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즈 엔드 1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7
포드 매독스 포드 지음, 김일영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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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권 구입가 93,000원. 합해서 정확하게 1,600쪽의 장편소설. 완독에 걸린 시간은 닷새 반나절. 93,000원이면 내가 즐기는 진로 골드 25% 소주가 70병이다. 두 달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걸 닷새 반 만에 홀랑 없애버려? 그렇게 하시라. 이게 네 권, 총 10부, 1,600쪽을 방금 전에 다 읽은 정직하지만 짧은 감상이다.
 포드 매독스 포드는 문예출판사의 “문예 세계문학선” 시리즈에서 놓치면 아쉬운 작품인 <훌륭한 군인>을 읽고 단박에 매료되었던 작가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신사계급들을 스위스의 한 요양시설에 모아놓고 등장인물 각각이 서로 처한 갈등과 갈증을 매력적으로 묘사해놓은 것에 완전히 넘어가버렸었다.
 <훌륭한 군인>은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5년에 출간해 원 제목이었던 “가장 슬픈 이야기”를 바꾸어야 했던 반면, 9년이 지나 1924년에 집필을 끝낸 <퍼레이즈 엔드>는 크게 나누어 1권에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2권은 처음 참전을 하고 전쟁신경증을 판정받아 영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전장에 복귀할 때까지, 3권은 복귀한 전장부터 1918년 빼빼로 데이인 11월 11일 종전기념일 장면까지, 마지막 4권은 전후 다시 찾은 삶에 관하여 묘사를 하고 있다. 누가 1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전쟁 전후까지를 아우르는 작품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퍼레이즈 엔드>보다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작품 <티보가의 사람들>을 권하겠지만, 이 책도 만만하지 않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고, <티보가....>를 읽은 다음에 기회가 또 있으면 읽어보라고 권하겠다.
 긴 장편소설이니 당연히 스토리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은 영국의 티전스Titjens 가문의 네 번째 아들 크리스토퍼의 삼각관계를 그린 이야기이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전혀 감흥이 오지 않는다. 20세기 초반, 1910년대 크리스는 아직도 17, 18세기 적 의식인 신사도와 명예에 목을 매고 사는 마지막 토리주의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당시 토리주의자를 21세기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진정한 꼰대’ 정도? 또는 ‘진정한 보수’? 당연히 여자가 등장한다. 삼각관계니까. 큰 키에 늘씬한 외모와 천성적으로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경국지색의 미인 실비아. 그러나 전형적인 팜 파탈. 크리스의 법적 아내다. 드디어 막이 오르면 크리스는 잉글랜드라는 섬에, 실비아는 대륙에 있어, 부부 사이엔 북대서양이 가로막는 형상. 영국 육군에 대단한 겁쟁이 장교가 하나 있었으니 이름을 ‘퍼론’이라 하고 계급이 소령이었는데, 생긴 건 뭐 그리 나쁘지 않아 실비아가 퍼론 소령을 옆에 끼고 무도회에서 야반도주(책에선 ‘야간도주’)를 벌였던 것. 이를 안 실비아의 총명한 어머니 세터스웨이트 부인께서는 딸의 불륜 소식이 런던 사교계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양 차 스위스로 떠나며, 조만간에 딸이 합류하여 자신을 간호해 줄 것이란 소문을 퍼뜨린다. 그러나 그런 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된다.
 그러면 실비아는 왜 크리스의 이마에 뿔이 돋게 했을까. 실비아가 아직 결혼 전일 때 드레이크라고 하는 유부남하고 정을 통해왔었다. 20세기 초반에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생기면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임신. 자신이 임신을 한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한 실비아는 자기보다 나이어린 크리스토퍼 티전스를 꼬드겨 결혼을 하고 아홉 달을 채우지 못한 상태에 아들 마크 티전스 2세를 출산한다. 그래 우리의 크리스토퍼 역시 법적으로는 완벽하게 자신의 아들로 호적에 오른 아들이 자신의 소생인지, 아니면 공무원인 자신의 신분기록에 형편없는 평판을 적어놓은 드레이크의 아들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이게 그리 간단하지 않는 이유는, 크리스가 형이 셋 있지만, 첫째 마크는 프랑스 무용수 출신 여성과 아이 없이 동거 중이고 여성은 이미 출산할 수 없는 나이에 처했으며, 둘째와 셋째 형, 그리고 누이동생은 인도와 인도 부근의 바다 위에서 군인과 간호병의 신분으로 전사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등장하는 ‘그로비’ 지역의 저택과 철광산을 포함한 대지의 상속권이 크리스의 아버지 마크에서 자기 큰 형 마크에 이어 자기 아들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은 마크 2세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 이런 과정 속에 실비아와 크리스의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건 세상 사람이면 다 이해할 수 있을 터. 크리스는 천성이 신사라 누구의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못해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이 가운데 미치광이 두쉬민 목사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으나 목사 부인은 크리스의 친구인 맥마스터란 남자와 눈이 맞고 나중에 동거를 거쳐 혼인까지 하게 된다. 실비아는 이 사실을 악의적으로 비틀어 런던 사교계와 상류층에 자신의 남편 크리스가 두쉬민 목사의 불쌍한 아내, 이디스 에텔 두쉬민과 불륜관계라고 거짓 선전을 하고 다닌다. 경국지색의 미모와 세련된 매너, 훌륭한 치장을 한 귀부인의 우아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말을 누가 있어서 부인하고 의심하겠는가. 런던의 거의 모든 사람은 크리스가 정신 빠진 인간이고 실비아가 불쌍한 피해자인 것으로 단정을 한다. 심지어 아버지의 친한 친구의 딸 발렌타인 워놉 양을 구워삶아 출산까지 했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퍼뜨려, 이 소식을 믿은 성인聖人같은 어머니는 심적 타격을 받아 죽어버리고, 역시 거짓말을 사실로 이해하고 있던 큰 아들 마크를 찾아와 사실 여부를 확인한 아버지 역시 심상해 자살을 해버린다. 이 정도면 실비아야말로 서양 문학사에 기록할 만한 팜 파탈 정도 아닌가.
 처음부터 비겁하고 찌질한 퍼론 소령을 사랑해 야반도주한 실비아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 남편 크리스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 애초 목적에 모자람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실비아는 잠깐 동안의 애인 퍼론 소령을 버리고, 어머니가 평생 의지하던 콘셉 신부와 함께 머무는 스위스의 요양소에 가서 콘셉 신부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하지만 실비아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미쳐 쫓아다니게 될 때 실비아의 삶은 지옥으로 변할 거요.”
 원래 소설에서 불길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 실비아는 사실 남편 크리스토퍼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얻는데 실패함에 따라, 사사건건, 가는 곳마다, 심지어 전쟁터까지 쫓아와 남편에게 치명적 불행을 안기려 하는 것. 실비아한테 나가떨어진 크리스토퍼 앞에 등장하는 아가씨, 발렌타인 워놉 양. 실비아의 선언이 진실이라면, 성 마리아 이후 최초로 순결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인. 이이는 전직 최고의 라틴어 전문가였으며 크리스의 아버지와 막역한 관계였던 죽은 부친과, 17세기 이후 가장 훌륭한 소설을 쓴 어머니를 둔 젊고 가난한 아가씨. 크리스토퍼와 발렌타인, 둘의 순결한 사랑은 오랜 군불을 때듯 묵지근하니 달아오르는데, 모든 인간이 자기 같은 줄 아는 실비아는 콘셉 신부의 예언대로 곧바로 지옥에 빠져 점점 더 극악한 고통을 크리스에게 쏟아 부으려하는 점입가경에 이른다.
 꽤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더 이상은 직접 읽어보시라 이쯤에서 말겠다. 1권 1부 정도만 가비얍게 언급했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사실 포드 매독스 포드의 작품을 한 마디로 하면, 유구하고 심심하다. 그러면서도 독자를 깊게 몰두시키는 성격묘사 같은 것이 탁월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 딱 두 편을 읽었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말도 안 되는 거 알지만, 만일 당신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전쟁터나 사건들을 기대한다면 후회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좋은 소설은 근본적으로 심리소설 아닐까 싶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고, 영향을 받으며, 영향을 끼치는지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할 만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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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1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일로 이렇게 자세하게 줄거리를 밝히실까! 하고 생각하면서 줄거리 부분은 띄엄띄엄 읽었는데, 이게 고작 1권 1부 정도까지의 스토리군요! 기대됩니다. 이 작품. 그런데 책값이 만만치 아니하여,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어야겠군요.

Falstaff 2019-06-10 14:00   좋아요 0 | URL
녭. 현명한 선택입니다.
이런 책은 도서관 대출로 아주 적격입니닷!!!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