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1970년대 북아일랜드의 특정시점. 주인공 화자 ‘나’는 열여덟 살의 어린 숙녀. ‘어린 숙녀’라고 하는 건 2010년대의 시각이고 당시 북아일랜드에서는 소위 ‘노처녀’ 단계로 접어들기 바로 전, 즉 결혼적령기의 여성이었다. 보통 아이를 열 명 정도 출산하던 북아일랜드에서 열 명을 출산하기 위해서는 스무 살 전부터 끊임없이 임신, 출산, 수유의 사이클을 돌아야 했을 터. ‘나’의 엄마 역시 ‘나’에게 가능한 빠른 결혼과 출산을 독려하며 끊임없이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를 좋은 남편으로 거론해 ‘나’를 귀찮게 한다.
  ‘나’는 길을 걸으며 20세기 이전에 쓰인 문학작품을 읽는 것하고 조깅이 아니라 러닝 수준의 달리기를 좋아하고, 주 3회 정도 관계를 갖지만 아직은 정식 애인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아쉬운 듯한 ‘어쩌면-남자친구’를 어쩌면-사랑하고 있다. 물론 북아일랜드에서 뿐만 이겠느냐만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와 맺어지지 않거나 못하면서 삶에 관해 ‘망했고’, 대신 허겁지겁 대용품 또는 대리 인간과 결혼해버리는 것으로 길고, 길고, 긴 판단착오 속에서 열 남매를 임신, 출산, 수유, 육아의 사이클에 파묻혔다. 오래 사귄 남자를 여전히 사랑하는 ‘나’의 큰언니가 딱 이 케이스인줄 알았는데 책의 진도를 더해 가면 ‘나’의 곳곳에서 이런 사람을 발굴해 낼 수 있다.
  여기에 1970년대 북아일랜드라는 정치문제가 개입한다. 1969년부터 1991년까지 북아일랜드에서는 약 2천 명의 시민을 포함해 경찰, 군인 2,911 명이 사망하는 국제적 테러리즘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일찍이 민주주의를 발아시킨 영국령에서, 놀랍게도, 종교 때문에, 그것도 알고 보면 교회에서 면죄부를 팔아먹는 행위에 빡친 마르틴 루터가 등장하기 전인 16세기까지 같은 종교였던 두 분파의 싸움 때문에 테러를 해 구조물이 파괴되고,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이 벌어진 것.
  가톨릭 쪽의 테러리스트 단체의 수뇌로, 해당지역에서 가히 대단한 위세를 떨쳤던 ‘밀크맨’이라 불린 마흔한 살 중년의 남자가 첫 페이지부터 등장해 이 책을 큰 범위에서 정치소설로 분류하게 만든다. 41세가 중년? 그렇다. 다시 말 하건데 시대가 1970년대다. 당시 벨파스트 지역은 거의 전쟁에 준하는 국제적 위험지역으로 꼽혔다.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테러리즘이 일상이 되면 남자들은 언제 어디서 생명을 차압당하게 될지 모르고, 여성들은 성폭력의 실제적 위협에 맞닥뜨리게 된다.
  책 <밀크맨>의 설정 자체가 책 속에서 자주 언급이 되는 상도常道 또는 상궤常軌에서 벗어난다. 여태까지 경험한 일반적 시각에서는 주로 피해자나 약자의 입장이, 비록 애초부터 정의와는 거리가 먼 테러리즘 조직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나마 정의와 비슷한 자리를 즐기는데, 로마 가톨릭 입장에서 물 건너 세력에 반대하는 대항군의 수뇌인 밀크맨이 열여덟 살 주인공 ‘나’에게 접근하는 것. 마흔한 살 유부남이 열여덟 살 아가씨한테, 그것도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독립군 대장이 말이지. 여기에 심지어 수하들을 완전히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해 ‘나’를 스토킹하는 수준에 이르니 말 다했다.
  어차피 사람들에겐 비겁한 속성이 있으니까, 밀크맨의 위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으로 완고한 주민들은 ‘나’의 상도에서 벗어난 행위, 길을 걸어가며 <아이반호>를 읽는 행위를 속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밀크맨 때문에 내놓고 비난하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사회를 내리 덮는 밀크맨의 보이지 않는 그늘. 그러다가 정부군 암살자가 쏜 총탄을 맞고 밀크맨이 죽어버리자마자, 바로 그날 밤, 동네에서 가장 좋은 술집의 여자 화장실에 불쑥 처 들어온 누군지 뻔히 아는 복면의 아무개의 아들이 권총의 총구로 ‘나’의 젖가슴을 푹 쑤시면서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저항하는 ‘나’의 눈 주변을 권총으로 후려갈기고, 개별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들한테 죽도록 얻어터진다.
  모든, 아니면 적어도 ‘많은’ 상식적 배려의 기준이 한 가족 가운데 얼마나 많은 가족 구성원이 테러리즘에 희생당했는가 하는 것으로 정해지는 시대. 노년, 그러니까 50세 이상으로 접어든 여인들의 새 사랑을 결정하는 것도 어느 여자가 더 많은 가족을 희생시켰는지, 라는 집단적 기준으로 정해질 정도의 정치적 군사적, 혹은 공포시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삶이라니.
  1970년대에서 바라본 북아일랜드의 앞날은 어떨까. 많은 문학적 컨텐츠에서 미래를 대변하는 것은 아이들. 소수의 남자 아이들과 대다수의 여자 아이들에게 선풍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이 있다. 일찍이 ‘나’의 어쩌면-남자친구를 비롯해 여러 어린 자식들을 그냥 그대로 방치한 채, 큰 아이들아 아직 덜 자란 동생들은 너희들이 대신 키워주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부모. 이들은 평생 스팽글이 달린 화려한 의상을 입고 리우데자네이루로 날아가 세계적인 댄서가 된 부부. 아이들은 너도 나도 언니의 옷 가운데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훔쳐 입고, 턱없이 큰 하이힐을 신어 자꾸 넘어지면서도 다시 돌아온 이들을 흉내내 흥겹게 왈츠를 추러 거리로 나선다.
  1970년대의 어느 날, 공포는 사라진다. 밀크맨이 죽고 잘생긴 진짜 밀크맨, 우유 배달부가 몇 십 년 만에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로 결심하면서 북아일랜드의 흔하디 흔한 과부들이 사랑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애나 번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결국 해결은 사랑, 특히 여성의 사랑이며, 아이들의 즐거움이라고. 여성의 사랑이 땅 속에서 세상 밖으로 고개를 디밀자 정치와 폭력이 사라지는 거였다. 그래, 결국은 권력이 문제고 사랑이 해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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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5-26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거를 수 없는 ‘창피‘ 책이네요! ㅎㅎㅎㅎ

Falstaff 2020-05-26 09:40   좋아요 0 | URL
아 그렇다니까요. 그래 더 밉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