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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 연애대위법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217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경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3월
평점 :
대위법對位法이라고 하면 서양 고전음악의 작곡기법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지 마시라. 소설에서 대위법이라고 하면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주제가 나란히 전개되는 형식’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작곡이나 소설작법에서 대위법이라는 의미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Point Counter Point>. 이것을 우리말 제목으로 <연애 대위법>이라 했는데, 애매하긴 하지만 책의 내용을 보면 딱히 불량한 번역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제목이 대위법이라고 하니 그럼 이 작품에는 서로 다른 주제가 병치倂置되는 형식을 사용한다는 건 알겠다. 여기에 올더스 헉슬리, 애초부터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집안에서 태어나 다양한 방면으로 좋은 교육을 받아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까지) 학문 전반에 두루 깊은 지식을 보유한 지적인 작가가 당대 영국 상류사회를 냉소적으로 비튼 시각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이때 헉슬리의 나이가 34세. 서른네 살의 젊은이가 쓴 소설이지만 분량도 만만하지 않고, 대위법을 쓴 작품답게 구성도 복잡한데다가 신학, 과학, 음악, 미술, 사상 등에 대한 논의 역시 무수하게 담겨 있어서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다. <연애 대위법>의 성가에 걸맞지 않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책은 황해도에 있는 해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이경직 선생이 번역한 동서문화사 본 한 권밖에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햄릿이 5막에서 얘기했듯, 벌써 “천국의 행복을 멀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이경직 선생의 번역문 속에 예스런 표현은 거의 볼 수 없다. 당시 사람들이 즐겨 표현했던 한자어 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문장은 쉽게 읽힌다는 얘기다. 동서문화사가 어쨌든 책의 중판을 가독성 있게 찍는데 회사의 명운을 걸었다는 건 한 눈에 알 수 있겠다.
그러나 이해하기 곤란한 한자어도 별로 없고, 표현조차 예스럽지 않으니 책 ‘전체’가 쉽게 읽히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도빼기가 쉽지 않다. 이만한 분량의 소설에서 이렇게 많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또 본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많다는 건 주인공 자체가 없다는 것과 거의 비슷한 말일 수도 있다. 물론 기본 골조는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었어도 치마 두르고 얼굴만 반지르르한 여인네만 보면 주책스럽게 침을 꿀꺽 삼키는 이름난 화가 존 비들레이크 가족 구성원들과 각 구성원의 친구나 주변인들이 어울리면서 벌이는, 주로 연애 사건이다. 하지만 기본 골조가 그렇다는 것이지 저울의 추가 비들레이크 가家로 기운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존 비들레이크의 절름발이 소설가 사위이며, 사교성 없고 고집불통에다가 부부사이마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필립 퀄스나, 이들의 서민 출신 똑똑한 친구로 화가와 소설가를 겸업해 성공중인 마크 램피언이 더 큰 출연분량을 차지하는데, 이는 헉슬리가 주로 이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내 경우에는, 촌철살인의 냉소와 희화화, 그리고 풍자에 주목하게 됐다. 그러나 진도를 나가면서 점점, 조금씩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첫 페이지로 다시 이동해 다시 읽기 시작하니, 이젠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드는 거다. 과장하지 않고 얘기해서 <율리시즈>를 읽을 때 직감하던 ‘낯선 난처함’. 그게 또다시 들이 닥쳤다. 디덜러스와 블룸의 난장판까지는 아니더라도 등장인물들 각각의 독특한 사상과 성격과 변설과 연애사건 등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맛이 나는 희극처럼 그려진다. 딱 한 커플, 곱게 생긴 평민 출신 남편과 씩씩하게 생긴 부르주아 출신 아내로 이루어진 램피언 부부만 빼고. 이 부부만이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이상적 가정이고 다른 모든 가정은 적어도 하나씩 중대한 흠결이나 불행, 우환을 가지고 있다. 우리말 제목을 ‘연애’ 대위법이라고 한 건, 품행 방정한 램피언 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부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어서일까.
<연애 대위법>은 영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말 읽어보실 분은 각오하시라. 원고지 기준으로 한 줄에 40자, 한 페이지에 30줄 편집을 고수하는 출판사라서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늦는 것이 당연할지라도, 본문 540쪽 읽는데 닷새 걸렸다. 읽은 다음에도 지금 내가 책을 이해하고 독후감을 쓰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쓰는지 지금 헛갈리고 있다. 제법 읽다가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었는데도 그렇다. 마음 같으면 두었다가 한 20년 쯤 지나 다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그땐 나도 천국의 행복을 멀리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