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나나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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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의주의자의

잊히지 않는 어떤 소설에 관한 상념

부제 : 작정하고 만들어 보는 장광썰


어떤 소설은 읽고 나서도 한동안 또는 꽤나 오랫동안 읽은이의 내부에

침잠해 있다가 한번씩, 이를테면 언제 불어올지 알 수 없는 바람처럼

일어나 읽은이를 소설 속의 거리, 소설 속의 사람들에게 데려간다.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이유가 없다. 소설의 어떤 부분이 자신과 맞닿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아 마음속의 얼룩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다시 한번 그 작품을 꺼내 그들의 안부를 묻고 싶거나 그곳의 거리, 거리

가운데 있었던 골목은 잘 있나 돌아보고 싶은 것이다.


새벽의 나나를 다시 꺼내든 것도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과

그곳은 잘 있나 비록 어떤 등장인물은 부재하지만 그 부재를 확인하고

긴 골목길을 돌아 나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소설 새벽의 나나는 태국의 나나역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매춘의 거리

소이 식스틴이라는 공간에 관한 소설이랄수도 있으며 최종 목적지를

아프리카로 정하고 여행길에 올랐지만 태국에 머물고 있는 레오가 만난

플로이와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설일 수도, 그 모두에 관한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을 덮고 나면 그 모두에 관한 것은 희미하게 사라진다. 사라지면서

남기는 얼룩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것을 선명한 무늬처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하려고 이러고 있냐

할 것이다. 소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대신 유난히 옮겨적은 문장이

많았던 소설이기에 그 문장들을 읽고 그 문장들에 대한 답장같은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이번 영상은 보여주기 위해 만든다기 보다 그냥 말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몇 년에 한번 들춰볼까말까 하는 책인데도 먼지를

듬뿍 뒤집어 쓰고 있는데도 버리지 못하고 살아남은 책 몇 권은 다들

가지고 있지 않나. 그런 경우라고 해두자.


태국이든 어디든 동남아라곤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딱 한 번,

곳을 가본다면 태국으로 날아가 나나역에 내려 서보고 싶지만 막상

티켓을 끊으라면 거기가 아닌 그 반대편 어딘가로 가버릴 것 같다.

그래야만 소설 새벽의 나나가 증발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레오는 15년 전의 그 거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가게

만드는 어떤 영향력이랄까 이렇게 대본을 쓰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시간 순서에 따라 나열하자면

1부가 가장 뒤쪽에 위치 한다.


지금쯤 성질 급한 누군가는 대강의 줄거리를 찾아보고 있을 것인데,

주인공 레오와 플로이를 비롯 그곳을 스쳐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있고

매춘과 매춘부에 관한 소설이네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겉껍질일 뿐이다. 나나역이 가까운 태국 수쿰빗 소이 식스틴이라는

거리의 짧은 일대기라고 해두자. 그리고 작가의 말처럼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해두자.


지금 다시 읽는다고 같은 문장을 불러낼까 싶지만 그때로 돌아가 다시

한번 문장들에 심었던 감상들을 만나본다.


그리고 남들은 재미없겠지만 이 소설에는 두 번 반복되는 문장이 두 개

있는데 만약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 두 문장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일 수도 있겠다. 정 못찾겠다면 살짝 알려줄 수도 있다.

내가 찾은 건 두 개지만 또 모르지 않겠는가 더 있을지도.



어디론가 가는 건 그곳에 꼭 가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_14

 

여기 지금이 너무나 싫어서 여기만 아니면 지옥이라도 낫겠다는

심정이 들어 떠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은 있었을 것 같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 순간이 그런 사람도 있을 것 같고 전혀 그런

심정을 이해못할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떠나 도착한 곳이 여기와 똑같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지옥이라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여기와 판박이처럼 똑같더라도

당신은 여기를 벗어나는 떠남을 선택할건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을 것인데, 떠난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곳에 간다는데 있지 않고 여기를 벗어난다는 그

움직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매번 똑같은 곳에

당도한다는 걸 알더라도 나는 매번 떠나겠다. 똑같은 곳이라고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같은 곳에 간다해도 일단 한 걸음 한 걸음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싶으니까. 시시포스 신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일테니까.



우연과 운명은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지만, 레오가

소이 식스틴에서 욘을 만난 건 우연이자 동시에 운명이었다. 45

 

의미만 놓고 보자면 두 단어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만 그

등이 서로 맞붙어버려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샴쌍둥이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우연과 운명 뒤에 곧잘 오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만남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운명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라고. 다만 만났을 뿐인 것이라고.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건 

운명인가 우연인가? 둘 다 아니다 그냥 우주가 그런 것이다. 그냥 

만나는 것이고 그냥 스쳐가고 헤어지는 것일 뿐이다.



믿었다 후회하느니 의심했다 사과하자. 64

 

믿고 싶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종교적 믿음과 같은 절대적 믿음이나 사적인 믿음이나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인간만이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후회를 마음 한 곳에 티끌만큼이라도

두지 않고 쓸어낼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일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나 자신조차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 자신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어떤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거야. 가난하다는 것과 여자라는 건 저주야.

플로이처럼 가난하게 태어난 여자는 이중의 저주를 뒤집어

쓰고 사는 거지. /.../

너와 나는 남자야. 그 저주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거지.

그러니까 이해한다고 말하지 마. 131


여기에서의 키워드는 가난과 여자 또는 남자가 아니라 이해라는

키워드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해라는 낱말은 국어사전

에서 사라져야할 만큼 써서는 안될말이라고 생각한다. 정 써야

한다면 부정적 의미일 때만 쓸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다른 관계에선 몰라도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나는 너를 이해

한다는 말만큼 새빨간 거짓말도 없다. 인간은 절대로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다는 것은 온전히 타자의 입장이 된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특히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해의 벽은 높고 단단하다. 이해라는

말을 쉽게 쓰는 사람일수록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 또 놀러 와. 그건 이별에 붙어 다니는 공연한 소리였다.

의사소통의 7퍼센트만이 언어로 이루어진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또 놀러 와라고 말한 건 7퍼센트뿐이었다. 나머지 93퍼센트는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159


흔히 립 서비스라고들 한다. 상대방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의 입장이 뻘쯤할까봐 가림막처럼 둘러대는 말. 안해도 되는데

하자니 하나마나한 말.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것이 립 서비스란

걸 안다. 흘려 듣지만 때론 흘려지지 않고 걸러져 찌꺼기처럼

찜찜하기도 한 말. 그런 빈 말을 남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말하지 않음으로 받는 오해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곧 죽어도 빈 말은 안하겠다는 사람의 진심은 쉽게 발견 되지

않고 곧잘 오해되기 쉽다. 곧 들어도 뻔한 빈 말을 남발하는

사람에게 나 역시 건성으로 대한다. 물론 나 역시 밥 한번 먹자

같은 빈 말을 얼마나 남발했던가 하면 할 말은 없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광은 삶에 너무 깊이 끼어들지 않기로,

개연성 없는 농담처럼 유쾌하기로, 후에 돌아갈 남루한 진짜

생활을 위 하여 사진첩의 얇은 낭만에 머물러주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다. 173 353


여행 중의 이동하는 길 위에서 차창에 머리를 기대거나 시선을

기댈 때 바라보는 창밖의 풍광에 넋이 빠져 멍할 때가 있다. 마냥

이대로 길 위에서 흘러 가기만 했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고 길

위의 여행자가 되었으면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풍광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면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대부분의 유혹은

미약해서 우리들 대부분은 무사 귀가를 안도하며 기쁜 마음으로

돌아온다. 떠나고 싶었던 만큼 여기로 돌아오고도 싶은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는 귀소의 본능이 낯선 풍경들을 뿌리치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내린 뿌리가 병들었거나 뿌리 내려야 할 땅이

너무 척박할 땐 쉼없이 떠나는 것을 상상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

지금이 아닌 언젠가에 마음이 빼앗겨 그는 여기에 머물고 있지만

부적응자가 된다.



그 자신이 무겁게 가라앉은 연기의 일부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일부로, 한없이 가벼운 대기의 일부로 변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느낌, 그저 세상에 가득한 먼지의 일부로 날아

다니는 느낌,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느낌, 아무래도 좋은 느낌,

우주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붙들어 어디론가 데려가는 느낌,

그곳에서도 역시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래도 좋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318


반복되는 듯한 일상에서 나는 나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역할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 그런 반면 여행자가 되는 순간부터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여행객이 되면 나는 일상의 내가 아니어도 된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여행지에서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거나 옷차림이 과감해지는건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이런

일탈은 시한부 일탈이다. 길어야 몇 박 며칠 아니면 몇 달 그도

아니면 몇 년. 인생은 여행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인생을 여행

처럼 사는 사람은 흔한 말처럼 흔치만은 않다.

일상을 벗어던지고 이상으로 가는 길 위에 맨발을 얹는 사람만이

진정한 일탈의 여행자라 불릴 수 있다. 몸이 일상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날 때 마음도 풀려나기 쉽다. 물론 일상 속에서 마음의

자유에 도달하는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의 경지다.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것과 같은 경지. 감히 말하지만 나를

포함 대부분은 못한다. 그래서 몸을 먼저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나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몸따라 살게 되어 있다.비록 일상에 함몰 되어

나락으로 침몰하는 와중에도 우리 중의 누군가는 쉼없이 이상을

꿈꿀수 있다 =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그것밖에 없다.

 


조금씩 침몰해가는 느낌이었다. 엔진이 멈추었고, 선미는 물에

잠긴 지 오래다. 구하러 오지 않아도 돼. 죽도록 내버려두어도

좋아. 한 가지만, 내가 그곳에 가려고 했다는 것만 기억해줘. 308

 

기억해 주지 않았으면. 아무도 나를 기억해 주지 않기를 바란다.

바라지 않아도 오래지 않아 아무도 기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딱히 기억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들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우리 가운데 과연 오래 기억될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기억에 남는 일은 과연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일일까.

그렇다고 잊어달라고 하는 것도 기억해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므로

떠날 때는 말없이 라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말없이 가야 한다.

 


사랑이 식을까 봐 걱정하는 건 행복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사랑을 얻고 있기 때문이고, 아직 사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이 식을까 봐 걱정하는 건 사랑의 여러 단계 중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 모른다. 309

 

달구어진 건 식는게 세상 순리다. 또 식어야만 한다. 안 식으면

증발해 버릴테니까. 그런데 자신이 끓고 있어서 뜨거운 상태에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끓어넘쳐 불이 꺼져야 식는다.

물론 말은 쉽다. 나 역시 하루에도 열두 번 천불이 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



언어라는 건 몹시 불완전한 체계여서, 아무리 명징한 단어가

있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아름다운 긴 털의 눈부신

새하얀 따위의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아야 한다. 심지어 그런

식으로 사전에 존재하는 모든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쳐도,

지향하는 대상 자체에는 끝내 도달할 수 없다. 조금 더

가까워질 뿐이다.337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日語說

역시 타당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건

여러 민족들의 언어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언어의 장단점을 통합해 완벽한 언어를 만든다해도 생각이나

마음이라는 추상적이고 무형의 것을 딱딱하고 한정된 언어로

형상화 한다는 것은 허공을 잘라내 육면체를 만들어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끝없이 갈구한다.

특히나 타인으로 부터의 말을 고파한다.

그 말이란 것은 쥐에겐 독인데 쥐약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혼은, 인간은 그 자체로서 각각 하나의 우주다. 같은 태양계라

해서 화성이 지구를 이해할 수는 없다.392

 

중고서점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한때 지구인들은

화성인이라는 외계인을 문어와 비슷한 모습으로 상상했을만큼

다른 별의 생명체에 대해 이질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렇듯이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별에서 왔다고 할만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한 말인데 이건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에 관한 문제다.

남자와 여자 사이만 이해가 안되고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우리는 누군가를 해석하려 들고 있을 뿐이다. 외국어 한 문장을

해석해도 제각각이고 심지어 모국어로 대화를 해도 말이

안통한다고 하는데 해석이 낳는 숱한 오류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적당히 속이고 속고 있을 뿐이다.

 


수년 전 지인의 권유에 의해 박형서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 새벽의

나나였다. 잘 썼네 하며 읽고 덮어두었다가 몇 권의 책을 내다 팔 때 함께

딸려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없어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어떤 책은 빌려

읽고 소장해야겠다 싶어 굳이 읽은 책을 다시 구입하기도 하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오며 이 책을 다시 사서 가지고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다시 펼쳐볼리는 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어쩌면 수중에 없고 멀리 떨어져야 그리움이 더해지는 것처럼 이 책은 부재해야

더 오래 기억할 그런 책이어야 할 것 같아 끝내 재구매는 하지 않겠지 싶다.


더 많은 문장들이 있겠지만 몇몇 문장들을 불러와 그것과는 상관없는 동문서답식의 

말을 해봤다. 어떤 말들이든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소설들이 있는데 그런 소설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 같다. 새벽의 나나는 오히려 내가 자꾸만 말을 걸고 싶어진다.

거긴 어떠냐고 여전히 여전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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