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턴 휴스 -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0
랭스턴 휴스 지음, 오세원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문학사에서 랭스턴 휴스의 단편집을 출간해 읽을 때까지 나는 이이의 책은커녕 이런 작가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연표를 보니 1902년생이고,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캔자스 주에서 외할머니와 유년 시절을 보내고, 소년 시절은 재혼한 어머니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는 이혼하고 멕시코로 날라버린 아버지한테 엉겨 붙어 1920년, 놀랍게도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아참. 진작 밝히고 시작해야 할 것이 있었다. 랭스턴 휴스는 미국 국적의 아프리칸-아메리칸, 즉 흑인이다. 인종차별이 만발한 대학을 일 년 만에 때려치우고 이번엔 화물선에 일자리를 얻어 아프리카, 유럽 등지를 구경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24년에 시인으로 등단을 해 주로 시를 발표하는 한편 미국도 시만 써서는 밥 먹고 살기가 팍팍한지 호텔 급사 등의 자잘한 일자리를 거친 듯이 보인다. 또 인종차별에 대한 대안으로 공산주의에 경도된 적도 있는가보다.
 그의 인생에서 화물선 승선에 따른 아프리카 등 온갖 항구의 모습, 불경기 시절 흑인으로 일자리를 구해 생계를 꾸려가는 어려움, 쿠바 혁명세력 지원, 그리고 흑백을 불문하고 인간의 영원한 탐구인 연애와 불륜 등이 바로 이런 연표를 만들 수 있는 삶을 살았던 랭스턴 휴스의 마흔한 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이 담고 있는 소재가 된다. 우리 같은 보통의 사람들한테는 휴스 같은 파란만장하고 징글징글한 삶을 사는 게 하나도 좋은 게 없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인간들, 우리가 흔히 작가라고 일컫는 소수의 인종들한테는 이런 삶을 통해 (평론가 강상희의 정의에 의하면) “경험의 언어”로 작용해 작품에 생명력과 삶을 부여하기도 한다.
 휴스의 작품 속 흑인들은, 내가 읽은 것이 단편소설뿐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흑인 작가들에 비해 투쟁 또는 고발, 평등의 주장 같은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그러나 모든 작품 속에 자신이 흑인임을 자각하고 있으며, 직접 경험한 사회 역시 여전히 한 기차에 흑인과 백인이 함께 앉지 못했으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다니엘도 남부지방의 시사회 자리에 서지 못했고, 대형호텔엔 뒷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했던 지독한 시절이라, 휴스의 경험 수치는 후배작가 군group이 아니라 자신보다 아홉 살 많은 조라 닐 허스턴과 더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글 속에 백인들의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더 상세하게 묘사한 것을 보면. 휴스가 태어나고 6년이 더 지나 세상을 구경한 리처드 라이트와 12년 후배 랄프 엘리슨은 작품 자체가 장편이고 이제 흑인 문학이 어느 정도 활발하게 논의를 시작해 본격적으로 백인을 살해하고 시신을 화로에 태워 없애며(미국의 아들), 단체를 구성해 체계적으로 흑백평등을 주장하기 시작한다(보이지 않는 인간). 이런 행동파 작가들의 바로 앞에 랭스턴 휴스가 있는 듯하다는 말을 이리 지겹게 길게 했다.
 그럼 랭스턴 휴스는 그저 완곡하기만 할까. 천만의 말씀. 이이의 단편들에서는 흑인들의 머릿속에 충만해 있는 스스로의 왜소성,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신의 이익을 좇는 흑인 지도자들의 위선, 백인들이 품는 흑인에 대한 동정의 허위성 같은 것을 은근히 비틀고 있다. 초지일관 모든 작품을 통해.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에서는 남편이 죽어 엄청난 돈벼락을 맞은 백인 노인 엘즈워스 여사가 음악에 천재가 있는 흑인 아가씨 오시올라를 발굴해 백인식 또는 유럽식 문화의 영혼을 심어주기 위해 최상의 환경을 마련해주지만 정작 오시올라는 음악이면 음악이지 고귀한 영혼은 뭔 말라비틀어진 것인지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것하고, 건달 출신의 흑인 개신교 존스 목사가 대박을 치기 위해 스스로 24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있다가 부활한다고 사기를 치려다 목사 자신의 정부favorita인 메기 브래드포드 자매의 전 애인 불도그 힉스와 공모를 하긴 했는데, 힉스 형제가 메기를 뺏긴 복수를 하기 위하여 정말로 왼손 손바닥에 못질을 쾅쾅하고, 이에 맞춰 존스 목사가 비명을 질러대는 코미디 <어느 부활>을 재미있게 읽었다.
 라이브러리에 랭스턴 휴스라는 미국 흑인 작가 한 명을 더 보탠 것도 좋은 일인데, 좋은 단편 몇 편을 읽는 기회이기도 해서 더 좋은 경험이 됐다.



 한 가지 유감이라면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의 첫 문장이 “피아니스트 오시올라 존스는 파리에서 필리프에게 사사를 받았다.”라는 것. 사사師事하다라는 단어 자체가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으로 ‘사사를 받았다’는 말은 여차하면 주객이 전도되게 읽힐 수 있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흔하게 저지르는 오류다. 이렇게 써야 한다.
 “피아니스트 오시올라 존스는 파리에서 필리프를 사사했다.”
 나 참, 프로 역자한테 아마추어 주제에 별 걸 다 지적한다. 이런 거 슬쩍 일러주지 않고 공개된 장소에서 지적질한다고 타박이나 안 받았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REBBP 2020-01-08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작품이 다 좋았지만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를 특히 재밌게 읽었어요ㅋㅋㅋㅋ 뭔 말라비틀어진 고귀한 영혼 ..격하게 공감

Falstaff 2020-01-08 15: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마리아 칼라스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근데 김추자 나오면 미쳐버린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