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집 범우문고 53
박재삼 지음 / 범우사 / 198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시절에는 시인들이 이런 시를 썼다.


 이렇게 한 줄을 써 놓으니 더 말을 붙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하루를 그냥 보냈다. 슬픔. 아련한 슬픔.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 유독 슬픔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 어머니의 고향에서 시작한 유년시절부터 해변의 가난한 소년시절, 고독하고 궁상스러워 틀림없이 실연을 경험했을 청년시절, 서른이 넘어 시작했으나 3년 만에 작파한 대학시절, 1960년대 말만 해도 변두리 산동네였던 정릉에서 중년에 이르며 이후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혈압, 위하수, 신경통 등에 시달리던 한 세상살이, 이 모든 것에서 비롯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시집에서 발견하는 슬픔은 피를 토하지도 않고, 취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도 아니고, 자신을 산산이 쪼개는 자해의 모습은커녕, 무채 또는 유채의 아름다움으로 독자의 심상을 조각하고 만다. 시집을 열고 맨 앞에 나오는 시 <울음이 타는 가을 江>. 말을 보탤 필요 없는 박재삼의 대표시를 읽어보자.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전문)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즉 한가을의 강이 이제 먼 길을 마치고 노을에 젖어 바다에 이르는 광경을 노래한 시다. 산골 물소리로 시작한 기쁜 첫사랑이 한 생을 다 마치고 이제는 독자에게 수수께끼로 ‘미칠 일’ 하나를 남겨두고 바다에 거진 와 가는, 소리 없이 흐르는 가을 강. 그것을 시인은 독자에게, 저것 봐, 저것 봐, 영탄하며 바라보기를 재촉하고 있는 시. 깊은 병도 아니며, 독한 고통도 아니고, 철철 흐르는 피도 아닌, 슬픔으로의 아스라한 아름다움이 시 속에서 보이지 않는가. 한 시절, 시인들은 이런 시를 썼다. 젊었다는 이유 하나로 가질 수 있는 슬픔이라는 특권. 아, 누군들 이런 것 하나쯤 가지고 살지 않았을까.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마지막을 읽고 저절로 저려오는 가슴 속 아련한 그리움이여, 아름다움이여, 그리고 이미 저만치 지나간 나의 젊음이여. 썅. 하마터면 눈물 하나 떨어뜨릴 뻔했다.
 시인의 심미안은 봄바다 저쪽에 떠있는 섬 하나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화안한 꽃밭 같네 참.
  눈이 부시어, 저것은 꽃핀 것가 꽃진 것가 여겼더니,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한 그러한 꽃밭의 저것은 저승살이가 아닌 것가 참. 실로 언짢달 것가, 기쁘달 것가. (<봄바다에서>. 부분)



 라고 노래하며 만물이 움트는 봄의 바다, 그 위에 떠있는 섬을 보면서조차 저승살이를 떠올리는데 세상에, 그것이 반드시 언짢은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더니 어려서 자신들을 아껴주던 한 여인, 남평문씨부인의 자살사건을 떠올리며 봄바다를 그 여인의 치맛자락으로 은유하고 있다.


  우리가 少時적에, 우리까지를 사랑한 南平文氏夫人은, 그러나 사랑하는 아무도 없어 한낮의 꽃밭 속에 치마를 쓰고 찬란한 목숨을 풀어 헤쳤더란다.
  確實히 그때로부터였던가, 그 둘러썼던 비단치마를 새로 풀며 우리에게까지도 설레는 물결이라면
  우리는 치마 안자락으로 코 훔쳐 주던 때의 머언 향내 속으로 살 달아 마음 달아 젖는단 것가. (같은 시. 부분)



 시인은 연애를 해도 애인한테 부끄러워 슬프다. 근데 슬픔의 근원인 부끄러움이 예상외의 장소인 <과일가게 앞에서> 촉발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나는 당할 수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냄새에 홀려
 살戀愛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도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전문)



 재미있다. 시인이 과일가게 앞에서 수박이며 참외를 내려 보고 있는데 수박의 둥근 모습과 참외의 단 맛을 애인의 몸에 은유하고 있다. 애인의 맑은 눈과 고운 볼, 재잘거리는 귀여운 모습 대신 둥근 몸과 달콤한 맛이라는 살(로 하는) 연애를 연상함으로써 시인은 스스로 복잡하고 아픈 짐을 지었는데, 그게 부끄러워 이제쯤 내려놓을까 한단다. 이쯤 되면 시인에겐 세상살이 모든 것이 다 아픔이고 부끄러움이고 슬픔이어서 아름다움이려니.


 한 시절에는 시인들이 이런 시를 썼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수봉우리 2021-02-08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보면 인생은 눈물같은 것이고
삶과 더불어 죽음도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있고
때는 가을의 해질 녘이고
다다른 곳은 등성이 저 편으로 노을이 타고 있는
가을 강이다.

죽음의 인식보다 앞서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가을 강이 가슴까지 파고 들어와
울음까지 콱 막히게 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미학인 동시에
삶에 대한 자각이다.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 대한 글인데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시 못지 않게 좋은 것같아 한번 올립니다 --

Falstaff 2021-02-08 20:06   좋아요 0 | URL
오, 시도 아니고 시를 읽은 감탄을 외우고 계시는군요.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