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기 이야기. 책 껍데기에 “자전적 이야기”라고 씌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쓴 작가의 픽션인줄 알았다. 1935년 헝가리 태생의 작가가 소련에 의하여 공산화되자 아버지가 감옥에 가는 등 가족해체를 겪고, 가난 속에서 20대 초반에 엄마가 됐을 때, 김춘수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각인된 헝가리 민주화 운동과 이에 따른 (크리스토프의 주장에 의하면) 3만 명의 학살을 겪은 뒤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을 가게 된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아고타에게 스위스 망명이란 건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버리고 낯설고 발음하는 대로 표기하지도 않아 어렵기 짝이 없는 프랑스어라는 벽을 대면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새롭게 문맹의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 과히 새로운 건 아니다. 체코 출신의 문맹 한 명이 쓴 글을 우리는 열독하고 있지 않은가. 밀란 쿤데라
  이 속에서 공장노동자로 일을 하며 육아를 하고, 틈틈이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프랑스어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1부 <비밀노트>를 써서 국제적으로 대박을 칠 때까지, 자신은 결코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못하리라는 고백. 이런 내용을 수식 없이 담백한 문장으로 기술해놓은 에세이.
  그런데 이 팸플릿을 양장본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겠지만, 반양장이라면 너무 얇아 책이 휘어져버릴 테니, 다 읽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그것보다 조금 더 필요한가? 하여간 이런 자료를 책으로 만들어 정가를 무려 11,000원으로 책정하는 한겨레출판에게 나는 욕할 자격이 없다. 그냥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명성에 눈이 멀어 책의 사양, 페이지 구성 등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편하니까, 책방 가서 사는 거보다 조금 더 싸기도 하니까 앉아서 손가락 몇 번 놀려 사 읽은 주제꼴이니.
  그저 사람은 이름이 나야 한다. 1935년 헝가리 출신으로 아고타 크리스토프보다 굴곡 많은 당시의 인생을 산 사람은 쌔고 쌨다. 크리스토프는 어쨌거나 먹고 사는 데 별 걱정 없는 서방세계로 망명해 배는 곯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행적을 깔끔한 문장으로 이렇게 수채해놓으니 저 극동아시아의 변방에서도 책이 어떤지도 모르고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이름 하나 믿고 선뜻 사서 읽는 거 아닌가 말이지.
  이 정도의 분량은 다른 작품의 뒷면에 서비스로 달아주면 안 될까?
  안 되겠지? 이래봬도 신자유주의 시댄데 어찌 현금 지불 없이 한 줄의 글을 읽게 내버려 두겠어?
  기대가 컸는데 말씀이야. 그래 실망도 더 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우리말로 바꿨더라도 문장 하나는 정말 깔끔하지 뭐야. 원문은 얼마나 더 좋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다맨 2020-04-0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만으로 작가적 소임을 다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후에 나온 작품들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부분적인 변주나 일종의 잔향 정도로만 읽혀서요.
그나저나 한국 출판사들, 시집도 아닌데 저 정도 분량의 작품을 단행본으로 내놓는 관행은 좀 지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Falstaff 2020-04-07 13:40   좋아요 0 | URL
조금 지나면 크리스토프의 다른 소책자 <약속>도 읽을 예정입니다만, 이 책과 비슷한 팸플릿 수준이면서 간행하는 출판사가 다릅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냥 샀습지요.
말씀하신대로 <약속>을 끝으로 크리스토프는 이제 졸업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