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협장원 중국전통희곡총서 1
구산서회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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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가 구산서회九山書會에 소속한 한 재인才人이라고 한다. 여진이란 종족이 동북아시아에 있어 그때 까지 잘 나가던 거란족의 요나라를 한 방에 멸망시키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했다. 세력을 더욱 확장한 금은 남진을 계속해, 후에 위대한 장군이 될 젊은 악비岳飛가 의용군으로 출전하기도 했던 대 송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1126년에 개봉을 점령한다. 개봉은 송의 수도로 이 사건 이전을 북송이라 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명판관 포청천이 바로 북송 시대 사람이다. 이후 심기일전한 (그래봤자 상대적으로 문약했던) 송은 항주로 천도를 하니 이때를 후세 사람들은 남송시대라고 한다. 바로 이 남송 시대에 ‘구산서회’라는 문화단체가 있었단다. 여기에 재주 많은 사람이 한 명 있어 남희南戱라는 일종의 연극에 쓰일 작품을 쓰고 제목을 <장협장원>이라 했단다. 한문漢文,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이라 하여 중국 당대의 대표적 문학 장르를 이야기할 때, 이런 연희의 작품인 ‘곡’은 원대에 와서 발전해 이후 경극 형태로 꽃을 피웠다고 이해하고 있는 바, 이미 송 대에서 원곡의 뿌리는 (당연하게)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을 터이다.
 이 연극, 또는 연희 <장협장원>의 등장인물은 모두 열두 명. 이 열두 역할을 여섯 명이 맡는다. 모든 장면에서 쉬지 않고 등장하는 남녀 귀신 둘과 주인공 장협 역은 한 명이 한 역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는 반면 장면마다 잠깐 들락날락 하는 인물은 한 명의 배우가 둘, 셋, 네 등장인물을 도맡는다. 이는 전에 읽었던 원곡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기억한다. 이런 일인다역은 책 뒤편의 해설에 의하면, 1) 경제적으로 배역을 운용하고, 2) 관객들에게 분장 바꾸기의 현장을 공개함으로써 배우의 물화物化를 통한 상징적이고 회화적 연기로 중국 전통극 미학의 기초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3) 양식화된 단계로 들어서기 전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여기서 2) 와 3)은 시간이 흘러 후대의 연극평론가들이 생각해낸 문화적 해석 아닐까. 역시 주요 목적은 배우를 적게 씀으로 해서 경제적 운용이 가능했으며, 배우들도 이를 통해 자신의 연기력을 과시할 수 있다는 일타쌍피의 효과를 사장과 직원 모두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장협장원>에서는 일인다역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 무대장치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제사를 올리려고 하는데 제사상이 없을 때, 늙은 배우가 젊은 배우에게 엎드리라고 해서 등판 위에다 음식을 차림으로 제사상이 되고, 문짝이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갑자기 문짝(또는 대문)을 만들기 위해 귀신 역할의 두 배우를 똑바로 세워 한 명이 문 한 짝씩을 맡아 기어이 대문을 만들어낸다. 이런 장면은 물론 배우 또는 연출가의 행위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승인함으로써 가능하게 되겠지만 꽤 괜찮은 연출이고, 이런 것이 벌써 12세기 초에 가능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럼 ‘장협장원’이란 무엇일까. 장협張協은 사람 이름이다. 당연히 남자. 사대부 출신으로 저 남쪽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외진 오기산 부근에 있는 오래된 사당(廟) 근처에서 강도 둘을 만나 입고 있던 옷까지 홀랑 뺏기고 추운 겨울날 문짝 떨어진 사당인 고묘 안으로 숨어들며 극을 시작한다. 고묘 안에 들어 있던 두 남녀 정령 판관과 소귀. 판관은 진흙으로 빚은 (포청천일 거 같은) 인물상이고 소귀는 말 그대로 작은 여자 귀신. 이 귀신들은 고묘에 기어들어온 장협과의 관계를 심화시켜 나중엔 장협과 의사소통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예를 들어 장협이 판관과 소녀에게, 지금부터 문 역할 좀 해주시오, 라고 부탁하면 좀 투덜대다가 정말로 둘이 옆으로 서서 문, 한자 모습 그대로의 문門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장협이 거지꼴을 하고 고묘에 들어서고 조금 있으니 여자 주인공 빈녀, 말 그대로 고묘에서 홀로 사는 가난한 여자가 들어오고, 기타 동네 사람 몇 명도 도착해, 빈녀에게 냄새나는 옷도 빌고, 사람들한테 음식도 얻어먹은 끝에 빈녀와 혼인을 해 두 달 동안 부부의 관계로 지낸다. 그러다 시기가 가까이 와 장협은 서울로 가 과거시험에 응시해, 시험장에 앉아 과제가 나오자마자, 일필휘지로 선장하니 자자이 비점이요 구구이 관주라, 그냥 장원을 해버리는 거 아니냐. 송나라에서도 과거에서 장원을 하면 황제의 명에 의하여 구름 같은 말을 타고 도성을 한 바퀴 돌았으며 관직에 들 때까지 장원한 자에게 허락되는 특정한 집에 거처했던 모양이다. 그래 장협이 과거에 장원을 했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장협장원>으로 정한 것.
 근데, 문제는 이제 장원 급제해 앞길이 훤하게 트인 상황인데 집도 절도 없고 가족도 없는 저 산골의 사당에서 혼자 사는 빈녀를 마누라로 발표하기엔 좀 그렇다는 어쩔 수 없는 사실. 그렇다. 중국에서도 있었고 유럽에서도 있었고, 무엇보다 한국에서도 있었다. 여자가 식모살이, 룸살롱 접대부 하면서 애인 공부시켜놨더니 남자가 떡하니 사법시험 통과해 판사가 된 후에 나 몰라라 하는 일. 그동안 애나 하나 만들지 않았으면 불행 중 다행이나 애라도 하나 있는데 또 그 아이가 어떻게나 귀엽게 생겼는지, 만일 이런 거 생기면 말 그대로 영화 제목 하나 나오는 거다.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럼 송나라 판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어떻게 되느냐고? 당연히 안 가르쳐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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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12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룽산으로 돌아간 장다이가 떠오르네요...

Falstaff 2019-08-12 14:1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 책도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