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망스 세계문학의 숲 52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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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 52번째 작품.
 이 출판사의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엔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이제 겨우 52권의 책을 냈을 뿐이지만 출간한 권수에 비해 밀도 있는 작품이 몰려 있다. 예를 들어, 출간 역순으로,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잭 케루악의 <다르마 행려>, 허먼 멜빌의 <피에르, 혹은 모호함>,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F 스콧 핏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 일리아 일프와 예프게니 페트로브 공저 <열두 개의 의자>, 안나 제거스의 <제7의 십자가>, 재닛 프레임의 <내 책상 위의 천사>,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에밀 졸라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발레리 라르보의 <페르미나 마르케스>, 콘라드 죄르지의 <방문객>, 등등. 여기다가 다른 출판사와 겹치는 <베를린 알렉산더 공원> 같은 것들까지 합하면 정말 정선한 작품이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멜빌과 핏제럴드의 작품은, 번역과 오역 여부는 모르겠고, 역자가 바꾼 우리말 문장에 문제가 ‘많은 것 같아’ 권하지 못하겠다. 이 두 작가의 책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들이 매혹적이라,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를 주시해왔는데,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2016년에 한 권, 17년에도 한 권, 18년에도 또 단 한 권만 냈을 뿐이다. <아르망스>는 2018년에 찍은 단 한 권의 세계문학의 숲. 그것도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19세기를 프랑스 소설의 세기로 만든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스탕달. 어찌 일독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827년. 190년 전이다. 스탕달은 나폴레옹 군대에 입대해 1814년 키 작은 영웅이 엘베 섬에 유배될 때까지 충직한 지지자로 있다가 유배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살았다. 엘베 섬에서 탈출해 백일천하를 누린 나폴레옹에게 합류하지 않은 서른한 살의 스탕달은 이탈리아의 따뜻한 풍광 속에서 열심히 연애를 하고 실연을 당했다고 책 앞날개에 쓰여 있는데, 자신 스스로가 우울증 증세가 심해 자살시도도 하고 그랬나보다.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저작생활을 하다 마흔네 살이 됐을 때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이 바로 <아르망스>.
 지금부터는 내 짐작이다. 프랑스에서는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다. 저 멀리 십자군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 12세기 당시 왕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한 유서 깊은 귀족들이 진짜 귀족이고, 재주는 파리 시민이 부리고 돈은 코르시카 촌놈이 벌었던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 때 보나파르트가 함부로 던져주던 귀족 작위를 얻은 신흥귀족 사이엔 서로 반목과 멸시가 있었다(고 다른 책에서 읽었다). 나폴레옹 지지자였던 스탕달 입장에선 당연히 오랜 귀족들에 대한 묘한 질시와 경멸과 열등감과 이상하게도 자신의 눈에 두드러져보이던 위선 같은 것이 강조되었을 수 있다. 여기다가 자신이 심각하게 경험한 우울증. 이 둘이 합해져 그의 첫 번째 소설 <아르망스>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잽싸게 망명했다가 1825년 전후로 다시 돌아온 옛 귀족의 우울증이 심한 외동아들을 주인공 ‘옥타브’로 내세웠다. 옥타브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프랑스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가 일찌감치 전사하고 엄마마저 곧바로 숨이 넘어가 먼 친척인 드 보니베 부인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는 아르망스 드 조일로프 양이다.
 재미난 것이, 아주 전형적인 19세기 문학이라는 점인데, 이 전통은 20세기 한국의 대중문화인 만화에서 주요 모티브로 쓰인 적이 있다. ‘이상무’라는 만화가를 기억하시나? 그가 만든 대표적 주인공 독고탁. 천애고아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우연히 그룹 회장급 생부가 나타나 팔자 고치고 잘 산다는 거. 옥타브의 집안인 드 말리베르 가문이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해보니 집안의 재산이 거덜이 난 상태. 거렁뱅이 귀족보다 한심한 것도 드물단다. 그러다가 1826년 왕정복고 후 옛 귀족의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해준다는 법령에 따라 한 방에 수백만 프랑의 재산이 생기는 기적이 벌어지고, 찬밥 신세인 잘생긴 청년 옥타브 역시 한 순간에 사교계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이 청년이 가난한 아가씨 아르망스와 연애를 하는 이야기. 이게 소설의 주요 줄거리가 된다. 소설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의사 불통”으로 인한 오해와 결투와 질투와 명예와, 우여곡절 끝의 결혼과 비극적 결말로 종을 치게 되는데, 읽다보면 답답해 죽는다, 죽어. 작품 속에, 특히 비극에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갈등이 생기는 방식과 그로 인해 두 주인공 사이의 골이 깊어지는 구조가,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어, 그냥 19세기 초반에 나온 소설의 한계려니, 하고 말았다.
 혹시 나처럼 <적과 흑> 그리고 <파르마 수도원>을 머리에 떠올리고 이 책을 읽는 분은 읽는 도중에 남자 주인공 옥타브의 예를 따라 우울증 증세가 도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리라. 분명히 경고했다. 우울증 정도는 가뿐하게 여길 수 있으면 이 책에 도전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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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1-24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답답하셨죠? 왜 말을 안하는 지 원... 현대 드라마에서 남주인공 여주인공들이 꼭 그러더니 스탕달에게서 배웠나봅니다. ㅎㅎ 암튼 아르망스의 그 이유는 참 ㅋㅋㅋ 헛웃음이 ㅋㅋㅋㅋㅋ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원 애두 참...

Falstaff 2019-01-24 12:37   좋아요 1 | URL
제 말이 그겁니다.
마누라가 바가지 긁으면서 가끔 하는 말이, 당신은 내가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하참. 제 대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응. 말 해야 알아. 네가 귀신이랑 사는 줄 아니?
이거 읽으면서 정말 속 터지더군요. 책 읽으면서 잠자냥님 원망해본 게 처음입니다. ㅠㅠ (ㅋㅋㅋ)

레삭매냐 2019-01-24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에
<아르망스>에 대한 언급이 나오던데...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지는 리뷰였습니다.

근디 출판사가 시공사라... ...

잠자냥 2019-01-24 21:28   좋아요 1 | URL
시공사는 작년에 대표가 아예 바뀐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전 씨 일가는 시공사와 아무 상관 없을 거예요.

Falstaff 2019-01-25 10:26   좋아요 1 | URL
전씨 자서전도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습지요.
이래서 인간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좀 적당히 해야 한다니까요.
대대로 죄 받잖아요.

잠자냥 2019-01-25 10:55   좋아요 1 | URL
전 씨 및 이순자 자서전은 그때 ‘자작나무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냈는데, 알고 보니 그 출판사는 시공사 임프린트 출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썩은 자서전은 아들내미가 내준 게 맞지요.

관련 글 http://blog.aladin.co.kr/socker/9259387

그러나 어쨌든 작년에는 대표가 바뀌었고, 새 대표가 인터뷰에서 자신은 전 씨 일가와 아무 상관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으니 좀 믿어볼까 싶습니다.

Falstaff 2019-01-25 12:36   좋아요 1 | URL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은 좋은 작품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 본문에도 썼지만, 멜빌과 핏제럴드는 권하지 않습니다.
번역문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품을 망칠 수 있는지 경험하고 싶으신 분께는 적극 추천!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하는 편집 관련 종사자께도 적극 추천. 일반 독자에겐 비추 itself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