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시절
찰스 디킨스 지음, 장남수 옮김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또다시 디킨스. 디킨스, 솔직히 웃긴 작가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고 이제 디킨스는 그만 읽자, 해놓고 <황폐한 집>을 읽었고, 이번엔 정말 디킨스 졸업장 받았다고 하고는 또 <어려운 시절>을 헌책도 아니고 새 책을 사서 읽는 건, 혹은 읽게 되는 건 왜 그럴까? 젠더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많은 여성 독자들이 오스틴이 눈에 보이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읽어치우는’ 현상하고 비슷할까? 난 한 번도 여성이었던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여튼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런 것들이 오스틴이나 디킨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자잘한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디킨스는, 읽을 때마다 꼭 ‘청소년을 위한 명작도서’ 가운데 한 권을 읽는 듯한 느낌이 난다. 착하다는 뜻이다. 19세기 작품답게 책의 중간 정도에 이르면 이미 결론이 어떻게 날지 훤하게 보이는 거. 그리고 어김없이 예상 답변을 따라 스토리가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 보면서 독자로 하여금, 거봐 내 생각대로 되잖아, 은근히 기분 좋게 만든다. 여기에 당시로는어쩔 수 없이 첨가되는 계몽적 시선이 보태지고. <어려운 시절>도 이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두 명의 부르주아가 등장한다. 한 명은 어려서 어머니가 자신을 잔혹한 할머니에게 떠맡기고 떠나버려 할머니한테 더 얻어터지다가는 죽을 거 같아 도망을 해 뜨내기, 심부름꾼, 방랑자, 노동자, 짐꾼, 등 당시 영국의 최하층 바닥을 박박 기다가 점원, 총지배인, 소규모 동업자를 거쳐 공업도시 코크타운의 상인, 공장주, 은행가 등의 대부호의 자리에 오른 ‘조싸이어 바운더비’라는 인물로 마흔 일고여덟 살의 미혼남자다. 장가를 들지 않아 집안일을 맡아 해줄 일종의 집사를 고용했는데, 나이 많은 과부로 친가, 시가 쪽으로 아직 위세가 떠르르한 가문의 일원인 스파짓 부인이다. 왜 이이를 고용했는가 하면, 남들에게 자신은 세상의 가장 천한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기가 수하에 상류계급 명가 출신을 두고 있다는 것을 세상 만방에 고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나는 보색대비를 즐기고 있는 거다. 이 두 명은 책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덮을 때까지 전혀 개전의 정이 없는 악역을 담당한다.
  또 다른 부르주아는 ‘토머스 그래드그라인드’ 코크타운에서 철물도매업을 하다가 느낀 바가 있어 사업을 접고 학교를 세워 사회사업을 하는 현실적인 인간으로, 어떤 일이라도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적인 인간, 원칙대로 사는 인간을 육성하고자 하는 열망에 싸여있다. 슬하에 순서대로 루이자, 토머스, 애덤스미스, 맬서스, 제인, 이렇게 다섯 명의 자녀가 있으며 상상력이 거의 없는 아내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에게 많은 지참금이 붙어 있는, 쉽게 말해 돈 많은 바보라서 이었다. 이이는 나중에 코크타운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내는데 책의 실제적 주인공인 맏딸 루이자로 인해 감정 없는 사이보그에서 따뜻한 인간으로 개선되기는 하지만 대가로 자기 이름을 물려받은 큰 아들을 잃게 된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잃게 되는지는, 안 알려줌.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의하여 오직 이성의 힘만을 키우는 교육을 받아 세상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데 익숙한 주인공 루이자가 점점 자라 열다섯 여섯의 나이가 되자 아래 동생 톰을 데리고 마침 동네에 들어온 곡마단 천막의 구멍을 통해 안을 구경하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혼이 나려는 순간, 감히 교장 선생님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지쳤어요, 아버지.” 그래,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에게 여전히 감정은 완전히 무시한 유일 이성의 교육만 내리 시켰으니 이제 속에서 봄을 생각하는 사춘思春의 감정하고 충돌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나 속절없이 세월이 지나 사춘기도 끝나고 스무 살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저 위에서 등장했던 이제 오십 세의 부유한 남자 바운더비 씨가 자기 친구이자 루이자의 아버지를 통해 청혼을 해오자마자,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감정의 활동 없이 그냥 허락을 하고 삼십 년의 차이를 넘어, 전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을 해버린다. 행복하겠지? 읽어보시면 안다.
  어린 루이자가 트인 천막 사이로 구경하던 곡마단 속에 광대 주프가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늙는다는 건 매우 슬픈 일이어서 이제 늙은 광대를 보고 폭소는커녕 웃어주는 사람도 없고, 게다가 특히 뼈와 관절이 변형되어 능숙하게 하던 묘기까지 연달아 실책을 범하고 만다. 이날도 광대는 묘기를 부리다가 그만 나가떨어져 씨씨라고 불리는 딸 씨씰리아 주프에게 약으로 쓸 각기 다른 기름 아홉 병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고는 자신이 키우던 개 메리렉즈만 데리고 사라져버린다. 때마침 이 자리에 있던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씨씨를 후원하게 되어 함께 그의 집 스톤로지에 받아들여 교육을 시키지만 씨씨는 정이 많은 곡마단원들 사이에서 자라서 그런지 숫자 위주로 이성만을 강조하는 학업의 성취에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씨씨를 통해 그래드그라인드 가족 구성원의 가슴 속에 따뜻한 감정이 조금씩 들어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한참이나 지나야 눈치 채게 된다. 씨씨가 등장할 때의 디킨스의 눈길이 얼마나 따뜻한지 나는 씨씨가 주인공이 될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중요한 조연.
  다른 중요한 조연으로 마흔 살 쯤 되는 스티븐 블랙풀과 서른다섯 살 정도의 레이첼 커플. 스티븐에게는 부정하고 방탕한 아내가 있어 거의 혼자 살지만 어엿한 유부남이라 천성이 도덕적인 레이첼과 드라이한 사랑(박완서 선생이 쓴 단어 “건조한 사랑” 인용)으로만 맺어져 있다. 그러나 천상의 사랑. 스티븐과 레이첼의 성격 자체도 정의와 선의, 그리고 따뜻한 배려로 서로의 힘든 환경 속에서 맞는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내려 애쓰는 모습이 짠하다.
  여기에 딱 한 명의 악역 조연만 추가하자. 그래드그라인드 씨의 동료 국회의원의 동생인 제임스 하트하우스. 서른다섯 가량에 잘 생겼고, 외모, 치아, 목소리 두루 휼륭하며, 여기에 예절, 복장 등이 탁월하지만 빨리 싫증을 내는 성향에 특기가 하나 있으니 자신의 불성실을 솔직함으로 가장해 보여주는 일이다. 이이가 또 사는데 싫증을 느끼는 걸 보고 착한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소개장을 써서 사위이자 친구인 바운더비에게 보내는데, 바운더비한테는 젊다기보다 어리고 아름다운 아내가 있는 거다. 그럼 뻔하게 예측할 수 있으니 우리는 그걸 흔히 교통사고라고 부르는 바, 정말 교통사고가 일어날까? 이 책이 출간연도가 1854년. 무대가 19세기 프랑스였다면 교통사고가 나는 건 당연한데 빅토리아 여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던 잉글랜드에서도? 이것도 안 알려줌.
  그래도 디킨스가 당대의 다른 작가들하고 구별이 되는 건, 하층계급의 시민들에게 ‘기본적으로’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는 점. 그들의 생활이나 적어도 돈과 밥을 버는 방법과 환경의 개선을 수시로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그런 경향이 많이 두드러져, 그러다보니 시시때때로 해학적 묘사가 눈에 많이 띄어 독자로 하여금 미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현실적 숫자의 인간 토머스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국회의원으로 당선하자 이를 꼬집어 영국식 도량형인 ‘파운드 법 대표, 곱셈표의 대표,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국회의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씨씨가 지진아로 찍힌 이유가, 개당 14.5펜스 하는 모슬린 모자 247개의 값을 암산으로 즉각 말해보라는 교사 맥초우컴차일드 선생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때문이란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렇게 또다시, 더 이상은 읽지 않겠다고 각오한 디킨스를 읽었다. 이제 정말 디킨스는 읽지 않을 것이지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어디 하나라도 있어야 맹세를 하지,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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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6-04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익숙한 (게다가 재미있는) 드라마 보는 마음으로 읽어요. 유치해, 라고 입으로 말하면서 신파에 울면서 읽고있더라고요;;;; 계속 두껍고 무거운 걸 사고 (읽고) 있습니다. 물론 제인 오스틴도 함께요.

Falstaff 2020-06-04 20:14   좋아요 2 | URL
그죠, 그죠?
유치하고 뻔한 트로트인데 계속 손이 가잖습니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