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김성곤 해설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먹먹하다.
 메릴린 로빈슨. 몇 권 쓰지도 않은 작가가 어떻게 책마다 사람의 심금을 이리 저며 놓는지.
 한 여인이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한없이 쏟아지는 비를 철철 맞으며 사랑을 호소하는 452통의 편지와 귀한 금속으로 만든 반지 하나를 하수구에 한 장, 한 장 쏟아버렸다. 9년에 걸친 약혼기간 동안 이 여인 글로리는 어느 새 서른여덟 살이 되었고, 중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번 돈 모두를 약혼자의 사업자금으로 탕진해버린 데다, 처음부터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기미를 챘으나 구태여 확인하지 않은 바와 같이, 약혼자는 유부남인 것이 드러나 버렸다. 학교를 사직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여덟 남매의 막내 글로리는 어느 날 아이오와 주의 아주 작고 완고한 소읍 길리아드에 있는 옛집, 커다랗고 낡았지만 깊은 병에 든 늙은 아버지를 돌본다는 구실로 피난처를 찾듯 돌아왔다. 길리아드. 로빈슨이 쓴 두 번째 작품 <길리아드>와 같은 소읍이며 성경에 나오는 ‘치유의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단다.
 얼마 후, 여덟 가운데 다섯째인 잭이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어려서부터 동네 제일가는 악동으로 사소한 도둑질과 사고치기를 밥 먹듯 해온 유명한 문제아였다가, 한 소녀를 임신시켜 딸을 낳게 하고도 그냥 떠나버린 탕아.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 잘하는 동생 테디가 대리시험을 치루면서까지 졸업을 시키려했으나 결국 낙제 끝에 졸업하지 못하고 알코올중독에 빠져 헤매다 무슨 이유인지 전과자가 되어 버린다. 출소 후 한 여인을 만나 그 여인에게 무수한 죄를 지으면서도 그래도 최근 10년 동안은 평온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이력을 모두 알아낸 애인의 목사 아버지와 친척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아, 동생이 와 있는지도 모르고 역시 고단한 몸의 잠시나마 뉘려 고향집에 들은 것.
 메릴린 로빈슨의 세 작품 모두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과 같다. 가족. 또는 옛집. 참 모질게도 끊어지지 못하고 좋으나 싫으나, 미우나 고우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긋지긋한 끈. 가족과 형제. 로빈슨은 거의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있는 치명적 약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연대로서의 가족들 사이에 늘 누추하고, 시큰거리고, 떠올리기만 해도 어딘가가 저릿하며, 가슴 속을 텅 비우는 후회와 슬픔을, 새파랗게 날 선 칼날로 썩 베어버리고 만다. 잘 드는 칼날이 피부를 슬쩍 스쳐지나갈 때의 서늘함. 육체적 고통을 느끼기 바로 전까지의 돌이킬 수 없는 살갗의 감촉.
 난 이런 책, 좋아하지 않는다. 경건하고 늘 자상하면서도 엄숙했던 아버지. 이제 늙어 땅거미 지는 황혼을 맞아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거동도 못하는 약한 노인. 아직도 자식들에게 성경과 장로교적 태도를 권하지만 이젠 예전 옷들을 입어볼 수도 없이 쪼그라들고 약한 아버지. 삶에 지쳐 갈 곳 없어 돌아오긴 했으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나 삶의 실패의 무게에 눌린 남매. 아버지는 죽음을 향한 막바지 길로 접어들고, 돌아온 탕아는 다시 집을 떠나는 것을 예고하며, 결국 막내딸이 크고 낡은 집에 홀로 남게 되는 이야기. 살면서 부모에게 잘한 거 없었고, 형제간에 애틋하지도 않았던 나는 이런 종류의 책만 읽으면 오히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더 알러지 증상이 도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메릴린 로빈슨. 아, 난 이 미세스 로빈슨이 쓴 작품들에겐 두 손 들었다. 어떻게 글을 이렇게 쓰는지. 이게 문학의 힘이고 소설의 힘인가? 시멘트로 발라놨던 내 눈물샘조차 뚫어버리는 약하고, 가늘고, 조심스럽고, 점잖고, 겸손한, 나도 모르는 힘. 아, 모르겠다. 로빈슨 여사. 노래나 하나 들어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8-09-13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세스 로빈슨>은 정말 오래 전에
영화 <졸업>에서 로빈슨이 부인이 어린
더스틴 호프만을 꾈 적에 나오던 그 노
래가 아니었던가요.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데 결국 다 보지
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메릴린 로빈슨의 책은 <하우스키핑>
읽다만 게 전부네요...

Falstaff 2018-09-13 12:33   좋아요 0 | URL
옙. 새파랗게 젊은 더스틴 호프만이 등장해서 결혼식날 신부 캐서린 로스를 훔쳐 달아나는 영화요. 당시만 해도 굉장히 선정적인 영화였답니다.
<하우스 키핑> 마저 다 읽으시지.... 그거 은근히 재미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