에야쿨라치오 프레콕스는 누구나 겪는 것이며 밀로시 같은 젊은 청년의 경우엔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 도와주면 금방 극복할 수 있다는 처방을 받았다. 이제 다시 역무원으로 복귀하여 일상의 일을 하고 있게 됐으니, 다음엔 이 역에 어떤 인간들이 있는지도 한 번 봐야겠다.
  완전 뺀질이 후비치카 씨. 이 양반은 마음을 먹으면 일단 저질러버리고 마는 성격이다. 그래 나이가 차도록 승진 한 번 못해보고 비슷한 또래가 역장을 하고 있음에도 아직 배차계장에 머무르고 있지만 체코의 철도계에선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다. 최근에도 사고를 한 번 친 바 있어서 철도계는 물론이거니와 5km에 이르는 벌판의 끝에 자리한 성의 주인인 킨스키 백작마저 감탄하게 만들었는데, 전신원 즈데니츠카 또는 애칭으로 즈덴카를, 야간 근무할 때, 전신기에 엎드리게 해놓고 치마를 훌렁 걷어올린 다음, 엉덩이에 대고 역의 모든 직인/스탬프를 쾅쾅 찍어버렸던 거다. 그래 이 사건이 형사법정에 까지 가야 하는 성폭행 사건인지, 아니면 역의 징계위원회에서 끝내버릴 업무시간 근무태만의 건인지 가리기 위해 철도 본부에서 국장이 직접 방문할 예정인데, 암만해도 사실의 이모저모가 궁금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사회정화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한 역장은 인생의 두 가지 목표가 있는 인물로 하나는 철도청 감독관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루제 가문의 란스키 남작이란 칭호를 얻는 것이다. 이런 인간을 쉬운 말로 극도의 속물이라고 하는데, 취미생활로 뉘른베르크 종 비둘기를 키우는 것이 있었다. 그러다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부하 직원에게 지시를 해서 자신이 흐라데츠로 출장 간 동안 비둘기의 목을 전부 비틀어버리라고 해놓고, 오는 길에 폴란드 종을 새로 사 온 인물이기도 하다. 이이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스트레스가 올라오면 즉시 커다란 파이프에다 대고 온갖 욕을 해대는 것이고,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아내를 향해 이것저것 욕설을 해대는 것이었는데 볼라리 지방의 정육점 집 딸인 아내는 평소엔 역무실에 앉아 넓은 식탁보에다 얌전하게 뜨개질을 하는 어여쁜 여인임에도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남편의 가리지 않는 욕설을 견디지 못하고 귀싸대기를 올려 부치는 경우가 있었다.
  한 마디로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근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다 별 볼 일 없는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었으니 자기들을 침략한 독일의 군대. 우리의 밀로시는 발음하기에도, 기억하기에도 고통스러운 에야쿨라치오 프레콕스를 치유하기 위하여 역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지하에 내려가 역장의 부인에게 말을 잘 듣지 않는 자신의 몸을 좀 만져달라고 부탁을 하고, 이미 갱년기가 지난 역장의 부인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불쌍한 바 작지 않아, 자신이 조금만 더 젊었더라도 도와줄 터인데 차마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 하는 와중에 역 전체가 부르르 진동을 하니 저 지평선 너머가 갑자기 불빛에 환해지는 것이, 드디어 2월 13일, 엘베 강의 피렌체, 드레스덴에 연합국의 공군 폭격기들이 무차별 적으로 공습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체코의 벌판에 있는 자그마한 역에서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독일의 병사들과 무기를 잔뜩 싣고 최전선으로 투입되는 열차가 역마다 독일 병정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갈 예정인데, 7년 동안이나 독일의 강제와 폭력과 수탈에 시달린 체코의 시민들도 뭔가를 하나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영웅은 아닐지라도.
  자, 개봉박두. 그것이 무엇인지는 절대 알려드리지 않을 터이니 궁금하신 분은 얼른 책을 사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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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23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리 멘젤 감독이 보흐밀 흐라발 열혈팬인지, 흐라발 작품을 많이 영화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예전에 운 좋게도 <가까이서 본 기차>를 영화로 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오히려 원작과 흐라발을 알지 못하던 시기네요. ㅎㅎ 영화는 꽤 괜찮으니 보시는 거 추천이요.

Falstaff 2020-06-23 10:15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2022-08-26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