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과부 중국전통희곡총서 4
왕런제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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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중국전통희곡총서를 읽고 있는데 네 번째 책이 왕런제의 <선비와 과부 董生與李氏>다. 해설을 보면 극작가 왕런제가 푸젠성 취안저우 출신이며 그곳이 비록 (상대적으로)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적으로 뛰어나고 미적 감화력이 충만한 이원희梨園戱라는 지방 극종이 있다고 하며, 작중 각주를 통해 혼인 장면을 들어 무대가 이원희가 있는 취안저우의 풍습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이 작품도 예전 이름으로 하면 회계에서 남해까지(쉽게 얘기하자면 상하이 아래서 홍콩까지)를 중심으로 하는 천극川劇, 월극越劇, 곤극崑劇 등 남송 시절 남희南戱의 전통을 이은 창작 희곡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정도까지면 아마추어 독자, 관객 입장에서는 충분하리라 믿는다. 우리가 흔히 베이징 오페라라고 하는 경극京劇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에선 경극 등 예전 금나라, 원나라 시절의 곡曲에 더불어 남송의 남희南戱 역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정도.
 극작가 왕런제가 1942년 생. 1942년 생이면, 불행한 중국의 현대사 속에서 낳고 자라고 인생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청년기까지 모두 바친 중국판 따라지 세대인데 놀랍게도 전통 희곡을 계승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판소리 네 마당 말고 후대의 극작가가 있어서 계속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지난번 <반금련>을 쓴 웨이밍룬도 마찬가지로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존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실제로 공연도 하고 심지어 세계 각지로 활발하게 소개, 공연을 계속하기도 하니 정말 부럽다.
 <선비와 과부>는 원래 제목을 보자면 <동 선생과 (과부)이씨> 정도로 할 수 있는데, 내용 면에서는 정말로 팔구백 년 전 남송 시절에 공연했던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은 의미에서 촌스럽고, 재미있다. 무대는 타이완을 마주보는 취안저우 지역. 중국에서 썩 높지는 않은 관직으로 원외員外라고 있었나보다. 이 관직을 하고 있던 팽씨 성을 가진 인물이 있어 팽원외彭員外라고 불렀다. 이이가 나이가 들어 귀밑머리 푼 조강지처가 숟가락을 놓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새장가를 들었는데 상대가 젊디젊은 이씨 부인이었다. 팽 선생 본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를, 그건 두 여인과의 사이에 아무 씨도 퍼뜨리지 못했다는 것. 자손만 없는 것도 아니고 부모는 벌써 장사를 지냈고, 형제자매도 없어서 세상에 피붙이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팽 선생도 드디어 염라대왕의 명부에 정한 날짜가 도래해버렸다. 그래 드디어 저승에서 사자가 둘이나 도착해 소매를 잡고 올라가자고 조르는 터. 팽 선생 생각하기를, 자기가 저승 가는 건 나이 든 필멸의 존재라 당연하지만 새파란 이씨 혼자 두고 명을 다하면 틀림없이 이씨가 개가할 것이라는 걱정이 대단한 거다. 그래 다 죽어가는 팽 선생의 머리에 떠오른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하나 있었으니 그 인간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자, 동네 서당의 훈장이자, 천명, 대인, 성인의 말씀을 경외하는 것도 모자라 여인마저도 경외(공경하여 두려워)하여 사외四畏라고 칭하는 동 선생, 이름하여 동사외董四畏였다.
 그래 저승사자에게 은 백 냥을 뇌물로 주고 십 분의 시간을 벌어 동사외를 불러 당부하기를, 생전에 자네가 내게 빈 은 열 냥, 이자까지 합해서 스무 냥을 없는 것으로 하고, 대신 자기가 죽으면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할 이씨가 외간남자와 연애를 하는지 잘 감시하고, 만일 그럴 경우 꼭 둘 사이를 파투를 내야하며, 조사 결과를 매달 한 번씩 자기 묘에 와서 보고를 해달라고 한 다음에야 영혼이 몸을 떠난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의 동 훈장이 이씨가 나설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하는데, 아이고,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여기까지 쓰고, 양해해주시라, 오늘이 한가위 날이다. 따뜻하게 데운 백화수복 700cc 마시고 와서 좀 알딸딸....)


 공통의 현상이 벌어지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견물생심見物生心. 눈으로 보면 마음이 생긴다는 뜻. 노총각 동 훈장은 자기도 모르는 새 이씨 부인에 대해 은근한 집착이 생기고, 이씨 부인 역시 동 훈장의 글 읽는 소리만 듣고도 예전 진로소주 CF 가사처럼 ‘온 몸이 짜르르르....’의 경지에 다가서니 어찌 인간의 힘으로 교통사고를 막으리오. 근데 이게 사대부 동씨 집안에선 가비얍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이미 구천의 귀신이 됐다한들 어찌 한 순간이라도 매끈매끈하고 포동포동한 이씨의 살결을 잊을 수 있을까, 팽 원외 두 양반들의 뜻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나, 그놈의 육체가 원하는 걸. 그렇지? 아시지?
 어떻게 되는지는 중국의 전통희곡을 읽어보신 분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터, 굳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들 이해하실 듯. “안 알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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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0-01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자람 소리꾼이 브레히트 희곡을 판소리로 개작한 ‘억척가’, ‘사천가’, 김애란 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을 판소리로 만든 ‘여보세요’가 있어 참고하십사 말씀드립니다.
http://m.hankookilbo.com/News/ReadAMP/201108171146250395?did=GS
http://m.kyeongin.com/view.php?key=20171106010001536#rs

Falstaff 2019-10-01 15:03   좋아요 1 | URL
아, 그렇습니까.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자주 공연해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