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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열두 편을 실린 단편집. 장편 <아메리카나>와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를 읽고 이이의 단편은 어땠을까 싶어서 일단 사두었지만, 읽기까지 기다리다가 그만 이 책이 단편집이란 걸 깜빡 잊어버려 첫 번째 실린 작품과 두 번째 단편 사이에 이어지는 스토리가 없어서 대략 난감했다. 웃기다. 별 일이 다 생긴다.
아디치에의 이력을 보면 1977년 뱀띠 여성으로 나이지리아 의약대를 다니다 열아홉 살(네이버 해외저자사전에선 열여덟 살) 때 미국으로 유학, 필라델피아의 드렉셀 대학에서 언론정보학을 수학하고, 이스턴 코네티컷 주립대에선 언론정보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존스홉킨스 대학과 예일에서 각각 문예창작과 아프리카 학으로 석사를 받았단다. 아, 이건 저번 독후감에도 쓴 거 같다. 어쨌거나 이 정도면 그녀의 조국 나이지리아에서는 거의 최상급의 조건 또는 환경, 계급 속에서 잘 교육받은 재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아무리 나이지리아 상류사회라도 열아홉 살 때, 즉 1996년 가을, 신자유주의의 기수인 아메리카 땅에서 어찌 나름대로 고생하지 않았겠느냐만, 그래도 이 책의 <전율>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치네두’만큼이야 했겠는가. 현재는 프린스턴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미국과 나이지리아를 왔다 갔다 하며 지낸다고 한다. 직장이 미국이니까 암만해도 미국에 거주하는 시간이 더 길 거 같기는 하다.
내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나> 속에서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이제 나이지리아로 가려는 순간 미용실에 가서 흑인들 특유의 ‘꼰 머리’를 위해 몇 시간을 헌정하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나오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도 여러 편의 작품이 미국에서 생활하는 유학생, 이민자, 불법 체류자를 스케치하면서 조금은, 물론 아주 약간이지만 <아메리카나>의 장면과 겹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단편은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의 무대인 비아프라 독립의 배경이 되는 이보족 학살사건을 다루기도 하고(사적인 행위), 비아프라에서 있었던 극심한 굶주림을 짧게 언급하기도(유령) 한다. 장편을 쓰면서 수집했던 방대한 자료를 생각과 달리 작품에 다 담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데, 채택하지 못한 자료를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깝고, 중복해 같은 작품을 쓰긴 또 좀 그렇고, 하면 자료의 단편斷片으로 단편소설短篇小說 몇 개 더 쓰는 건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싶다. 또 나이지리아의 지식인으로서 계속되는 독재 권력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이는 학생, 교수들을 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모르긴 몰라도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을 듯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면 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무데뽀 독재에 복무하는 나이지리아 경찰들이라도 쉽게 건들지 못했을 터이니.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좋게’ 또는 ‘공명하며’, 라는 의미하고 달리 말 그대로 다만 그저 인상 깊게) 읽은 건 제일 마지막에 실린 <고집 센 역사가>였다. 이 단편은 놀랍게도 나이지리아, 정확하게 얘기해 그 중에서도 남동쪽에 자리한 이보족의 터전에 이제 막 도착해 세력을 넓히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개신교/가톨릭 선교사 시절, 그러니까 19세기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휙휙 속도감 있게 내달리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건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20세기 아빠인 치누아 아체베의 영역인데 그 땅에까지 불쑥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편 한 작품에 담으려 몇 대에 걸친 대하 스토리를 과하게 축약해버리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말 그대로 그런 대하를 장편으로 풀어놓아봤자 저절로 아체베의 앞선 작품들과 비교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고, 아체베라는 장벽을 넘어서기엔 너무 많은 품을 팔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선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무난하게 읽히는 단편들의 모음. 특별한 걸 기대하지는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