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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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선 주커먼. 필립 로스를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친숙한 이름이 될 수밖에 없는 유대인 작가 영감이다. 네이선 주커먼이 미국 문단에 처음 나타났을 때는 단편소설 한 편 달랑 쓴 청년작가였다는데, 이제 로스와 함께 나이가 들다보니 일흔한 살의 유명 작가 노인네가 돼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 마음 고생 깨나 했지만, 뭐 그게 인생인 걸. 이 책은 어제 독후감을 쓴 존 벨빌의 <바다>와 더불어 책방 보관함에 몇 년 씩이나 장기 보관했던 것으로 이번에 변덕이 도져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이름으로 봐서 전형적인 유대인인 주커먼 선생은 10여 년 전 누군지도 모를 인간(들)에게 살해위협을 지속적으로 받고 견디지 못해 뉴욕에서 약 130 마일 떨어진 아테나 대학 근처의 산골, 사방 반 마일 안쪽으로는 인가 한 채 없는 완벽한 벽촌에 박혀 지낸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립선 암 수술로 인한 요실금증상으로 늘 노인용 기저귀를 착용한 상태로 생활해야 하며 발기부전 증세 역시 남은 생애 동안 완벽하게 주커먼 노인을 지배할 예정이다. 70대에 이른 주커먼 선생의 인식 속에는 암만 생각해봐도 과도하게, 호조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발기부전 증세 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다. 자의식은 책이 진행해감에 따라 더욱 심화 발전시켜 노인의 머릿속에 젊고 아름다운 등장인물과 엉뚱한 대화를 마련하게 되는데 그게 반복됨에 따라 혹시 늙은 필립 로스가 이젠 글을 좀 쉽게 쓰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책을 읽으며 <유령퇴장>을 통해 저자 필립 로스 스스로 언제 죽을지 몰라 죽기 전에 반드시 남겨야 할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수행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 독후감을 쓰기 바로 직접, 구글 검색을 해보니 <유령퇴장>이 로스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었다. 이런 책은 돈 받고 팔면 안 되지. 오히려 책 찍어 놓고, 문학공부를 하는 후학들이 책을 읽어준다면 대가로 몇 푼 씩 쥐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건데, 이 책은 노 작가가 후학들에게, 자기 죽은 다음에 자기 생애나 작업 등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유언 또는 당부의 글로 읽힌다. 거기다가 대강 스토리를 입히고, 로스 특유의 맛 나는 입담을 섞어 주물럭 짬뽕을 만들어놓은 거다. 로스 특유의 맛 나는 입담이 뭐냐고? 에이, 다 아시면서. 걸쭉하게 야한 이야기들.
 그동안 필립 로스의 책 다섯 권에 대하여 독후감을 썼다.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포트노이의 불평>, <죽어가는 짐승>,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한 편도 빠짐없이 재미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아니다.


 매사추세츠 주 서쪽의 시골 촌마을에 사방 반 마일 안으로는 인가 한 채 없었는데, 어느 날, 전직 변호사이자 아직도 왕성한 생활력을 자랑하는 래리 홀리스 부부가 우연히 그 ‘반 마일’ 떨어진 이웃집으로 이사를 온다. 래리는 인생을 달관하는 경지에 이르러 오직 자신 혼자의 만년을 즐기고 있는 네이선의 삶에 자주 침투해 털이 긴 고양이 한 마리, 털이 짧은 고양이 한 마리를 고양이 용품 일습과 함께 선물하기도 하지만, 하필이면 여태까지 뭐했는지 매사추세츠 시골로 이사 오고 나서 우연히 암에 걸리고 만다. 자신의 부모가 다 암으로 죽었는데 죽는 과정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죽기까지 남은 가족들에게는 또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던 래리는 스스로 딸이 결혼하기 전날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해 자살을 해버리는데, 이 와중에도 반 마일 떨어져 살고 교류를 나눈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이웃 독신남자 늙은이 네이선에게조차 유서를 남겨 촌에 묻혀 혼자 살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며 살라고 당부할 정도의 친밀한 관계 또는 오지랖을 자랑하는 남자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네이선은 3년 전부터 뉴스나 신문 등의 외부세계와 접촉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전립선 수술 후의 요실금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처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마운트시나이 병원 비뇨기과 돌팔이 의사에게 처치를 받기로 하고 뉴욕으로 와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일주일 간 머문다. 처치에 관한 상담을 하고 병원 아래층에서 기억에 남는 외국인 억양을 쓰는 목소리를 우연히 발견하는데 그 여자를 가장 최근에 본 것이 48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인지 알아내 메디슨 에비뉴의 작은 식당에까지 따라간다.
 다음날 오전에 비뇨기과 처치를 받은 다음, 곧바로 요실금 증상이 없어진 듯한 마음으로 유니언 스퀘어 남쪽에 있는 헌책방 스트랜드 서점에 들러 우연히 백 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E.I. 로노프의 여섯 권짜리 단편 전집 초판본을 발견해서 산다. 집에도 한 질 있지만 뉴욕에 있는 동안 그의 작업을 연대별로 훑어보기 위해. 여섯 권을 내일 출발할 예정인 뉴욕에서 훑어본단다. (돈이 썩어난다, 썩어나.)


 다음날 예전 뉴욕 살 때 단골로 들리던 이태리 식당에 가서 밥을 먹다 4달러 50센트를 주고 산 <뉴욕 리뷰 오브 북스>를 들쳐보다가 뉴욕의 아파트와 시골집을 1년간 바꿔 살자고 제안하는 광고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우연히’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드시나? 좋다 그럼 조금 바꿔보자. 광고를 낸 30대 부부는 공교롭게도 둘 다 작가 또는 작가지망생이라서 네이선을 보자마자 유명작가인 걸 알아보고 그의 작품 역시 데뷔작부터 최신작까지 다 읽은 상태다. 그런데 이들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가 한 명 있어서 이름을 리처드 클리먼이라 한다. 클리먼은 지금 공교롭게도 어제 네이선이 헌책 전집을 산 로노프에 관해 전기를 쓰고 있다가 평소 로노프를 동경해마지않았던 네이선이 뉴욕에 도착했다는 걸 작가부부로부터 듣고 호텔에 전화하기에 이른다. 헌책방의 아르바이트 점원 가운데 한 명도 공교롭게도 클리먼의 친구였단다. 게다가 어제 병원에서 발견한 이상한 억양의 자그마한 노파가 놀랍게도 클리먼의 동거녀 에이미였다. 클리먼보다 마흔 살이나 젊은 여인이며 그의 아내 호프로 하여금 혼인관계는 유지하되 집을 나가게 만든 이.
 이런 현상을 우리는 보통 “우연의 힘”이라고 부르고 더 진지한 사람들은 “운명의 힘 La Forza del Destino”라고도 한다. 근데 불행하게도 지금 시대는 21세기.
 <유령탈출>이 2007년도 작품이며 로스는 이후에도 세 권의 책을 더 쓴다. 마지막 작품 <네메시스>까지 다 번역해 팔리고 있긴 한데, 읽지 않을 거 같다. <유령탈출>에서 이제 로스의 기력이 다 했음을 본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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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1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모니터링했던 책이네요 :>

그런데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그래서 예전에 썼던 리뷰를 봤네요.

그나저나 <미국을 노린 음모>는
언제나 나올 지 그것이 궁금하네요.

Falstaff 2019-09-19 15:25   좋아요 0 | URL
필립 로스가 그런 책도 썼나요?
ㅎㅎㅎ 처음 들어보는 제목입니다.

레삭매냐 2019-09-19 17:01   좋아요 1 | URL
원제는 The Plot Against America
로 2004년에 발표된 대안 역사소설
이라고 하네요.

1940년 나치주의자 찰스 린드버그가
FDR을 꺾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상
황을 그렸다고 하네요.

문둥에서 나올 예정이라는 썰이 도는
데 요원하기만 하네요.

Falstaff 2019-09-20 08:5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재미있겠습니다. 저도 은근히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