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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유명한 책이라도 손이 선뜻 가지 않는 작품이 있다. 내겐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도 그 속에 든다. 이 책이 <생의 한가운데>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무척 오래 전이었으며,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목록의 꼭대기에 상당기간 앉아 있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경우를 궁합이라고 하면, <삶의 한가운데>와 나는 궁합이 맞지 않았던 거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선택하지 않게 되더란 것. 근데 왜 갑자기 이 책을 골랐느냐 하면, 소설가라고 한 때 칭했던 신영숙이가 자기가 썼다고 주장한 <엄마를 당부해>란 작품 속에서 이 유명한 작품 <삶의 한가운데>의, 다른 부분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첫 문장을 과감하게 조금 바꿔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 그때부터 호기심이 발동을 했기 때문이다. <삶의 한가운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
이 정도면 ‘인상적인 첫 문장’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임팩트가 있다. 적어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문장 자체가 한 문단 속에 다른 문장들과 섞여 있을 만하지 않고, 오직 문단의 가장 앞부분에만 어울린다(고 나는 주장한다). 영숙이는 이 문장을 절대 복사하지 않았다. 걔도 뇌가 있으니까. <엄마를 당부해> 25쪽의 마지막 줄에 있으며 역시 한 문단을 시작하는 문장으로 이렇게 써놓았다. “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책을 사서 봤느냐고? 천만의 말씀.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 기능이 이럴 때 좋다. 만일 영숙이가 한 문단을 “긴 터널을 지나니 거긴 눈의 나라였다.”라고 시작했다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을 거다. 누구나 다 어느 소설에서 따 왔는지 아니까. 근데 모녀 관계 어쩌고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는 영숙이도 이게 <삶의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문장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영숙이가 습작시대에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밥 먹듯 해온 것이 필사였는데, 필사도 한 두 편이지, 언젠가 부터는 완전필사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좋은 문장이 나오면 아무 생각 없이 공책에 적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이게 사달이 아니었겠나. 공책 한 페이지 넘기면 좋은 문장이 쌔고 쌨는데 그걸 안 써먹어? 한 번 썼는데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다. 그럼 두 번 써먹고, 또 시비가 없으면 다음부터는 상습적 도둑질을 하게 되는 거겠지. 그냥 베낀다는 게 아니라, ‘자매’가 ‘모녀’로 바뀐 것처럼 약간씩의 변형을 거쳐서.
하여간 이런 이유로 <삶의 한가운데>를 읽기 시작했다. 루이제 린저가 1911년생. 책을 발간한 것이 1950년. 린저 본인이 반나치즘 운동으로 1944년에 투옥되어 종전 후 풀려난 전력이 있다. 이런 경험이 소설의 주인공 니나 부슈만에 어느 정도는 그대로 투영된다. 니나 역시 1911년생이며, 1944년부터 종전 때까지 교도소에 수감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소설가로 설정했다. 성격이 아주 독특한데, 예를 들면 열두 살 위의 언니의 “결혼식 때 부모님이 니나에게 마치 시동처럼 내(니나의 언니이자 화자) 면사포를 들고 가도록 시키자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몹시 화가 난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지고는 나의 면사포에 침을 뱉었다.” (7쪽)
니나의 이런 독특한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요새 말로 하면 극도의 까칠함이랄까. 누가 자신을 칭찬해주는 것도 싫고, 말 한마디를 해도 좋은 어투는 초장부터 출장 가버리는 성격.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현실, 즉 현재의 삶에 적극적으로, 온몸으로 부딪혀 상처를 입고, 절망하는 인물이다. 니나의 이런 일련의 행위가 간혹 자신을 위해서, 자주는 타인을 위해서이기는 한데 타인의 눈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게 비치는, 끔찍한 젊음의 고통 속에서 활활 타버리는 여인.
바뎀바일러에 있는 뢰머바트 호텔의 바에서 니나의 언니인 화자 ‘나’가 실로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동생 니나를 우연히 발견한다. 위스키를 거푸 마셔대는 야성적인 여성. 결코 예쁘지는 않지만 매력 있는 모습의 니나. 결혼 후 동생에 관해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외국 생활을 하면서부터 완전히 잊고 있던 니나를 마흔아홉 살이 되어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호텔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독한 니나를 우연히 만나고, 몇 주 후 전화가 와서 자신이 있는 뮌헨에 와달라는 전화를 받아 애꿎은 남편이 피곤해 하건 말건 자동차 운전을 시켜 밤새 달려와서 작품의 첫 문장, ‘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자매들 간의 대화를 시작한다. 니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의사 슈타인 씨가 죽기 전에 니나 앞으로 남겨놓은 일기를 매개로 해서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동생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루이제 린저는 니나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래 맞아, 라고 니나가 말했다. 바로 그거야, 이 이야기는 긴장을 시켜. 왜냐고? 전적으로 스토리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야. 나는 이것을 참을 수 없어. 모두 이렇게 쓰고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는 내 머리에 한 다스나 들어 있어. 그러나 아무런 가치도 없어. 소재는 중요하지 않아.” (149쪽)
린저는 스스로의 작품에서 소설엔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그럼 뭐가 중헌디? 심리상태다. 불안하고, 좌절하고, 곤경에 처하고, 실패하고, 도와주려다 오히려 면박을 당할 때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을 할까. 슈타인 박사가 묘사하는 니나와, 니나가 설명하는 당시 상황의 차이점. 이런 것들이 린저가 천착했던 진짜 모습은 아니었을까, 린저가 진짜로 쓰고 싶었던 작품은 철저한 심리소설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일의 47그룹과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루이제 린저는 결국 책의 마지막까지 스토리를 이어나가고, 결론을 맺고, 심지어 에필로그 비슷한 광경을 그려내기까지 한다.
재미있는 소설책. 등장인물의 대사 부분에 따옴표나 기타 부호들을 붙이지 않아 더 감성에 호소하는 것처럼 읽히는데, 이것도 영숙이 분위기하고 유사....하다. 그러니 세상살이 조심해야 하는 거다. 한 번 수상하게 보니까 이것저것 다 이상한 거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앞으로도 집요하게 글 도둑질에 관해서 물고 늘어질 것이다. 작품의 소비자를 이것보다 더 우롱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의 독후감은 결국 기, 승, 전, 글 도둑질. 이렇게 된 것.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