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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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세가 서른일곱 살 때 출간한 단편집. 책은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그리고 <종말> 이렇게 세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작품은 당연히 서로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이어져 있어 연작의 형식을 띄기도 한다.
 <초봄>은 방랑자 크눌프의 전성시기에 무두장이 친구 집을 방문해 세련된 모습과 태도로 여성들의 찬미를 받는 모습을 그렸고,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은 길지 않게 살다 간 크눌프와 젊은 시절의 한 때, 한 여름동안 방랑을 함께 했던 화자가 주로 대화를 중심으로 크눌프의 예민한 감수성을 회상하는 일인칭 소설이고, <회상>은 마흔 줄에 들어선 크눌프가 폐에 깊은 병이 들어 마지막으로 고향인 소도시 게르버자우에 도착해 지난 추억과 장소를 완상하며 스스로 소비한 인생을 정리하는 모습을 담았다.
 각 작품이 단편소설이라 독후감에서 작품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다.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총명하고 조숙한 소년이었던 크눌프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빨리 여자의 몸에 대해 눈을 뜨고 세 살 위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면서 라틴어 학교를 그만두고 (대학진학 대신)전문직업인meister 밖에 될 수 없는 독일어학교로 전학한다. 그러나 손위의 아가씨는 벌써 다른 애인이 생겨버리고. 당연히 크눌프도 크눌프답게 새로 두 번의 연애를 경험하고는 생이 다할 때까지 이어질 방랑의 길을 떠난다.
 방랑길에, <초봄>처럼 갓 결혼해 아직 아이도 없는 무두장이 친구네 집에 들러 며칠 신세지는 동안 평생 노동을 해보지 않아 얇고 기다란 손가락을 가진 섬세한 청년의 모습으로 조금도 바라지 않았던 친구의 아내로부터 추파를 받기도 하고, 옆집 하녀 아가씨와 춤추러 가기도 한다.
 방랑을 하면 길 위에서 숱한 사람을 만나기도 할 것. 어느 여름에 한 사내를 만나 함께 길을 걷다가 교회 담을 넘어 공동묘지의 반듯한 묘석과 꽃들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고, 석양이 지는 묘지들 옆에서 기분이 고조되어 이런 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으리라.


 난 어려서 죽었으니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줘요, 그대 아가씨들,
 작별의 노래를 말이에요.
 내가 다시 돌아온다면,
 내가 다시 돌아온다면,
 난 멋진 젊은이일 거예요.


 또 지난 시절 사랑했던 두 여인에 관해서도, 이젠 다시 뵐 수 없는 죽은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으리라. 그리던 어느 날 새벽 곤히 자는 동무를 놔두고 혼자 안개 깊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미 죽음의 그늘이 덮칠 무렵 우연히 라틴어학교에서 문법을 가르쳐주곤 했던 친구가 의사가 되어 늙은 말을 타고 가는 걸 보고도 총명했던 어린 시절의 크눌프, 그러나 이젠 허름한 방랑자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모른 척했을 수도 있고, 우연히 그를 알아본 의사의 배려로 도시에 있는 빈민구제병원에 입원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미 자기 몸의 절망적 상태를 알고 있는 그는 입원을 포기하고 기꺼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길을 나설 수도 있고, 솜같이 푹신한 눈이 함빡 내리는 따뜻한 날, 어느덧 하늘에서 내려와 자기 옆에 선 하느님과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자기의 덧없는 방랑의 일생 역시 누군가가 했어야 하는 가치 있는 삶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그의 연표를 보니 27세에 <페터 카멘찐트>를, 29세에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다. 85세까지 장수한 헤르만 헤세는 젊었을 때부터 애늙은이였다.

 

 역시 헤세는 한 살이라도 젊어서 읽어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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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0-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하고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요, 헤세는 딱 10대 때 읽어야 하는 것 같다고. ㅎㅎ 10대 때는 그렇게 좋았던 <지와 사랑>을 서른 넘어서 다시 읽었더니 아주 별로더라고요. 하하하. 마지막 문장에 정말 공감합니다.

Falstaff 2018-10-17 09:4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저도 10대 때 헤세의 장편소설을 두 작품 빼고 다 읽었는데 하나같이 얼마나 가슴이 알알한지 몰랐습지요.
몇 년 전에 <유리알 유희>를 읽고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만 그건 그냥 남겨두려합니다. 그냥 마음 속에서 알알했던 헤세로 있는 것이 좋을 듯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