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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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슈디의 소설, 하면 1번이 재미다. 지칠 줄 모르는 입담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독자가 한 번 이이의 책을 손에 들었다하면 당최 눈을 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본문이 550쪽이다. 당신의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하시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을 듯하다.
  루슈디의 십팔번인 인도 내 이슬람교 가족, 파키스탄에서의 생활, 인도의 정치상황 등은 이 책에선 많이 보이지 않는데, 이이가 영국에서의 도피생활을 끝내고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 다음 첫 번째로 선보인 소설이라서 그랬을까. 하여간 소설에서 코즈모폴리턴 작가의 주요 무대는 세계의 심장 뉴욕이다. 책의 주인공은 말릭 솔랑카 교수. 정확하게 말해 한때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의 전 종신교수. 종신교수라 함은 죽음이 솔랑카 교수를 세상과 헤어지게 하기 전까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라도 킹스칼리지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여기에 합당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신분을 말한다. 그런데 왜 전前이란 접두사가 붙었을까? 지금 살고 있는 장소가 케임브리지가 있는 영국이 아니고 왜 뉴욕일까? 설명해드리지.
  1980년대 말 솔랑카 교수가 학회참석 차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교수는 국립박물관인 레이크스 뮈세윔의 엄청난 보물창고에 전시된 인형의 집에 매료, 심취, 도취되어 버렸다. 이후 모든 사물과 사람을 인형처럼 축소시켜 바라보게 되었으며 그러다보니까 생명체는 모두 소멸해버리고 물건들만 남는 현상이 벌어져 오히려 혐오감만 들어서 이후 다시는 암스테르담에 발길조차 하지 않게 된다. 케임브리지로 복귀한 교수는, 원래부터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던 데다가,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로 인형을 만들어볼까, 싶어서 사상사思想史 학자답게 ‘위대한 지성인들’이란 인형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 버트란트 러셀이 전시의 반전집회장에서 경찰의 곤봉에 얻어터지는 장면
  - 키에르케고르가 막간의 휴식을 위해 오페라 극장에 들리는 장면
  - 마키아벨리가 고통스런 스트라파도 고문을 당하는 장면
  - 소크라테스가 운명의 독배를 마시는 장면
  - 두 개의 얼굴과 네 개의 팔을 가진 갈릴레이
  이런 인형을 제작하고, 때마침 BBC 방송의 심야 철학사 시리즈의 강사를 맡아 시청자를 대신한 질문자이자 대리인으로 지적인 시간여행을 하는 ‘리틀 브레인’이란 여성 인형을 출현시켰는데, 그만 리틀 브레인이 전 세계적인 대표 컨텐츠로 완전 대박, 이후 방송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산업의 모델로 등장하자 리틀 브레인의 창조자인 솔랑카 교수는 시간별로 통장에 찍히는 로열티만 가지고도 남은 생을 일하지 않고 사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는 거. 부럽지? 난 부러워 죽겠다.
  ‘솔랑카 현상’이라고 아시나? ‘말릭의 원자로 폭발’이라고도 한다. 평상시에는 남들 배려 잘하고 성실하지만 독후감에서는 밝힐 수 없는(스포일러?) 모종의 이유 때문에 우울증 증세가 있는 말릭 솔랑카 선생이 별 것 아닌 일로 갑자기 분노가 폭발해 나중에 기억도 하지 못하는 욕설과 악담과 저주를 큰 소리로 퍼붓는다든지 하는 갑자기 난폭한 행동을 하는 현상을 말한다. 쉬운 얘기로 충동성이 매우 강한 성격. 55세의 나이가 절대로 젊은 게 아니라서 ‘하늘’이란 뜻의 '아스만'이란 이름의 세 살배기 어린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이를 원하는 아내 엘리너 매스터스와는 사랑이 이미 지나가고 이젠 후유증만 남은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제 아이를 또 낳는다면 아이가 스물이 될 때 자신의 나이가 여든에 가까워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거다. 그럼에도 가임기만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를 졸라대는 아내와 겉보기에만 평안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을 뿐. 아내 엘리너가 새끼 양의 다리를 오븐에 굽고, 포도주를 세 병 장만해 식탁에 촛불을 밝혔던 날, 말릭 솔랑카는 아내에게 “오늘 가임기지?” 라고 어깃장을 놓았으며, 엘리너는 아스만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며 “그래 맞아”라고 고백했고, 솔랑카는 포도주 세 병을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 부었다. 오븐에서는 새끼 양의 다리가 새까맣게 타며 연기가 온 집안을 덮어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순간 겉보기에 평안한 가정의 가장 솔랑카는 진짜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껴 식칼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잠든 아내의 몸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돌아서 손님용 방에서 잠을 청했고, 아침이 되자 일언반구도 없이 가방을 꾸려 뉴욕 행 비행기를 타버렸다.
  그런데 이 양반, 뉴욕에 와서도 이런 돌발성 충동이 멈출 조짐이 보이지 않아 문제다. 날이 갈수록 술도 늘어 이젠 아침에 깨보면 옷을 다 입은 채로 어제 했던 말과 행동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날이 늘어가기 시작한다. 평소엔 별 불만 없던 화장실 배관 때문에 집주인에게 성질을 폭발시키고, 배관을 고치러 온 독일계 유대인, 특이한 경력을 가진 배관공인데, 독일 해군의 유보트에 승선해서 잠수함 내 모든 배관을 수리하는 탁월한 실력 덕에 아우슈비츠의 흰 연기가 되는 대신 종전 때까지 유보트를 탄 늙은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사에 해보라, 제목을 ‘쥬보트 Jew-Boat’라 하라는 등 비아냥거리기고 하고,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파출부 비스와바가 난데없이 “당신이 나를 이유 없이 해고했으니 계약기간 동안의 임금은 다 받아야 하겠수,”라는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상류층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스물, 열아홉, 열아홉 살의 매력적인 부잣집 딸들인 로렌, 벨린다, 사스키아가 차례대로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다음날 아침 솔랑카 교수가 침대에서 옷을 다 입은 채로 눈을 뜨자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을 했고,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난밤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손이나 옷에 피가 묻어 있지도 않고 흉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솔랑카 교수는 영 개운하지 못한 감정을 숨길 수 없어 한다.
  이때 이후 교수 앞에 차례로 등장하는 두 젊은 여성. 밀라 마일로와 친구 잭 라인하트의 애인이었던 아름다운 닐라 마헨드라. 밀라와는 연인관계에서 새로운 컨텐츠 ‘갈릴레이 1호 행성’의 동업자 관계로 발전하고 닐라는 엉뚱하게도 다시 세계적으로 대박을 친 새 컨텐츠를 이용해 쿠데타가 벌어진 자신이 태어난 나라 릴리푸루블래푸스쿠로 돌아가 혁명군 또는 쿠데타 군에 가담해버린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분노의 여신이 셋. 티시포네, 알렉토, 메가이라. 머리 가죽이 벗겨진 채 살해당한 부잣집 딸도 로렌, 벨린다, 사스키아. 이렇게 세 명. 우리의 말릭 솔랑카 교수가 현재 인연을 완전히 끊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잇지도 못하는 여자가 아내 엘리너를 포함해 밀라와 닐라까지 모두 세 명. 이거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안 알려줌.



  * 책의 뒤편에 가면 지구 반대쪽에서 분노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를 뉴욕 시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오랜 불평등에서 비롯된 집단적 분노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루슈디가 책을 쓸 때마다 강조해 온 문화적 충돌의 화해 불가능한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짐작해, 그라운드 제로 이야기가 언제 나올까, 끝까지 궁금했으나, 이 책이 발간된 해가 2000년이고 911 테러는 2001년이었다. 루슈디는 개인의 분노를 결국 전 지구적 분노 현상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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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12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읽지는 못해도 사서 쟁여
두고 싶은 그런 책이네요...

Falstaff 2020-03-12 10:28   좋아요 0 | URL
루슈디 책은 대개 그런 생각이 들지요? ^^ 저도 그렇답니다.

잠자냥 2020-03-12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윽 맞아요. 루슈디 책은 저 일단 사둔 <한밤의 아이들>부터 읽어야 하는데 *발동동* 이것도 쟁여두겠습니다.

Falstaff 2020-03-12 11:21   좋아요 0 | URL
흐흐... 전 그래서 일부러 루슈디 검색하지 않습니다. 그냥 서핑 중에 눈에 띄면 어김없이 한 권 사서 읽고, 이러고 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