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간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2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 지음, 박채연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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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많이 읽는 서재 친구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작품. 320쪽에 불과한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이지만 그리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작가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살라망카 대학의 의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살라망카 대학 졸업생으로 번쩍 떠오르는 인물이 <사랑과 교육>, <안개>를 쓴 미겔 데 우나무노, 18세기 중엽이 무대인 <운명의 힘>에서 주인공 레오노라의 오라비 돈 카를로가 떠오를 만큼 대단한 학교이다. 수재 스타일인 산토스는 외과의사 수련의 시절을 거친 후, 불과 스물일곱 살 때 산 세바스티안 정신병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왜 그의 이력을 열거하느냐 하면, 책의 주인공 페드로가 비록 외과전문의 자격증을 소지하지는 않았지만 암이 유전되는지, 환경에 의한 것인지를 암세포를 가진 실험용 쥐를 이용해 규명하려는 (해부학과 관련한 뛰어난 손기술을 지닌)연구원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페드로가 연구원이기도 하고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외과의 자격증을 보유한 상태였다면 이 작품은 완성될 수 없었을지 모르고, 끝을 맺었더라도 만인의 동감을 얻지는 못했을 터이다. 왜 그런지는 직접 읽어보시면 아실 것이다.
 출판한 해는 1962년이지만 시간적 배경은 1949년이다. 책 속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를 대표해서 ‘한국’이 등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집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도 월세를 전전해야 하는 이는 ‘한국인’이라 말이 나오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유럽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거지꼴’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게 되는 기회를 만드는데, 산토스 역시 시기적 배경인 1949년과 불과 1년 차이가 나는 전쟁 시기를 잠깐 헷갈렸던 것으로 보인다. 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1949년이라면 스페인도 다른 유럽국가와 비교해 그리 잘난 것이 없어서, 파시스트 프랑코가 내전을 일으켜 3년 동안 나라를 거덜 냈고 이어진 2차 세계대전에 은근히 독일 편을 드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번번한 상공업적 기반시설 하나를 갖추지 못한 지경에 떨어진다. 그리하여 작의 시작부분에 “가난한 민족. 누구도 다시는 노벨상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고, 다시는 지고한 왕의 미소, 위엄을 갖춘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며, 이 메마른 반도에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들과 강물이 넘쳐흐르기를 바라는 현자의 출현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한다. 실험에 사용해야 하는 쥐가 다 떨어졌다. 그까짓 쥐, 그러나 특별한 암 유전자를 보유한 쥐 하나를 배양하지 못해 비싼 돈을 주고 미국의 일리노이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와야 하는 쥐를 다 써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맞아 절망하고 있을 때, 그의 조수 아마도르가 말하기를 한때 연구소에서 잡일을 하던 무에카스라는 작자가 쥐를 한 쌍 집에 가지고 갔으며 (그때는 쥐가 많아 한 쌍 정도는 그냥 줄 수도 있었으니까), 그 사람 집엔 이 쥐들이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새장 하나에 한 마리씩 얼마든지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하여 우리의 페드로와 아마도르가 무에카스의 집으로 떠나며 이 우화적이고, 사회 비평적이고, 무엇보다 포스트 모던한 단락들이 즐비한, 뛰어나게 매력적인 소설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대략적인 스토리를 이야기하자면, 페드로와 아마도르가 무에카스의 집에 가서 쥐의 존재를 확인하고, 힘도 센 칼잡이 카르투초의 애인이자 무에카스의 큰딸인 플로리타가 쥐들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만들어 왕성한 번식을 유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여간 쥐들의 공급을 확보해놓은 것도 잠시, 한밤중에 페드로가 사는 하숙집에 무에카스가 들이닥쳐 큰딸 플로리타가 죽어간다면서 페드로를 부르러 온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누군가가 야매로 플로리타에게 소파수술을 했고, 와중에 생긴 것이 분명한 자궁벽의 천공에서 무수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어 벌써 가사상태로 들어가 있다. 이미 거의 죽은 플로리타를 관찰한 페드로, 이 외과의사 자격증이 없고 뛰어난 해부학적 손기술을 가진 연구원은 즉시 수혈과 정확한 소파수술이 필요하다는 걸 확신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간다. 물론 수혈 없이. 그리고 역시 플로리타는 죽는다. 며칠 후 공동묘지에 삼단으로 묻히고. ‘삼단’이 뭐냐고? 서양식 매장법인데, 나도 미국 드라마 <과학수사대>를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터로, 땅을 아끼느라 묘혈을 파서 관을 세 단으로 안치하는 방법이다. 며칠 후, 마드리드 과학수사대가 영장을 들고 와 다시 세 구의 시신을 꺼내고 그 가운데 플로리타의 관을 해부해본 결과 의문의 여지없이 ‘타살’이란 결론을 내리게 되며, 의리 없는 조수 아마도르의 애매한 발언으로 페드로가 플로리타를 죽인 범인으로 체포된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책은 더 복잡한 상황들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침묵의 시간>이란 작품은 스토리만 좇아가서는 재미의 반도 낚아채지 못하는 전형적인 작품. 나는 읽어가며 페드로가 한밤중에 무에카스에 의해 잠이 깨 그의 집으로 떠나기 전쯤에, 어째 좀 익숙한, 아니면 적어도 한 번쯤 본 듯한 묘사기법이 등장한다는 걸 발견했고, 연이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상당한 부분이 비슷하다고 단정을 했다. 하여간 그리 생각하면서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방의 ‘책 소개’를 보니 “주인공의 내면독백이나 의식의 흐름 기법을 구사한 다양한 문체로 ‘스페인의 <율리시즈>’로 불”린다고 한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 나는 속물이다. 이렇게 딱 찍어서 내가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씌어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기분이 으쓱하지 않겠는가. 우리 아마추어 독자들에게는 이런 것도 ‘사소한 책 읽는 즐거움’이니 그리 고깝게는 여기지 말아주시기 부탁한다.
 그렇다. <율리시즈>와 매우 흡사하다. 만일 이 책이 조이스의 그것처럼 18부, 어마어마한 분량의 번역문학이라면, 끝까지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읽어보시라. <침묵의 시간>도 기념할 만한 문학적 성과이며, 적어도 <댈러웨이 부인> 비슷하게 명작의 반열에도 올라야 한다. 독자들에게 아직도 낯설게 다가가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작가가 39세 때인 196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일찍 숟가락을 놓아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의 이른 죽음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을 만큼 빼어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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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2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별 다섯 작품이군요! 사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조만간 곧 읽어보겠습니다. 그 사이 이 책 품절이네요. ㅎㅎ 미리 사두길 잘했네요. ㅎㅎ 이 리뷰도 책 다 읽은 다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19-10-25 10:42   좋아요 0 | URL
옙. 이런 책 품절시키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