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안뜰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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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편의 중, 단편이 실린 선집. 표제작 <저주받은 안뜰>이 책 본문의 절반을 넘게 차지한다. 표제작을 비롯한 모두 다섯 편이 수도원의 사제 ‘페타르 수사修士’가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직접 이야기하거나, 수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풀어낸 것들이다.
 한겨울. 세상이 함빡 내린 눈에 싸여 흰 빛을 발할 때, 어제 죽은 페타르 수사를 묻고 이제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살아생전 수사가, 수사의 젊은 시절 이스탄불 출장길에 애꿎은 혐의를 쓰고 구치소에 두어 달 간 구금되었던 당시의 강렬했던 추억/기억을 두서없이 얘기한 것들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쓴 것이 표제작 <저주받은 안뜰>이다. 이스탄불 교외 한갓진 곳에 자리 잡은 ‘데포시토(창고)’란 이름의 구치소엔 검은 악마라는 뜻의 별명 “카라조즈”로 잘 알려진 머리 좋은 악당이 소장으로 있었다. 구치소를 자꾸 증축을 하면서 이상하고도 커다랗게 변형된 교도소는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안뜰 역시 지극히 비정상적인 운동장으로 변했는데, 운동장을 포함한 데포시토 전부를 구치당한 죄인들은 “저주받은 안뜰”이라고 불렀다 한다. 페타르 수사의 경우, 이 저주받은 안뜰에 겨우 두세 달 있으면서 경험한 바를 평생에 걸쳐 후배 수사들에게 조금씩 살을 붙여 이야기를 했겠지만 사실 수사의 구금기간 동안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터키의 수용시설답게 각종 범죄자들과, 적지 않은 수의 정치범이 늘 수용되어 있으며, 잡범들은 은근히 정치범과 선을 긋는 것도, 정치범 가운데 적어도 두어 달에 한 명 정도는 골로 보내는 것도, 당시가 양차대전이 다 끝난 상태임에도 터키를 떠올리면 그리 이상하지 않다. 1481년 정복자로 이름을 날리던 메메드 2세가 아무 준비도 없이 전쟁터에서 갑자기 사망을 하자 노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바예지드와 귀족 출신의 다른 여인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젬은 왕권을 놓고 경쟁을 하게 된다. 다툼에서 패한 동생 젬은 이집트를 거쳐 프랑스로, 다시 이탈리아로 전전하면서 결국 1499년 유골이 되어 터키로 돌아오는데, 역사를 공부하면서 평생 형에 대한 반란을 골몰하던 한 불우한 파샤의 아들이 젬에 대하여 연구했다는 죄목으로 저주받은 안뜰에서 행방불명 됐다는 걸 중점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건 터키에서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거 같다.
 하지만 이 중편소설 <저주받은 안뜰>을 누가 썼는가. 바로 이보 안드리치다. 일찍이 <드리나 강의 다리>와 <제파 강의 다리>를 통해 필력을 과시한 작가. 이이의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안드리치의 문장 속으로 흠뻑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 사색적이면서도 하고 있는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그림 그리듯 떠올려지는 듯한 아름다운 글. 이 작품에서도 문장 하나하나가 개인과 개인, 특정인과 과거의 역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후반에 무려 50쪽에 달하는 해설과 작가 연표를 포함한다. 이 정도면 해설이라기보다 작은 논문 수준이다. 좀 과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이 책을 안드리치의 문장을 즐기면서 읽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 내가 참 좋아해온 출판사 을유문화사에서 찍은 책이니 읽는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을 숨길 필요 없으리. 하지만 그게 아니다. 을유문화사가 그 사이에 좀 바뀐 거 같다. 한 시절, 오탈자 없는 책을 자랑하던 회사가 아니다. 여러 말 말고 예를 들어보자.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는 마치 단 한 번도 어느 누구를 믿어 보지 않은 것처럼 범죄자나 증인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믿지 않은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그에게 범인의 자백은 유일한 것이었고 모든 인간이 유죄로 재판받아야 할 존재인 이 세상에서 그럭저럭 공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소나마 신뢰성 있고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자백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저주받은 안뜰” 34쪽)


 위는 새로운 문단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이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수바람. 무슨 뜻인지는 앞 문단과 연결해서 읽어야 알 수 있다. 물론 원문과 가장 가깝게 번역하기 위해 이렇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 비록 원문에는 없었을지라도, 앞 문단과 이 문단을 연결시켜주는 접속사나 짧은 구句를 포함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머리 안 좋은 내 경우를 말씀드리면, 도무지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열댓 번을 읽었다. 그래도 도통 깜깜이라 페이지를 통째로 다시 읽으니 그때야 감이 왔다.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주어와 술어를 찾는 것. 주어와 술어만 써보면 문장은 이렇다.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자백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장이 “∼ 때문이었다.”로 끝나기 때문에, “때문이었다.”로 끝나게 하는 원인이 한 문장에 나와 주어야 한다. 아니면 바로 앞 문장이든지. 근데 이게 문단의 첫 문장이란 말이지. 이 문장에서 가장 근접한 “때문에”의 원인은 제일 앞에 나오는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이지만 그건 쉼표 앞에서 독립적으로 씌어있어서 문장을 이해하는 걸 아주 효과적으로 방해한다. 먼저 나오는 “때문에”는  “그에게 범인의 자백은 유일한 것이었고”로 이미 설명이 된 사안. 그러면 뒤에 나오는 새로운 “때문이었다.”의 또 다른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저주받은 안뜰의 소장 검은 악마가 어떻게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고, 자백이 아무리 사소해도 잊는 법 없이 자백한 자를 재량껏 도와주거나 형을 경감해주는 이유, 즉 수용소장 카라조즈의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다. 문제의 구절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쉼표 앞에서 이미 종결사항처럼 쓰여 있다는 점.
 책 읽으며 문장 하나 가지고 이리 해골 복잡하게 만드는 거, 정말 싫다.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언젠가 성자(聖者)의 얼굴을 한 여행객이 올루야크 사람들에 대해 평한 말은 이랬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이 성자의 얼굴을 한 사람의 말이 단 한 번도 거슬리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올류야크 마을” 161쪽)


 문단의 마지막도 대단히 까다로운 문장이다.

 문장을 이렇게 바꿔보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는 말이 단 한 번도 거슬리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술어 쪽만 보자.

 1. 말이 ~ 거슬린 일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지 않은" 일

 2. 거슬리지 않은 일

  "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

 3. 거슬리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이 일어났다.

 4. 거슬리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즉, 이 문장을 알아듣기 쉽게 다시 써보면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는 말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즉 올류야크 마을 사람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은 절대 생기지 않을, 다시 말하면 가난하지만 불행하지도 않을 거란 얘기. 작가가 주장하는 바와 정확하게 반대 방향이다.
 맞는가? 나도 모르겠다. 이번엔 술어의 문제. 문장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꼭 이 지랄을 해야겠어? 책을 이런 식으로 뜯어서 읽는 나도 알고 보면 참 불쌍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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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08-03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길에 저도 옮겨주신 문장 3번쯤 읽었네요 ^^; 원문이 저렇게까지 난해할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의 문제일까요.

Falstaff 2018-08-03 09:07   좋아요 1 | URL
글쎄요.
번역한 사람은 틀림없이 ˝원문을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다보니, 운운˝ 할 겁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명도 아닌걸요. 다만 을유문화사가 이번에 펴내는 세계문학전집의 ˝한글 텍스트˝ 품질이 몇십 년 전 것보다 못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정말 좋아했던 출판산데 아쉽습니다. 시리즈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책에서 마땅하지 못한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더군요.
최근에 읽은 DH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도 그렇고 불레스와프 프루스의 <인형>도 좋은 문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지요.
날 더운데 에휴, 고생하십시요. ^^;

레삭매냐 2018-08-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보 안드리치 책들은 몇 권 컬렉션해두긴
했는데 당최 손이 가질 않는군요.

그런데 역자가 번역을 하시면서 문장을 좀
끊어서 번역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문장이 너무 길어서 정말 헷갈리네요.

그나저나 <드리나 강>부터 읽어야겠다는.


Falstaff 2018-08-03 10:26   좋아요 0 | URL
<드리나 강의 다리>는 정말 좋아요!
제가 2016년이던가에 읽었는데, 그 해에 가장 좋게 읽은 책으로 <드리나 강의 다리>를 꼽았던 적이 있습니다.
우습게도 <저주받은 안뜰>과 같은 역자군요. ㅋㅋㅋㅋ
날 더운데 살살 읽으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