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열전 동서문화사 월드북 177
김영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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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세다 대학 중문과를 수학하고 홍익대, 충남대 교수를 역임했다고 하는 김영수가 역해를 했다. 역해譯解. 번역하여 쉽게 풀이함. 독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적어도 역자가 어떤 책을 번역했는지 원본 텍스트는 알아야 한다. 나는 김영수가 역해했다고 하고, 동서문화사가 저작권법 부칙 4조에 의하여 적법하게 자신들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이 책을 읽었는데도 이게 김영수가 여러 책을 읽고 춘추전국시대의 영웅들에 관하여 정리를 한 것인지, 어느 한 텍스트를 말 그대로 번역해서 쉽게 풀이한 책인지, 모르겠다. 실제로 <죽서기년>, <사기열전>, <춘추좌씨전>에서 각 등장인물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비교하며 이들의 차이점을 통해 출생이나 가문 등을 추리한 내용이 여러 번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사서들의 비교를 자칫하면 역해자인 김영수가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역해자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와세다 대학의 역사과가 아닌 중문과를, 졸업도 아니고 수료한 정도의 가방끈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일본어 실력이 출중한 역해자가 중국인이 쓴 중국어 책 대신, 일본인이 쓴 일본 책을 번역했을 수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원본을 밝히지 않았는지 안타깝다. (난 도대체 어떤 책을 읽은 거야?) 말 그대로 열전. 사마천에서 시작한 기전체 역사서의 열전. 열전의 공통점은 재미있다는 거. 춘추전국시대에 맹활약을 했던 마흔여섯 명의 영웅들이 자신의 천재를 발휘한 요약집summary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옛날 주나라에서는 하늘을 나는 용의 침을 궤에 넣어 보관해 (은나라도 아니고 하나라 시절부터 수백 년 간)전해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판도라의 상자처럼 궤가 열리더니 배리배리한 냄새가 나는 용의 침이 오물오물거리다가 용과 같은 종류의 파충류, 즉 검정 도마뱀 비슷한 조그마한 운동체로 변해 쪼르르 달려가서 한 열 살 먹었을까 하는 궁녀의 치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거였다. 그때부터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난데없이 임신의 기미가 보이기를 무려 사십 년. 그러다 기어이 어느 날 진통 끝에 경국지색, 한 번 보기만 해도 온몸이 뻣뻣해질 정도의 계집아이를 생산했다. 기원전 790년경에도 이미 하늘의 용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받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 인간이 있었다는 말씀. 하여간 이제 다 늙어 아이 엄마가 된 예전의 궁녀는 살기 힘들어 그랬는지, 다 늙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게 쪽팔려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이 아이를 내다 버렸고, 그걸 포褒나라 사람이 거두어 키우다가, 죽은 다음에 유왕幽王이라고 불릴 주나라 임금에게 갖다 바쳐 대가로 받은 돈으로 팔자를 고쳤다고 하는데, 그 돈으로 정말 팔자를 고쳤는지 자식들 간의 유산 싸움으로 다 거덜이 났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이리하여 유왕의 애첩이 된 포나라 여인 포사가 너무, 진짜로 너무 아름다운지라 바라만 보고 있어도 해 저무는지 몰랐던 유왕이 참으로 통탄할만했던 일은, 이 아이가 도대체 웃지를 않는다는 거. 궁정광대를 불러도, 음유시인을 초빙해 와도 결코 웃는 법이 없던 용의 딸이 어느 날 하루 유왕하고 같이 앉아 있었는데 심부름을 하던 한 궁녀가 지나가면서 자기의 비단 치마가 의자 모서리에 걸려 찍, 찢어졌고, 이 비단 찢는 소리를 들은 포사가 그만, 배시시, 웃었으며, 경국지색의 포사가 배시시 웃는 것을 보고 유왕은 너무 좋아 속옷에 찔끔, 미량의 전립선액을 사정해버렸다는 거 아닌가. 이때 나온 말이 “자지러지다.” 뭐 아니면 말고. 이때부터 유왕은 시도 때도 없이 비단을 대령시켜 포사가 보는 앞에서 찌직, 그 비싼 옷감을 찢어대고 이때마다 포사가 배시시 웃는 걸 보고, 그때마다 또 찌직, 미량의 사정을 해대는 바람에, 주나라 왕실의 비단이 나마나지를 않았는데, 당시엔 비단이 돈과 유사한 거래의 수단으로 포사의 배시시한 웃음 때문에 국고가 거덜이 나고 있던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북쪽의 오랑캐가 침략해온다는 봉화가 울려 각 제후국에서 군마를 이끌고 도성으로 몰려오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이 가득 몰려왔다가 봉화 지키는 병사들 몇이 라면 끓여먹다가 불이 옮겨 붙은 실화失火사건에 불과한 것을 알고는 김이 새서 한숨을 푹 쉬는 장면을 누각에서 내려다보던 포사가 이번엔 단순호치丹脣皓齒, 즉 붉은 입술과 진주같은 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으며, 어느 때보다 활짝 웃는 포사가 또 얼마나 어여쁜지 이번에 유왕은 그냥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 포사의 활짝 핀 웃음꽃을 위해 시시때때로 거짓 봉화를 올리기를 몇 차례. 이제 제후국에선 봉화가 아무리 올라도 그저 콧방귀만 픽, 뀌고는 말게 되고, 바로 이때를 도모해 진짜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와 기원전 771년에 유왕을 붙잡아 몸에서 힘줄을 빼버리고 죽을 때까지 남문에 걸어두었으며(이 사형 문화가 서쪽으로 넘어가 십자가 형刑이 됐다지 아마?), 포사는 믿거나 말거나, 백여우로 변신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여태까지 쓴 건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구라도 아니고, <사기>를 포함한 여러 책에서 나온 걸 참고로 내가 각색한 어지간한 진실이다.) 이건 몇 백 년에 걸친 전설이다. 사실은 유왕이 왕세자를 폐하고 포사가 낳은 아들을 새로이 세자로 봉하려 하는데다가, 주위를 아첨에 능숙한 신하로 채우는 동시에 국정에 관심을 쏟지 않아 불만을 품은 제후국 몇몇이 떼로 몰려와 나라를 뒤엎어버렸다는 것이 <춘추전국열전>의 기반이다. 그리하여 나라가 멸망했으나 그대로 둘 수 없어 뜻있는 자들이 낙읍으로 수도를 옮겨 다시 주나라를 세워, 이 전 시대를 서주, 이때부터를 동주로 나누었으며, 동주시대부터는 말로만 봉건 주나라시절이지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는 그저 대륙의 바지사장 구실에 그칠 뿐이었다. 주나라의 바지사장 시절. 이때를 사학자들은 춘추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춘추시대가 열림으로 해서 이제 대륙은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분할이 된 상태. 이 가운데 가장 힘이 센 몇을 고르라면, 당연히 두 개의 진나라. 하나는 결국에 중국을 통일하는 진秦나라요, 다른 하나는 위魏, 조趙, 한韓, 이렇게 세 개의 작은 나라로 쪼개질 운명의 진晉나라, 장왕莊王 시절에 전국의 패권을 지배했던 초楚나라 정도이며, 진晉이 위, 초, 한. 세 개의 나라로 찢어져 물론 아주 작은 몇 개의 나라를 제외하고 연燕, 조趙, 제齊, 초楚, 위魏, 한韓, 진秦, 이렇게 일곱 나라가 합종과 연횡으로 이합집산을 하던 때를 전국시대로 구분한다.
 이 시절이 역설적으로 중국 문화가 탄생하고 가장 활발하게 발전한 시기였다는 건 다들 아는 상식이고, 그에 못지않게 재미있는 일화와 사자성어가 숱하게 쏟아지던 때라서 꼭 역사책을 읽는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보는 기분으로 읽어도 참 괜찮은데, 여기에 더불어 진짜 실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라 실감나는 교훈까지 얻을 수 있다. 다만 조금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춘추시대는 그렇다 치고, 적어도 전국시대 일곱 나라 연燕, 조趙, 제齊, 초楚, 위魏, 한韓, 진秦이 당시에 어떤 지역에 있었는지는 알고 읽는 것이 좋다. 일곱 나라를 저런 순서로 쓴 건 전국의 합종연횡과 관련한 이유가 있어서이며, 나도 이 순서로 외우고 있다. 여기다 춘추시대 진晉나라가 조, 위, 한 이렇게 세 나라였다는 걸 알고 읽으면, 가장 잘 팔리는 사마천, 민음사에서 나온 김원중 역의 <사기 세가>의 오류까지 쉽게 발견할 수도 있으니 그냥 참고나 하시라는 뜻에서.
 나는 언제나 전국시대 조나라의 젊은 인상여와 노장 염파 사이의 알력과 화해에 이은 문경지교刎頸之交,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는 우정에 대단히 감동을 받는다. 국가에 충성? 나는 그건 모르겠고, 두 훌륭한 인격이 만드는 아름다운 그림 때문에. 어떤 영웅들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근데 이 책을 읽느니, 사기열전이 더 낫지 않을까? 그건 적어도 누가 쓴 어떤 책을 번역했는지는 아니까 말이지. 그냥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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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9-11-12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사 이야기 참 오랜만입니다. 동주 열국지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쑥대 전통과 뽕나무 화살 이야기로, 그 파란만장 백화만발 춘추전국 열국의 이야기의 시초가 바로 경국지색 포사아닙니까ㅎㅎㅎㅎ

Falstaff 2019-11-12 20:1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전 동주열국지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책도 재미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