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센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0
서머셋 모옴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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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왜 ‘어센덴’이라고 했을까? 원제는 Ashenden. 우리말로 쓰면 ‘어셴딘’ 정도로 읽힐 거 같은데. 뭐 소설가이자 중앙대 문창과 교수를 역임한 역자 신상웅 선생이 영문학 학사를 하셨으니. 근데 어째 좀. 179쪽에 독일 여자가 영국인 주인공 어센덴에게 이런 대사가 하는 게 나온다.


 “그런데 당신네 영국인도 음악을 아나요? 페어셀 이후 작곡가다운 작곡가는 한 사람도 없잖아요!”


 작품의 무대가 되는 시기가 1차 세계대전 중(1914~1918년)이다. 브리튼이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이니 독일인이 영국 사람한테 이렇게 비아냥거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페어셀’이라니? 헨리 퍼셀Henry Purcell이겠지. 이건 흔한 농담이거든. 영국엔 퍼셀 말고는 음악가가 없다든지 뭐라든지. (뭐 다울랜드Dowland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는 거지.) ‘페어셀’이 처음 든 의문이었다.
 처음이니까, 뭐 타이포typo 비슷한 걸로 생각했다. 근데 나중에 주인공 어센덴이 러시아 유부녀 아나스타샤 알렉산드로브나와의 연애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여자가 이혼하기 전에 만일 둘이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를 시험하기 위해 1주일 간 파리에서 짧은 동거를 실험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너는 씬이 몇 차례 나오는데, 출발지-도착지를 도버-카레, 카레-파리, 파리에서 한 판 잘 때려 놀다가 다시 파리-카레, 카레-도버라고 쓰는 거다. 프랑스 칼레는 로댕의 조각으로 유명한 바로 그 칼레, Calais다. 이 1주일의 여행을 통해 어센덴이 아나스타샤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건, 사실은 “그녀가 아니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스트라빈스키, 바크스트 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별한다. 그건 그거고, 굳이 Calais를 ‘카레’라고 하며, 바크스트는 누군지도 모르겠다. 구글에도 ‘바크스트’가 검색이 안 된다. 그러나 눈 밝은 이가 러시아 화가 레옹 박스트Leon Bakst를 일컫는 것이라고 밝혀냈다. 어쨌거나 제발 아니기를 비는 바이지만, 내가 아는 모든 세상의 언어 사용자 가운데 Calais를 ‘칼레’라고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본인밖에 없는 거. '선거'election을 '발기'erection과 동일하게 발음하는 사람들. 신상웅 선생이 1938년 일본 출생으로 Calais를 ‘칼레’가 아니라 ‘카레’로 발음할 수밖에 없는 일본어에 너무 능통해서 영어로 된 원서는 참고도 안 하고 그냥 일본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 헌책도 아니고 정가에서 10% 빠진 새 책을 산 이유가 서머싯 모옴이 쓴 ‘미스테리’ 책이란 것 때문이었다. 그래 기대한대로 책은 재미있었다. 어찌됐건 재미만 있으면 뭘 더 바라면 할 말 없지만 어떤 책을 번역했다는 말도 없이 오직 판권은 동서문화사(동판)에 있다고만 쓰여 있는 건 21세기엔 좀 그렇다. 동판. 고 김주혁 나오는 영화 <공조>에서 김주혁이 팔아먹으려고 막 총 쏘고, 사람 죽이고 그러는 게 다 백 달러짜리 위조지폐 ‘동판’ 때문 아냐? 동서문화사(동판)도 바로 이 ‘동판’을 의미한다.
 어쨌건 책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 맞지? 아니. 이제는 21세기. 우리는 해당 번역서가 어느 책을 원전으로 했는지 알아야 하며 원전을 출판한 회사에 합당한 로열티를 지불한 책을 원할 때가 됐다. 물론 동서문화사는 내가 알기로 지적재산권에 대한 법적 책임이 없다. 법이 발효되기 전에 번역한 책들이라서.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동서문화사가 잘못했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 회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안 줘도 되는 돈을 왜 주느냔 말이지. 다만 이 책도 초판이 1977년. 이젠 (보다)정당하게, 그리고 새롭게 번역한 책을 읽을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다. 초판 나오고 40년이 넘었으면 이런 주장도 당연한 거 아냐?


 서머싯 모옴의 특이 이력 가운데 하나가 마지막 낭만적 전쟁이자 최초의 대량 학살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 당시 스파이로 일했던 것. 당시의 경험은 소설가로서 그냥 묵혀둘 수가 없는 '경험자산'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이젠 1차 세계대전의 스파이 경험담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고 즐길 과거사가 될 수 있을 때가 오자 드디어 숨겼던 경험을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작가가 다른 이도 아니고 윌리엄 서머싯 모옴. 아주 색다른 스파이 소설을 만들었다. 긴박한 사건과 폭력, 아슬아슬한 시한폭탄 같은 거, 거의 또는 별로 없다. 스파이 소설에서도 모옴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집중된다.
 모두 열여섯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 또는 두 장이 한 묶음으로 한 부분이 되는 일종의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은 작가 어센덴이 첩보대장 R대령에게 스카웃되어 취리히를 베이스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누비면서 첩보활동을 하며 활동의 대상으로 만나는 열여섯 명을 관찰한 기록이다. 열여섯 명이 다 공작의 대상이 아니라, 심지어 첩보대장, 회유해서 이중 스파이로 만들어야 하는 적 쪽의 스파이, 특정 국가에서 만난 영국과 미국의 대사, 재판은 하지 않았지만 총살형이 확정된 매국노,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 계약서 도장 받으러 아시아 횡단 열차를 탄 미국 회사 직원, 살인청부업자 등등 천태만상이다.
 재미있다. 그러나 모옴의 다른 작품들 중에 워낙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아 이미 그런 것들을 읽어보신 분에게 책을 읽어보라 권한다면 잘못하면 귀싸대기나 한 방 얻어터지기 십상.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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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0-18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책인데...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해서 나오면 좋겠네요. 하하하하.

Falstaff 2018-10-18 10:14   좋아요 0 | URL
저도 새로 나올 책의 잠자냥님 평을 기다리겠습니다!
모옴이면 진짜 새로 번역할 만한데 아직 나오지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