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 - 채만식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2
채만식 지음, 우찬제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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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시지탄. 이제야 <탁류>를 읽었음이랴. 우리나라 근대 소설에도 이만한 작품이 있었다는 걸 이리도 늦게 알게 되다니. 일찍이 <태평천하>의 골계에 무릎을 친 바 있거늘 이만저만해서 이제야 <탁류>를 읽게 되어, 이 책이 그리 재미나다고 옛 교사들께서 침을 튀신 바 적지 않아 어려서부터 읽어보려고 과장 조금 보태 십 수 번 만에 드디어 끝장을 보았는데, 아이그, 그 시절 교사들의 말씀이 지극이 타당했다는 걸 무르팍 시고 어금니 빠진 세월에 이르러서야 알아채는 인종이 아니 한심할 수 있겠는가 말이지. 아, 정말 재미있는 한국식, 이게 1937년부터 38년에 걸쳐 신문연재를 했다니까, 조선식 자연주의 소설의 진수다.
  뭐 해설엔 리얼리즘 문학이라 했더라도 그까짓 사조가 뭔 대수랴. 1902년 유럽에서 에밀 졸라가 죽고 그 넋이 조선에서 윤회하여 채만식으로 나왔던가? 아니란다. 졸라가 9월에 죽고 채만식이 6월생이니까. 하여튼 그가 조선에서 다시 태어나면 영락없이 채만식처럼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군산의 쌀 시장 통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투기와 선물 미두장 이야기는 <쟁탈전>과 <돈>에서 보이는 공매도, 공매수와 여지없이 비슷하고, 남의 돈을 빌어 한 몫 잡으려는 은행 당좌계 직원 고태수의 사기행각 역시 사카르를 연상하게 한다. 빈민들은 딸을 싸구려 유곽에다 돈 이백 원에 팔아 건어물 장사를 시작하다가 일 년 만에 말아먹고, 얼굴 예쁘고 몸매 좋은 딸을 둔 영락한 선비는 비록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돈이 많아 일가를 위해 장사 밑천 대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부댁 외아들에게 선뜻 맏딸을 시집보낸다.
  이 영락한 선비 정주사는 작품 초장부터 새파란 애송이 푼돈 투기꾼인 소위 ‘하바꾼’으로부터 멱살을 잡혀 톡톡한 망신을 당하며 작품에 등장한다. 채만식은 이 정주사, 정영배를 ‘입만 가졌지 손발이 없는 사람이라 지적하며’ 사서삼경에 신학문을 겸한 나름 당대의 인재이나 집안 가솔들의 배를 곯게 하는 ‘인간 기념물’이라 칭한다. 천연 기념물, 자연 기념물, 하는 식으로 인간 기념물이라 칭한 건데, 아무리 자왈子曰 나위를 칭할지언정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법은 알고 있어서 슬하에 위로 딸 둘, 아래로 아들 둘에다가 내외지간까지 모두 여섯 호구를 책임져야 했던 것. 이 중에서 맏이가 초봉이, 둘째가 계봉이고, 초봉이는 명실상부한 주인공, 계봉이는 원래 조연들이 그런 경향이 있듯 똑 부러지는 성격의 정의의 용사다.
  초장에 정주사가 일방적으로 애송이 하바꾼에게 멱살을 잡혀 스타일을 완전히 구기고 있을 바로 그때, 시간 맞춰 등장해, 싸움이라기보다 일방적 행패를 말 한 마디로 뜯어 말리는 은행 당좌계 직원이 있었으니 이름을 고태수라고 했다. 고태수는 가난한 홀어머니가 키워 오랜 세월 은행 사환으로 있다가 성실 근면함이 눈에 띄어 정식 직원으로 승차하고, 아무래도 경성의 본사 행원들 사이에선 사환 출신이라 서먹할 것이라 선처를 베푼 상사에 의하여 군산지점으로 발령이 난 인물로, 키 크고 훤칠하게 잘 생기고, 귀태나는 외모의 미남자. 경성 본사에서 오랜 세월 성실, 근면하게 뼈 빠지게 일만 하다가 군산에 내려와 눈치 볼 것 없으니 이제 본색을 드러내 하고 한 날 술과 여자, 노는 본새가 흐벅져 돈 아까운지 몰라 이미 턱에까지 빚이 꽉 차있는 인간이다.
  여기서 끝내면 그나마 어떻게 변통을 하겠으나, 한 번 놀아보니 그 맛이 별미라, 지점장의 신임이 두터운데다가 맡은 일이 당좌계여서 군산의 큰 손인 백석이란 이름의 대금업자, 농산흥업회사, 군산의 큰 중매업자인 마루나, 이 세 계좌의 인감을 모조해 소액의 가짜 수표를 발행해 해 먹은 것이 물경 3천3백 원. 얼핏 직원 봉급으로 계산해 당시 1원이 지금의 10만 원 이상의 가치라 대강 3억 3천만 원 너머로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재화가 적을 때니 돈의 가치는 지금 3억 3천보다 훨씬 더 컸다고 봐야 하고. 고태수 이 인간도 머리가 빈 건 아니라서, 비어? 천만의 말씀, 보통학교만 나와 사환으로 있다가 정식직원이 된 전설의 인물이니 똑똑한 편에 들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소액의 위조수표, 당시 말로 하면 소절수 놀음이 이제 얼마 가지 않아 들통이 날 것이고, 그럼 감옥생활 몇 년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태수 좀 보라. 자기는 죽어도 감옥소에는 가지 않을 것이란다. 그러면서 오늘도 기생 행화, 살구꽃의 방에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추한 얼굴의 꼽추 장형보와 들어 꽃놀이 갈 생각만 하고 있다. 자신은 감옥에 가느니 소절수 놀음이 들통이 날 듯, 여차하면 깨끗하게 자살을 해버릴 것이라는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러면서 보는 눈이 있어 군산에서 가장 어여쁜 정초봉이와 혼인을 해 초봉과 같은 날 같은 시에 사랑의 죽음에 이를 꿈을 꾸고 있는 거였다. 그리하여 어느 날, 정주사네가 줄창 외상 쌀을 먹는 싸전이자, 자신이 하숙을 하는 한참봉 내외에게 초봉이 중매를 부탁하며, 이왕 군산시내에 소문이 났듯이 혼인만 하면 천석을 짓는 자기네 집에서 처가에 돈 천 원이나 보태 군산에서 작은 가게라도 하나 장만해주겠다고 사기 제의하기에 이른다.
  초봉이는 초봉이대로 자기 집에서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하는 혈혈단신 건장한 체격의 듬직하고 우직하고 하여간 사내다운 의사 지망생이자 금호병원의 의원 조수 남승재를 마음에 두고 있는 상태. 이제 내년 가을에 있을 시험만 치루면 정식 의사가 되어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될 소위 첫사랑을 잊지 못하면서도, 부모의 성화와 혼인만 한다면 천 원이라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돈이 친정의 복지를 위하여 굴러들어온다는 한 마디에 그만 굴복해 사기꾼 고태수와의 결혼에 동의하고 만다. 근데 이 고태수란 작자를 보라. 결혼을 열흘 남기고 여태 다니던 병원 말고 새로이 금호병원을 찾아 남승재에게 자기 환부를 보여주는 바, 고름이 줄줄 흐르는 생식기. 임질이 만성이 되어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곧바로 통증과 염증이 동시 상영되는 지경이었다. 초봉과의 순진한 첫사랑의 추억을 나눈 남승재의 복장이 어떻겠는가. 초봉을 위해 태수의 임질을 정성껏 치료해주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잘 조리만 하면 당장은 염증과 통증은 사라지겠지만 틀림없이 전염이 될 터이니 차후라도 꼭 두 분이 함께 치료를 잘 받으셔야 합니다. 조만간 자살을 꿈꾸는 고태수가 그까짓 것을 생각이라도 할까, 어딜.
  스토리는 이제 반의반도 오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안 알려드린다. 진짜 재미있으니 직접 읽어보시라. 이야기는 이렇게 자연주의적 난장판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지만, 역시 채만식의 진가는 해학의 문장에 있다.
  위에 써놓은 이야기를 보시라. 아예 처음부터 가난과 범죄와 질투와 비극을 품고 있지 않은가. 말 그대로 자연주의적, 졸라가 즐겨 다루던 그림하고 굉장히 비슷하다. 그러나 졸라보다 훨씬 재미있다. 채만식은 크레모어 또는 지뢰처럼 작품 곳곳에 해학과 익살과 골계를 숨겨놓았다. 당장 사람 하나가 죽어나갈 것 같아도 틈만 있으면 그걸 그대로 지나가지 않는다. 이제 책이 나오고 8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언어 또한 격변의 세월을 겪어 젊은 독자들이 숨어 있는 골계를 찾지 못하는 일이 수다하겠지만 그리하여도 꼼꼼하게 사전도 찾아가면서 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탁류>는 길이 보전해야 하는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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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16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류> 정말 재미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국어/문학 교육의 폐해를 톡톡히 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재미난 작품을 고등학교 때는 입시 위주로 접근하게 하니 사람들 머릿속에 <탁류>를 비롯해 채만식 작품들이 재미 없는 것으로 인식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는 대충 문제집 지문으로만 접하고 나중에 사회에 나와 어쩌다 보니 국어 과외 선생질하면서 학생 가르치려면 읽어야지...하고 읽다가 오잉? 이렇게 재미난 작품이! 하면서 완전 빠져들어 읽었답니다.

암튼 채만식 작품은 정말 재미나고 해학과 풍자 철철... 많은 분들이 채만식 제대로 읽기 이런 거 도전하면 좋겠어요. ㅎㅎㅎ

Falstaff 2020-06-16 09:54   좋아요 1 | URL
옙. 저도 젊기 전 어려서 여러번 읽으려고 했다가 말았는데 암만해도 이유가요, 1) 우리나라 근대 문학을 우습게 아는 시건방짐, 2) 수업시간에 작가, 스토리 같은 거 다 시험 공부 목적으로 외워서 이미 읽어본 것 같은 착각, 아니었나 싶어요.
그나마 이제라도 읽어보고 재미를 아니 다행입니다.
맞아요, 채만식 다시 읽기, 좋은 프로젝트입니닷! ㅋㅋㅋ

2020-06-16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6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통자 2021-05-1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고, 개화기, 일제 강점기 배경으로 한 시대물에 관심이 생겨 뒤지다가 아주 재밌는 리뷰를 발견했습니다.^^ 조선희의 <세 여자>에 이어 <탁류>, 염상섭의 <삼대>, 그리고 이민진의 <파친코>가 대기 중입니다.

채만식 다시 읽기, 근대문학 다시 읽기 모임 아주 재밌을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1-05-18 14:15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