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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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들어 시도하기 시작한 재독再讀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 첫 번째는 설 전에 독후감 쓴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앞으로 생각을 해두고 있는 것으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 이탈로 스베보의 <제노의 의식>,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등이 있(었)다. 근데 정말로 읽을지, 안 읽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개선문>과 <시스터 캐리>는 읽어본지 하도 오래되어 당시 기억으로 소위 ‘인생책’ 레벨이었는데 영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스터 캐리> 같은 경우는 딱 맞춤하게 인터넷 지인께서 서평을 올려주시어 읽어보니 훤하게 그림이 그려져 일단 제외하려고 한다. <우리 동네 아이들>과 <제노의 의식>은 이번에 읽은 <백년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중역본을 읽어서 이제 직역본이 나와 다시 읽어야 하나 궁리중이며,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책이 어딘가 좀 미흡한 거 같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이번에 <....조르바>와 <백년의 고독>은 먼저 읽어버렸다.
 전에 읽은 <백년의 고독>은 90년대 초반 문학사상사에서 안정효 번역으로 낸 것이다. 지금도 책꽂이 어딘가 꽂혀 있을 텐데 이중으로 쌓아놓은 책 더미를 헤쳐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확인절차는 생략한다. 이번엔 민음사에서 조구호의 번역으로 된 두 권짜리를 선택했다. <백년의 고독> 검색해보시라. 두 권으로 간행한 건 <민음사> 딱 한 경우다. 나도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합해서 본문 600쪽 가량, 해설과 작가 연보로 20쪽 좀 넘으니 합하면 630쪽이면 충분한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696쪽, <에마>는 728쪽. <에덴의 동쪽 2>도 660쪽. 책장 얼핏 둘러보니까 이 정도라, 암만해도 두 권 편집은 아쉽다.
 그런데.
 누가 만일 <백년의 고독>을 읽어보고 싶다고 한다면, 아직까지는 민음사 두 권짜리를 권한다. 지금 책이 내 앞에 있고, 다른 책, 예컨대 내 책장 저 깊숙이 숨어 있는 문학사상사의 안정효 역 <백년 동안의 고독>을 ‘미리보기’ 기능을 써서 비교해보니, 안 된다, 비교가.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그때 담임선생이 잘 내준 숙제가 교과서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공책에 베껴오라는 거였다. 그 지겨운 숙제를 누가 곧이곧대로 하나. 먼저 왼 손바닥을 펴고, 오른 손바닥을 세워 칼날 모습을 만든 다음 손칼로, 빠른 동작으로, 왼 손목 쪽을 한 번 치고 이어서 손가락이 시작하는 부분을 또 한 번 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 정도만 열심히 베끼고, 중간 부분은 그냥 떼어 먹든지 문단을 솎아 띄엄띄엄 쓰자는 신호였다.
 안정효라면 우리나라에서 문장가로이름이 높은 이다. 이번에 마르케스를 다시 읽으면서 새삼스레 느낀 건 이렇다. ① 마르케스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당연히 내가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아몰랑주의’라고 일컫는 환상문학적 상상력이겠지만, 이에 못하지 않는 것으로 마르케스 특유의 문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안정효에 비하면 한참 후배인 조구호는, 나는 당연히 스페인 언어를 전혀 모르는 인간으로 번역의 질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한 또는 번역한 문장으로 미루어 얼마나 원문에 가깝게 실감나는 우리말로 번역을 했느냐를 이야기하는 바, 마르케스만이 낼 수 있는 문장의 감칠맛을 제대로 전달해주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것처럼 보인다. 마르케스 특유의 만연체 문장을 편의대로 자르지 않고 우리말로도 같은 한 문장으로 만드는 것, 그게 그리 쉽지는 않다는 걸 나는 콧대만 높고 우리말 실력은 별 볼일 없는 역자 몇 명을 통해 알고 있다. 특히 허먼 멜빌이나 마르셀 프루스트, 윌리엄 포크너 같이 긴 문장을 어렵게 쓰는 작품의 경우, 뜻을 효과적으로 전하면서도 긴 호흡을 그대로 유지해주는 번역이 나올 때, 역자의 노고에 경탄을 할 수밖에 없다. 읽는 사람도 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② 안정효는 조구호 번역의 묘사와 많이 다른 의미로 해 놓은 것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보자.


 “그가 발굴해 냈던 것이라고는 녹이 잔뜩 슬어 각 부분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 같은 15세기 갑옷뿐이었는데, 그 안에서는 돌이 가득 담긴 거대한 호리병에서 나는 것과 같은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탐험대의 남자 넷이 그 갑옷을 뜯었는데, 그 안에는 여자의 곱슬 머리카락에 매단 구리 로킷을 목에 건, 석회처럼 변한 해골 하나가 들어 있었다.” 조구호 역, 민음사 <백년의 고독 1> 13쪽.


 “그러나 그가 마술 쇠붙이로 찾은 것이라곤 돌멩이로 가득 찬, 15세기에 쓰던 큰 투구뿐이었다. 녹이 잔뜩 슨 그 투구를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조수 네 명이 뜯었더니, 그 속에서는 여자 머리카락이 든 구리 로켓 다 썩어 푸석푸석한 해골만 나왔다.” 안정효 역, 문학사상사 <백 년 동안의 고독> 6쪽


 이와 같은 이유로 문학사상사를 비롯한 많은 출판사에서 간행한 <백년(동안)의 고독>들은 해설을 포함해 500쪽 미만으로 줄여 쓸 수 있었지만, 조구호는 기어이 600쪽을 넘겨버리고 말게 되는 건 아니었을까. 이미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문장가로 높은 성가를 지니고 있는 분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과거 이이는 외국문학을 원서로, 아니면 번역한 영어로 읽지 못하는 우매한 한국 독자를 우습게 알고 있던 거다. 그냥 뜻과 대강의 스토리만 제대로 얘기해주면 끝났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내가 이렇게 침을 튀는 이유를 짧게 이야기하자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서 그렇다. 안정효는 한 시절 <시장과 전장>이란 제목으로 실천문학지에 연재를 했던 <하얀 전쟁>부터 <헐리웃 키드의 생애>를 이어 작품이 나오는 족족 찾아 읽었던 추억이 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그의 문장을 좋아했는데 말이지. 생각할수록 짜증난다. (하긴 자기가 번역한 건 미국말로 된 책이라고 하면 또 그냥 넘어가겠지.) 유명한 소설가들이 번역한 작품 대부분이 영어 작품이 아닌 비 영어권 문학의 중역이란 것도 매우 생각해볼 만하다.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취지, 번역 역시 세대를 달리하면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진리다. 과거의 올바르지 못한 번역으로 나는 그동안 <백년의 고독>을 얼마나 낮게 평가했나. 실제로 그간 누가 마르케스 이야기를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마르케스 하면 쉽게 <백년의 고독>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읽어보니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오히려 더 좋던데.”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던지.​
 이번에 조구호(나는 이 역자와 아무 관계도 없다. 그 흔한 학연, 지연 같은 것도 없고 심지어 돈 천 원이라도 꿔준 적 없다.) 덕분에 <백년의 고독>이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이었고, 마르케스가 이토록 맛있는 문장을, 멋있게 만들어내는 연금술사인지, 이제야, 너무 늦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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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8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원전을 바로 번역한 것과 2차, 3차 텍스트로 옮겨가면서 의역한 것과는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

Falstaff 2019-02-08 16:30   좋아요 1 | URL
아이고 그럼요. 그러니 같은 텍스트를 또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

카알벨루치 2019-02-08 16:45   좋아요 1 | URL
제목부터가 <백년동안의 고독>보다 <백년의 고독>이 더 훅하고 다가옵니다 제목도 어떻게 그렇게 지었나 싶어요 ㅎㅎ

Falstaff 2019-02-08 17:20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제목 짓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작품 속 주인공들은 또 얼마나 오래 사는지, ㅋㅋ, 대단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