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입술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0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책세상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마누엘 푸익은 여태 <거미여인의 키스>와 <천사의 음부> 이렇게 두 권을 읽었을 뿐이다. <천사의 음부>는 읽은 때가 꽤 되는지 독후감 써 놓은 것이 없다. 그 책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어쨌든 내 경우에, 푸익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다른 이의 작품을 읽을 때보다 더욱 집중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 책 <조그만 입술>은 가상의 아르헨티나 소도시 코로넬 바예호스에서 출판한 월간지 <우리 이웃>의 1947년 4월호에 실린 ‘후안 카를로스 에체파레’의 부고 기사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애 둘 달린 유부녀 ‘넬리다’, 애칭 ‘네네’가 읽고, 옛 시절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의 죽음을 가족과 함께 애도하기 위해 고인 후안 카를로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살디바르 데 에체파레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여튼 스페인, 라틴 아메리카 소설들 읽을 때는 이 길고 긴, 그리고 동양인의 눈으로는 서로 비슷하기까지 한 이름 기억하는 것이 문제다. 러시아 소설도 그런 면이 있지만 그거야 이름, 부칭, 성, 이렇게 세 번만 기억하면 되는데, 라틴 계열 작품에서 이름 쓸 때 띄어쓰기 열 번 하는 것도 봤으니 절로 고개를 흔들 수밖에.
 하여간, 두 아이의 엄마로 사는 여자가 첫사랑이었던 남자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해서, 자신에 대하여 극히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집안의 안주인에게,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아들 후안 카를로스가 분별없는 자기와의 데이트를 하느라 감기에 걸렸고, 폐렴으로 번졌으며, 결핵으로까지 발전해 드디어 숟가락 놨다고 굳세게 오해하고 있는 고인의 어머니에게, 새삼스레 자기 일생에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가 지금 남편이자 두 아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의 잘 생긴 아들 후안 카를로스였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기는 한 것인가, 아니면 적어도 서양인 사고방식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이게 미풍양속인가, 나는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몇 번의 교통사고를 낸다. 자동차가 굴러다니며 부딪거나 뒤집어지거나, 다리를 건너다 난간 너머로 다이빙을 한다는 뜻이 아니고, 인간관계, 즉 인간의 소통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사고가 생긴다는 뜻. 물론 내 개똥철학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 죽은 이의 엄마한테 편지를 써서 소설을 시작하게 만든 넬리다가 예전에 후안 카를로스와 서로 애가 타게 사랑을 하면서도, 처녀도 아니었던 주제에(시대가 1930년대임을 감안해서 읽어주시라) 한 번 허락했으면 됐을 것을, 후안으로 하여금 갈증에 몸이 타게 만들어 자신과 헤어진 후에 다른 과부를 찾아 날이 밝을 때까지 정염의 불을 끄게 하는 바람에 귀한 집 외동아들한테 겨울바람을 자정부터 새벽까지 맞아 감기, 폐렴, 폐결핵까지 진행시키게 만든 것이 후안과의 첫 번째 교통사고라 하면, 십여 년이 흐른 후 후안이 결국 결핵으로 인해 숨이 넘어갔다는 부고를 읽고 편지, 글을 써서 고인의 어머니한테 과거의 사랑과 현재의 못생기고 역겹고 추한 남편에 관해 조잘거리기 시작한 것이 두 번째 교통사고다. 그까짓 편지 때문에? 그렇다. 넬리다는 Littera Scripta Manet의 뜻을 새겼어야 한다. 글로 쓴 건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언제 어느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증거자료로 제출될 수 있는 지울 수 없는 자국임을, 넬리다는 깜박 했던 것.
 넬리다, 네네가 편지를 씀으로 해서, 소설은 급전직하 1930년대로 넘어간다. 같은 장소의 10여 년 전에는 세 명의 발랄한 아가씨가 등장하니 넬리다와, 후안 카를로스의 누나인 셀리나, 셀리나의 친구 마벨. 서양에서는 봄이 시작할 때쯤에 장대를 높이 세우고 주위를 돌며 춤을 추는 봄의 축제를 하는 관습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봄을 시작하는 9월에 봄의 여왕을 선출했던 모양인데, 대개 클럽에 소속된 괜찮은 집안의 영양들 가운데 뽑았던 거 같다. 그래 좋은 집안으로 불리고 당연히 클럽에 가입한 셀리나와 마벨 가운데 한 명, 꼭 집어서 얘기하자면 마벨이 당연히 봄의 여왕 왕관을 쓸 줄 알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셀리나와 마벨의 소개로 가입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넬리다가 감히 여왕으로 선출된 거였다. 마벨은 교사 자격증이 있는 매력적인 아가씨고, 네네는 잡화점의 계산원 신분에 불과하거늘. 이리하여 마벨과 셀리나는 자연스럽게 네네를 따돌리기 시작했고, 후안은 네네와 연애를 하면서, 줄 듯 말 듯, 애간장만 태우다 덜커덕 폐병에 걸려버려 짝사랑하던 마벨은 물론이고 서로 사랑하던 네네마저도 아버지가 절대 결혼 불가를 외침으로써, 중개인을 만나 결혼을 해 거처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버린다. 이러니 이 세 아가씨 사이가 온전할 수 있겠어?
 이런 와중에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과 지역에 별의 별 사건이 다 터지고, 그것이 배경처럼 깔리면서 작품은 더 복잡하게 얽히는데, 내용은 별개로 하고, 소설의 시점, 발언하는 주체가 수시로 바뀌면서, 이젠 읽는 일에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즈음이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절명의, 그러나 언젠가 한 시절엔 복음처럼 외우고 있지 않으면 엄청나게 얻어터지던 경구, 졸면 죽는다, 잠깐의 해이함도 허락하지 않는 독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300쪽을 조금 넘는 적절한, 약간 짧은 듯한 느낌이 드는 장편소설로, 거창하지 않지만 재미있고 생각할 만한 작품이다. 출판사 책세상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가격이 착하다는 큰 장점이 있다. 그러니 여러 생각할 필요 없이 냉큼 사 읽어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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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1-22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푸익에 빠져서 그의 책을 읽던 시절 생각
이 나네요.

거미여인은 영화가 소설보다 나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그만 입술>도 중고서점에 있기에 냉큼 사서
읽기는 시작했는데 결국 못 다 읽은 기억이...

찾아서 다시 읽어야지 싶습니다.

Falstaff 2019-11-22 09:14   좋아요 1 | URL
ㅎㅎ 본문에 쓴 것처럼, 이 책 읽다가, 졸면 죽습니다.
거미여인 영화는 못 봐서요. 한 번 뒤져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