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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
조르지 아마두 지음, 안정효 옮김 / 서커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3년 전의 깊은 가을. 나는 조르지 아마두가 쓴 소설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을 읽고 단박에 브라질이라는 나라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도나 플로르....>를 (비록 걸작의 계관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내 수준에 가장 근접한 나만의 명작으로 임명했으며, 만일 내 눈에 이 절묘한 재미를 제공한 작가의 다른 작품을 발견하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조건 없이 사서 읽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때 이미 아마두의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라는 소설책이 출판사 ‘서커스’를 통해 나왔던 것을 알았으나, 서커스라는 회사는 2007년 1월에 첫 작품을 내고, 2010년 4월에 마지막 작품을 찍었다, 쉬운 얘기로 망했다. 그래 잊고 있다가 몇 달 전에, 맞아, 아마두가 있었지, 라는 생각이 번쩍 떠올라 검색을 해봤고, 시중 헌책방에서 (불과) 몇 권의 책을 내놓고 있어서 날름, 집어 들어 감개무량하게 드디어 첫 장을 넘길 때의 기분이라니.
시리아 이민의 아들임에도 아랍인, 또는 터키인이라 불린 ‘나시브 사아드’라는 이름의 독신남자. 이이는 소도시 ‘일레우스’에서 ‘베수비우스 바’을 운영하고 있는 키 크고 뚱뚱한 남자. 어느 화창한 봄날, 좋은 요리사이자 살림꾼이었던 늙은 필로메나가 이젠 아들하고 함께 살기 위해 아구아 프레타로 떠나겠나고 종종 얘기했지만, 이걸 늙은이의 푸념으로만 여겨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로 보따리를 싸 여덟 시 기차를 타기 위해 떠난다고 최종 통보를 하자마자 나시브는 놀라 자빠졌다. 그러나 필로메나가 진짜 떠남으로 해서 세상에서 가장 천진하고 아름답고, 몸 이곳저곳(어딘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음)에서 정향 향기가 나고, 계피 색의 피부를 갖고 있는 무구한 사랑의 여신이자 요리사이자 하녀인 가브리엘라와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가 시작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같은 날 늙은 제수이노 멘돈사 대령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 혼자만 자기 이마빡에 뿔이 돋았는지 몰랐던 것을 드디어 알아채고는, 벌건 대낮에 열쇠로 조심스레 소리 나지 않게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오직 두 다리에 검정 스타킹만 신고 있던 약간 퉁퉁한 아내 도나 시나지냐 궤데스 멘돈사와, 우아하고 아름답게 생겼지만 대령의 침상 위에서 대령이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벌거벗은 의사 오스문도 피멘텔 앞에서, 처용가를 부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는커녕,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을 꺼내 각자에게 각각 두 발씩의 총알을 박아버리고 만다. (솔직히 말하자면 총알이 검정 스타킹만 신고 나머지는 벌거벗은 여자와, 아무것도 입지 않고 그냥 벌거벗은 남자의 몸통에 박혀 있는 상태인지 관통해서 벽이나 침대를 때렸는지는 책에 안 나온다.)
사통 중에 난데없이 날아든 총알을 받아 거의 동시에 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일레우스 사람들은 항구 초입에서 모래톱에 좌초한 별로 크지도 않은 코스테이라 회사의 여객선과, 모래톱 자체를 없애버려 일레우스에서 유럽으로 직접 코코아를 수출하는 길을 뚫자고 주장하고 있는 젊은 총각, 리우 출신 거물 정치인 집안의 셋째 아들이자 백만장자인 문디뉴 팔상에 대하여, 그리고 이웃도시 이타부나 사이에 처음으로 개통한 버스 노선과 이 버스 회사의 공동 주인인 두 명의 러시아인이 내일 오후에 열기로 한 성대한 버스 노선 개통 축하식에 대해 침을 튀고 있다가, 네 발의 총성과 함께 모든 논의가 갑자기 뚝, 그쳐버린다. 그리고는 그들의 대화는 한 순간에 검정 스타킹만 신고 있는 약간 살찐 여인의 모습과, 자신들의 아내 또는 애인에게도 검정 스타킹만 입히면 어떤 광경이 연출될까, 혹시 그 소도구가 각자의 엑스터시를 더 향상시키는데 공헌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느라고 멈춰버렸고, 아내와 아내의 애인을 권총으로 간단히 쏴 죽여버린 대령의 명예스러운 행동이 당연하다고, 앞으로 재판을 받겠지만 배심원의 만장일치 결정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때는 1925년. 장소는 바다를 면한 브라질의 시골 소도시. 이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땅과 농장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힘깨나 쓰는 것들이 무리를 지어 서슴없이 총질을 해대 토지를 무단히 탈취해 지역의 토호가 되면서 스스로를 ‘대령大領colonel’이라 칭하던 농장주이자 실력자이자 깡패두목들이 통치하던 지역. 이제 늙은 부르주아 계급으로 그중에 왕초 격을 했던 이는 상원의원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스스로 생각하고, 비슷한 대령들 역시 그렇게 받들어 모시면서, 각자 대령의 자식들을 대처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 지역에서 의사, 변호사, 공증인 기타 등등 ‘박사’로 불리게 하고, 시장, 국회의원 등의 높은 자리를 꿰고 있는 상태. 여전히 포르투갈 혹은 스페인 이베리아 방식의 도덕률에 충실해, 남자는 얼마든지 바람을 피워도 여자가 딴 놈팡이를 봤다하면 부정한 쌍이 흘린 피를 통해 자신의 추락한 명예를 회복하는 지난 시절의 율법이 서슬 퍼런 곳.
여기에 진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문디뉴 팔상. 이 젊은이가 촌 동네 일레우스에서 펼치는 새 세대로의 전환노력. 그건 앞 세대의 타파를 전제로 해야 하건만, 80대의 왕초 대령인 라미로 바스토스 상원의원을 꺾어야 가능한 것. 바스토스 대령에게는 일레우스 전 지역에 걸쳐 거의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있는 동료 대령들이 있으며, 20여 년 전 도덕률에 의하여 바스토스 대령의 뜻이 옳은지 아닌지 전혀 관계없이 의리 하나로 그를 굳게 지지하고 있고, 배신자에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이 기다리고 있는 땅이다.
이곳에 머리도 못 감아 떡이 지고, 누더기가 찢어져 허벅지가 다 드러난 때(垢: 피부 위에 죽은 피부의 각질이 먼지를 비롯한 각종 오물과 함께 쌓여있는 상태) 투성이 촌년 하나가 내륙에서 도시를 향해 무조건 걸어온 몇 명의 인간들과 함께 예전 노예시장이 섰던 인력시장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것이다. 늙은 요리사 필로메나를 잃은 아랍인 하시드가 새 요리사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해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을 고르려 했지만 먹고 살 것이 없는 깡촌에서 무작정 도시로 온 것들이 요리는 무슨 요리, 그냥 돌아서려 할 때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한 마디. “정말 아름다운 남자야!”
이 말에 귀가 솔깃한 하시드는 때가 덕지덕지하고 머리카락도 떡이 진 처녀를 고용하기로 결심해 데려오는데 아이고, 얼마나 쉰내가 나는지 목욕부터 시키고 외출해버린다. 밤이 깊어 귀가한 하시드. 입이 떡 벌어진다.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보퉁이에 들고 온 누더기지만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가브리엘라. 그녀에겐 계피 색 나는 반짝이는 피부와 정향 향기가 은은한 몸을 가지고 있던 것이라. 이것만 해도 미혼남자 하시드는 넋이 나가는데, 아이고, 천부적인 감각으로, 무엇을 기가 막히게 하느냐면, 침대 위의 일도 그렇거니와 그것보다, 진짜 지역요리, 이 책에선 ‘바이야 요리’라고 하는 전통요리를 죽여주게 잘 하는 거디었던 거디었다.
물론 지금 그냥 등장인물을 소개하기만 하고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 것인지는 전혀 귀띔도 하지 않았다. 정말 재미있는 책이라서 직접 읽어보시란 의미라는 건 다 아시리라 믿으면서.
아쉽고 아쉽다. 우리나라에서 번역해 시중에 나온 조르지 아마두는 이제 다 읽었다는 것. <도나 플로라와 그녀의 두 남편>과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 위키피디아를 보니 스물여덟 작품이 있는데 말이다.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출판사 가운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번역해줄 착한 회사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