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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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코’라고 하는 열아홉 살의 젊은 아가씨. 1년 전 조선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고 이 전쟁터에 맨몸으로 펜 하나만 든 채 투신해 날마다 특종을 보도한 반半 영웅적 이름을 떨친 젊은 기자가 있었으니 이름을 ‘기베 교코’라 했다. 1년이 흘러 기베가 도쿄로 귀환했을 때 당시 저명한 의사의 아내이자 요코의 어머니 오야사 여사는 도쿄 기독교부인동맹의 간부 회원으로 출중한 젊은이들을 자주 집에 초대해 밥을 먹이고는 했던 바, 당연히 ‘천재기자’라고 불린 기베 청년도 명단에 포함이 됐었다. 요코가 비록 스물 전이기는 했지만 이미 당돌하고, 교만하며 선민의식에 꽉 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젊음을 즐길 줄 아는 재능을 지녀서 이미 숱한 남성들과 교제를 경험했던 터였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일단 애정을 허락하면 남자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거의 직감적으로 알고 있어서 수컷들이 잔뜩 독이 올랐을 즈음해서 야멸스럽게 상대를 걷어차며 묘한 흥분을 느끼고는 하는 매우 특별한 취미생활에 맛을 들였다.
  이런 경력을 지닌 요코 앞에 기베가 등장했는데, 이번엔 탁월한 청년이라고 알려진 기베와의 교제를 어머니가, 틀림없이 질투라고 단정할만한 이유로. 둘의 사이가 멀어지게 하기 위해 갖은 방해를 서슴지 않는 거였다. 요코는 이에 반발해서 곧바로 기베의 하숙방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하야마(葉山)에 있는 작은 집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청일전쟁이 1894년. 19세기 말의 동아시아에서 결혼한 상류층 남자들이 아내를 대하는 일반적인 관행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살림을 시작하자마자 사랑은 곧바로 냉각하기 시작했고, 기베는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하고 박력 없는 천생 서생에 불과한 것이 극명하게 증명이 됐을 뿐더러, 생계마저 은근히 요코에게 떠넘기는 둔감한 도련님이어서, 본능적으로 물질적 욕망이 충일한 요코는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결국 이들은 짧은 혼인관계를 서둘러 취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다.
  이혼을 한 후, 요코는 기베의 딸을 낳는데, 누구에게도 아이가 기베의 자식인 것을 알리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 오야사 여사에게도. 하지만 외할머니는 친부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책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혼 후 요코는 광란의 삶을 몇 년 구가한다. 숱한 남자들과 밤을 보내고 쉽게 헤어져, 몇 년 후 갑자기 불쑥 나타난 남자가 자신의 영혼을 담아 사랑한다고 울며 호소하는 경우가 생겨도 요코는 남자의 얼굴은 물론이고 언제 어디서 관계를 맺었는지도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그러다가 ‘기무라’라는 젊은이가 나타나 어머니의 추문을 적극적으로 무마해주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이민에 앞서 이제 죽음의 침상에 누운 어머니 오야사 여사 머리맡에 나타나 요코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여 가족회의의 허락을 받아, 요코는 자기 의견과 아무 상관없이 요코하마에서 시애틀로 가는 여객선에 오른다. 때는 19세기 말. 이 점에 유의하시압.
  시점은 이제 1901년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이후 1년 동안 요코의 스토리가 책의 척추를 이룬다.
  20세기가 막 시작한 일본이라는 사회. 여성의 입장에서는 거의 모든 결정과 생활과, 수입과, 이동을 남자의 도움이나 결정에 따라 해야 했던 시기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이런 시기에 요코라고 하는 팜 파탈이 등장한다. 요코는 미국에 있는 약혼자 기무라의 절친한 친구이며 아직 동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고토를 유혹하기도 하고, 여객선의 건장한 체격과 완력의 사무장 구라치 씨의 털이 숭숭 난 가슴 피부의 냄새를 맡고자 그의 내의에 얼굴을 파묻기도 하는 특이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요코는 당장 내일 어떤 불행이 닥칠지언정 눈앞의 환락과 쾌감과 단발마를 버리지 못하는 인물. 시애틀로 향하는 여객선 안에 특별히 속물적인 귀족 다가와 씨 내외가 영 불쾌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코는 바로 어제까지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계급인 사무장 구라치 산키치를 자신의 객실로 불러들여 무아지경의 환희에 빠져들고 만다.
  여태 경험하지 못한 환락을 경험한 요코는 곧바로 약혼자 기무라를 떠올린다. 기무라가 어쨌다는 거야? 돌봐야 하는 두 동생? 미국? 내 딸 사다코가 도대체 어쨌다는 건데? 내내 내게 엄습했던 불안이 뭐가 대수야. 도사리던 자존심이 도대체 뭔데? 그리하여 요코는 시애틀에 정박한 배에서 내리지 않고 그 배를 타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단 하나, 털이 숭숭 난 큰 가슴을 지닌 거대한 체격의 구라치와 함께 빠질 수 있는 환락을 위하여. 구라치에게서 아내와 세 딸을 떨쳐버리게 하고 오직 자신이 그를 독점하기 위해서.
  스토리는 여기까지. 1부를 아주 대강 요약한 정도다.
  읽어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과 장면과 에피소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환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따라 좌우를 둘러보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경주마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감안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상대의 피부와, 냄새와, 존재와 궁극적으로 환락을 포함한 사랑을 향하는 질주. 그렇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풍미하던 자연주의적 전개가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주기는 한다. 당연히 질주의 끝에는 비극이 있을 것임을 책을 읽는 초반부터 알게 되지만 결과를 미리 안다고 해서 재미가 줄어든다는 법도 없다.
  책이 이제 품절이라 헌책방에서 산 것인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표지보다 매력적인 ‘뽕짝’, 트로트다. 은근히 끌리는 장르. 만일 이 책을 <실락원>의 와타나베 준이치가 대강 두 배의 분량으로 늘여 썼으면 어땠을까? 아마 도쿄 인근의 종이 값이 천정부지였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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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으셨군요! 저도 이 책 예전에 중고로 어렵게 구해놨어요. 아직까지 *구해놓기만*..... ㅎㅎㅎ
폴스타프 님 글 보니 예상처럼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0-06-08 09: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일제 자연주의 소설입니다!
재미있어요. 근데 좀 오래된 소설이라, 글쎄 짜릿한 묘사가 안 나오네요.
내 그것만 나왔어도 별 다섯 개 다 주는 건데 말입지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