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틸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8
막스 프리슈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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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의 작품은 <몬타우크>와 <나를 간텐바인이라 하자>를 읽었는데, 이번에 <슈틸러>를 선택할 때는 고민 좀 했다. 건조한 문장으로 사람들 사이의 삭막한 관계를 모래처럼 그리고 있다는 것이 이이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는데, 이 책은 무려 600쪽을 넘어간다는데 헉, 했던 거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단박에 프리슈가 펼치는 논의를 수긍하며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 화이트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미국과 멕시코에서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다가 이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스위스 취리히로 가던 기차를 타고 있다. 그런데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승객이 기분 나쁘게, 분명히 비 에티켓이라 생각할 수 있는 시선으로 ‘나’를 관찰하더니 ‘나’를 몇 년 전에 소련연방의 스파이였던 스미르노프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행방불명된 슈틸러라는 이름의 조각가라고 스위스 경찰에 신고 해버린다. 체포되는 와중에 영문을 모르는 ‘나’는 상당히 취한 채로 한 경찰의 따귀를 후려갈겨 어차피 유치장 구류는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린다. 그래 길이 3.10, 폭 2.40, 높이 2.50미터의 좁은 감방에 수감된다. 감방이 작고 숨을 못 쉴 정도로 청결하며 모든 것이 어찌나 정확하고 적절한지 ‘나’의 가슴까지 답답할 지경이다. 비단 감방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스위스라는 작은 나라와 국민들 대부분이 이렇게 꽉 짜여 정형화된 틀에서 단단하게 조직되어 있는 자체가 ‘나’를 숨 못 쉬게 만든다. 스위스의 대도시 취리히에서는 거지나 장애인을 한 명도 만나지 않을 수 있고, 사람들은 우아하지는 않지만 질 좋은 옷을 입어서 결코 동정심을 느낄 필요도 없으며 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깨끗한 상태로 유지가 된다. 이런 나라 안에서 질식할 듯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 이런 ‘나’의 취향이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나와 아주, 아주, 아주 잘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책의 맨 앞부분부터 그래,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어찌나 신이 나 읽었는지.
  여기에 등장하는 국선변호사 보넨블루스트 씨. 이 사람을 묘사하는 내역을 보자. ① 선량하고 악의 없는 사람, ② 좋은 집안 출신, ③ 약간 주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마저 예의범절의 일부로 그렇게 행동하고, ④ 사소한 일에 까지 정의로운데 그게 과해 절망스러울 정도로 정의로우며, ⑤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특히 스위스의 관심사에 관련해서는 백과사전 수준에다가, ⑥ 스위스를 무조건 칭찬하지 않으면 결국 언제나 부당한 사람이라고 판단한단다. 이게 스위스 출신의 작가 막스 프리슈가 조국의 전형적인 중상층 인텔리들에 대한 소묘다. 이런 성향의 보넨블루스트 박사는 피고인을 변호하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나톨 루트비히 슈틸러라는 인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독자는 스위스의 특정 집단에 의하여 거대한 음모가 건전한 미국인 ‘나’를 특정인물로 바꾸려 한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변호인은 노트와 펜, 잉크를 주고 자신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예를 들어 직업, 수입, 체류기간, 자녀의 수, 이혼 회수, 종교 등 확인이 가능한 사실을 모두 써보라고 권하고, ‘나’가 이 제의에 응해 무려 일곱 권의 노트를 빽빽하게 채운다. 이게 책의 1부로 무려 506쪽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책의 진짜 조연은 국선변호사가 아닌 ‘롤프’라는 이름의 담당 검사. ‘나’는 나중에 롤프 검사와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만, 굳이 어떤 사이까지 가는지는 스포일러가 될까봐 밝히지 않겠다(야한 생각은 하지 마시고). 14년 전엔 야채장수였다가 직업을 바꿔 교도관이 된 크노벨 씨한테 ‘나’는 전에 아내를 살해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교도관의 보고를 들은 검사는 첫 만남에서 ‘나’에게 “당신은 아내를 살해했지요, 미스터 화이트?”라고 질문함으로써 ‘나’를 헛갈리게 만든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성품이 아주, 아주, 아주 고결한 사람으로 고상하고 우아해서 이런 사람과 산다는 걸 검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아내 앞에서 접시를 벽에 내동댕이친 적이 있는데 마치 자신이 살인범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미국과 멕시코와 남미의 각 지방에서 숱한 사람들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며, 지적 수준이 조금 낮아 수감자가 지어낸 스토리를 그대로 믿을뿐더러 즐기기까지 하는 교도관은 이 수감자의 놀라운 고백을 진실로 생각해 그대로 검사에게 보고한 것이다.
  슈틸러라는 인물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기본 군사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슈틸러에게 타호 강변에서 조그마한 나룻배를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탄탄한 참호 속에 혼자 나룻배를 지키고 있는데 파시스트군 네 명이 나룻배를 가져가기 위해 접근을 한다. 그러나 슈틸러는 완벽한 엄폐 참호에서 개활지의 적병에게 총격을 가하지 않고 총을 든 채 그들에게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들이 먼저 총을 쏘면 자기도 쏘려고. 그런데 이상도 하지, 적병들도 총을 쏘지 않는 거다. 그래 그들에게 포로가 된 슈틸러는 자기 허리띠로 팔과 다리가 묶여 금작화 밭에 그냥 버려져 이틀 만에 갈증으로 실신한 채 아군에게 발견된다. 이 사실은 슈틸러의 우울증 또는 죽음, 자살에 기본적인 관점으로 책의 곳곳에서 이야기 되고는 한다.
  이렇게 작품은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검사는 ‘나’를 조각가 아나톨 슈틸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눈치이며 심지어 파리에 사는 ‘나’의 무용가 아내 ‘율리카 슈틸러 추디’와 상봉하게 한다. 아내 율리카 뿐만 아니라 진도를 더해가면서 함께 어머니의 산소에 가보자고 요구하는 착한 동생 빈프리트 슈틸러, 한 시절 남편을 버리고 아들과 함께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났으나 뉴욕에서 정착하다 다시 남편에게 돌아온 옛 시절의 정부도 등장하고, 건축가 슈투르체네거가 나타나며, 더 뒤로 가면, 검사는 ‘나’가 슈틸러임을 밝히기 위하여 현장검증이란 이름으로 변호사와 율리카와 교도관 크노벨을 대동하여 예전에 슈틸러가 사용하던 아틀리에까지 들른다. 그래도 ‘나’는 슈틸러가 아닌 걸 어떻게 하나.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이 1부에서 일곱 권의 노트에 쓰이는데, 홀수는 감방이나 현장검증에서 ‘나’가 당하는 상황을, 짝수에서는 예전에 슈틸러와 관계가 있었던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어떤 자초지종으로 엮였는지, 스토리가 몇 개의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된다. 마지막으로 짧은 2부에서는 이제 ‘나’가 자유의 몸이 된 이후 어느 새 그의 친구 또는 친구 이상이 된 검사가 돈이 거의 떨어져 제네바 호수 근방에 있는 산골 지역 보에서 ‘보의 농가’에 터를 잡고 희한하게도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것과 특징이 비슷한 접시나 그릇을 ‘스위스 자기’라는 이름으로 미국 관광객에게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태까지 쓴 독후감에서 나는 이 독후감이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많은 것을 비틀어 소개했다. 물론 거짓으로 쓴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건 이 책이 막스 프리슈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절대 과장이 아닐 만큼 흥미롭게 여러 대상, 국가나 인간, 사랑까지를 조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할 때 한 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를 사랑해? 아니면 사랑하지 않아? 지금 모든 게 거기 달려 있어. 오로지 당신한테 달려 있다고.”
  그러나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는 “온전한 끝도 없고 그래서 온전한 의미도 없는 실망스런 이야기야말로 진짜처럼 들리는” 것을, 아하, 어이하리.
  매우 흥미로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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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러서 얼마 전에 사둔 책인데...

역시 선빵하셨네요 !!!

Falstaff 2020-02-17 15:26   좋아요 0 | URL
아이고, 매냐 님도 무슨 말씀을. 벌써부터 별렀던 건데 좀 망설였던 책입니다. 읽어보니 괜히 쫄았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