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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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했을까?

 

 

아무리 곱씹어 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범죄다.

강간하고 죽이는 일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도 대답도 못할 일이다.

 

비슷한 시간에 뉴욕에 도착한 두 여자 앨리스와 루비.

한 사람은 시체가 되었고, 한 사람은 죽은 그녀를 발견했다.

이야기는 죽은 앨리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자신이 고향을 떠나 뉴욕에 오게 되고 루비를 통해서 발견되는 과정을 죽은 자의 목소리로 듣게 되는 이야기.

<네 이름은 어디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평번한 하루에서 온전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

 

피해자임에도 들어야 했던 악담.

이름 없이 리버사이드 제인으로 불려야 했던 앨리스.

그녀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싶었던 루비.

한 사람의 열정은 한 사람의 이름 없는 죽음에 온전한 이름을 부여해 준다.

 

눈물을 흘리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몸부림쳐도 남자들은 야만적인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의 행위를 멈추게 할 수 없었지. 그는 끝까지 욕망을 채우려고 내 몸 위에서 꿈틀거렸고, 뼈가 부서지고 피가 너무 많이 쏟아져 숨이 그 자리에서 끊어질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았어. 그는 마치 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나를 가차 없이 말살했지.

 

 

범죄소설이고 추리소설이지만 기존의 틀을 벗어난 이야기다.

피해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죽음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까지 내레이터 형식으로 이어나가는 이야기는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다.

침묵하고 외면받았던 여성들의 조용한 움직임이 이야기에 담겼다.

잊히고, 지워졌던 여성들의 침착한 분노가 담겼다.

 

사진작가를 꿈꿨던 한 소녀에게 일어난 일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을까?

나는 그와 비슷한 죽음들에 대한 기사를 거의 매일 본다.

어쩜 기사화조차 되지 못한 이야기들도 수없이 많겠지.

어쩌다 여자들은 밤길을 무서워하고, 혼자 돌아다는 걸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세상의 절반은 여자인데...

내가 살아 있었더라면, 누군가가 그날 아침 나를 죽일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뉴욕에 있는 동안 내내 서로를 찾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결국 만나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어쩌면 우리는 모두 스쳐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스침에 앨리스가 있고, 루비가 있고, 이름 모를 제인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웃이 되거나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온전히 집에 돌아올 수 있다면...

 

죽은 자의 말은 산자의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있다.

 

새로운 형식의 추리소설이 필요한 분들.

<러블리 본즈>와 <한순간에>를 재밌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네 이름은 어디에>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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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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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해리를 헐뜯을 수 있고 실제로 그러는 사람이 많은 건 알지만, 누구도 그가 진정한 경찰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가 받은 몇 안 되는 축복이자 제일 큰 저주였다.

 

 

해리 홀레 12번째 이야기 <칼>.

읽는 내내 뾰족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이 온몸을 돌아다녔다. 낭자한 피 웅덩이와 함께...

 

전편 <목마름>에서 해리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마치 그 뒤에 올 죽음의 폭풍을 예고하듯이. 그래서 <목마름>을 읽으면서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 불운을 탑재한 형사에게 '행복'은 절대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다음 편을 목마르게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미 최악의 불행이 예상됐기에...

 

언제나 이야기는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다. 요 네스뵈의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독자들을 단련시킬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작가다.

여기저기에 뱉어 놓은 말들이 하나로 합쳐질 때.

그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놓쳐버린 말들이 어느 순간 중요한 대목이 될 때.

앞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 말들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해리의 단 하나의 사랑 라켈.

그녀가 죽었다.

피범벅이 된 채로 깨어난 해리는 기억이 없다.

사라진 기억 사이에 라켈의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스베인 핀네가 돌아왔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해리를 찾아서.

고통보다 더한 슬픔 사이에서 해리는 범인을 찾아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한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뭘 보고 싶었던 걸까? 뭘 볼까 봐 두려운 걸까? 뭘 보기를 바라는 걸까?

 

이제까지 나는 이야기 속에서 범인을 만났고, 그의 심리 상태를 알았고, 그의 복수심을 알았고, 그와 해리와의 관계를 알았다.

그래서 타당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범죄들과 해리의 행동이.

<칼>에서는 그 모든 것들을 알 수 없었다.

철저하게 범인을 배제시킨 이야기 앞에서 그저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사람은 늘 가장 빠르고 확실한 사실 앞에서 언제나 머뭇거린다.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잊히거나, 묻히거나, 포기하거나, 없었던 일이 되기를 바란다.

가장 중요한 진실과 진심 어린 사과는 안중에도 없다. 뼈아픈 실수였더라도 그저 묻히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돌이킬 수 없을 때...

 

막을 수 있었던 일이었을까?

누군가 진실했다면?

누군가 진심으로 사과했다면?

누군가 자신의 속내를 먼저 터뜨렸다면?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이 알게 되겠지.

앞으로 우리는 이유를 알게 되겠지.

기운을 내요, 형제여, 햇빛 속에 살아요.

머지않아 우리는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해리는 이 노래를 수없이 들었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는 의미의 노래만은 아니었다. 기만적인 자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반면에 그자들에게 속은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에 시달리는지에 관한 노래였다.

 

진실 앞에서 해리는 눈을 돌렸고

진실 앞에서 라켈은 해리와 거리를 두었고

진실 앞에서 한 사람은 침묵했고

진실 앞에서 한 사람은 매일 고통에 시달렸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눈에 기만적인 자들의 모습은 배신이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그의 본성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것은 매일 그 고통의 실체를 눈으로 봐야 했기 때문이다...

 

"서부 출신 검은 머리 여자와 토텐 출신 빨간 머리 남자 사이에서 금발의 바이킹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니."

미소 지으며 아이 머리를 쓰다듬고 아이가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나직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제야 전율이 일었다. 그 눈빛이 죽음 저편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누군가와 닮아서.

 

시리즈 중간중간 뿌려 놓은 떡밥들이 이렇게 회수될지 몰랐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옳은 말이다.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의 기만과 배신이다.

증거가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모른 척했다.

누군가는 입을 열고 사실을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책임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았을 뿐이었다.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희생되고, 기만적인 사람들은 살았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닐 테지만...

 

해리 홀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늘 그 이야기가 시리즈의 백미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백미는 <칼>이다.

<칼>은 해리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알려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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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 호텔 스토리콜렉터 101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김미정 옮김 / 북로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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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불타오르는 별은 없다.' 알카이티스의 침대 옆 벽에 새겨져 있는 글귀다.

그가 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이는 위치에 쓰여 있다.

 

 

사실을 바탕을 쓴 소설은 매우 현실적이거나 아주 공상적이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장편 소설 <글래스 호텔>은 후자를 택했다.

폰지 사기를 다루면서 그것에 초점을 두지 않았고,

돈 얘기를 하면서 그것에 무심한 척 하는 사람들을 얘기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조너선 역시 누군가에게 기대는 삶을 살았기에 결국은 닻을 놓치고 말았다.

수전이라는 닻이 끊어지고 그는 그녀와 함께 일구었던 것들로부터 자신을 조금씩 놓았던 게 아닐까?

감당하지 못할 것을 감당하려고 허우적대다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빈센트는 독립적인 삶을 끝내고 기대는 삶을 택했다가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빈센트 인생에서 가장 호화롭고 찬란했던 시절은 배에서 내린 3개월의 휴가였을 것이다.

9개월을 배 안에 갇혀 주방장으로 살다가 3개월은 훨훨 날아 올라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담고 싶은 것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살았던 몇 년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폰지 사기.

사기를 친 사람과, 사기에 동조한 사람, 사기인 줄 알고 있었지만 침묵했던 사람.

사기를 당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넣은 사람.

그들의 주변에서 그들을 알았던 사람들을 다룬 이야기 <글래스 호텔>

 

"이 세상이 너무 버거울 때 렌즈가 너와 세상 사이에서 방패가 되어줄 거라는 거야. 도저히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아도 뷰파인더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건 할 수가 있더라."

 

 

모두가 뷰파인더로 세상을 보았다.

현실을 직시했던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다들 뜬구름을 잡으려 했고, 달콤한 말에 속아넘어갔다.

자신의 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글래스 호텔>.






남에게 기대고 사는 삶이 더 편했기에, 그래서 기대고 살게 된 것이다.

 

 

공생이 아니라 기생을 선택한 사람들의 최후를 그렸다.

언제나 뜬구름 잡는 사람들은 꼼꼼하지 못하다.

자신의 전 재산을 맡기는 일조차도.

 

우리는 선을 넘었다. 그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선이 무엇이었는지는 훗날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각자 다른 선을 넘었거나, 시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선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도 선을 넘을 때가 분명 있다.

그게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라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체 휩쓸리듯이 그렇게 선을 넘어 버린 후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못 본체한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닥쳐오면 그때서야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누구 탓을 한다.

실상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따져보지 않은 내 탓.

 

엘라 카스퍼스키.

이 캐릭터만 살아있어 보였다.

거짓을 알아챘으니까.

그 외 모두는 모두의 꿈속에서 기생했다.

조금씩 자신의 꿈들을 나누면서, 그것이 곧 깨버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 이야기는 식상하지 않아서 좋았다.

식상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처음부터 선을 넘은 이야기였다.

같은 소재로 이야기를 쓴다 해도 이런 느낌은 나오지 않을 거 같다.

 

모든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말하는 바가 그것인 거 같다.

 

그럴듯한 것에 속지말자.

항상 거짓은 그럴듯한 모습에 가려져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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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르테미시아 -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
메리 D. 개러드 지음, 박찬원 옮김 / 아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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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르테미시아> 이 제목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묘비명이기도 하다.

이름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화가 아르테미시아.

미술 관련 책들을 읽다가 알게 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이 책에서 만났다.

그가 살았던 시간대의 시대적 상황과 같이 활동했던 작가들과 아르테미시아가 남성들이 우세했던 세상에서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후원을 받기 위해 한 노력들이 담겨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 밑에서 도제로 그림을 배웠다.

아마도 아버지가 화가였다는 사실 하나만이 그녀가 가졌던 최고의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십 대 때 강간을 당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아버지가 출입을 허가해 준 사람이었다.

타시는 젠틸레스키가 아르테미시아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강간을 당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명예를 위해 딸의 사건을 재판으로 끌고 간 아버지에 의해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모든 것이 부당하게 까발려지게 되었다.

어쩜 그 모든 사건들이 그녀의 그림에 강렬하게 스며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여성화가의 그림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강인한 여성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지만 그래서 여성화가의 그림이라고 연결 짓지 못했던 거 같다.

그림 보는 눈이 없던 나에게도 아르테미시아의 그림들은 정말 생동감이 넘치는 강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왕관을 쓴 이 유디트는 마리 데 메디치뿐 아니라 이름이 같은 카리아의 아르테미시아 여왕도 암시한다. 따라서 이 유디트는 고대와 당대의 영웅적인 여성 지도자에게 존경을 바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는 아르테미시아를 대표하는 그림이 되었다.

처음 이 그림을 보았던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현장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는 분노를 아우르는 비장미가 있었다.

유디트가 목을 자르려는 순간 남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하녀의 모습은 나에게 남성의 세계 자체를 절단 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림 속에서 아르테미시아는 남자들의 세상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것으로 단죄한 것처럼 보였다.

 

 

21세기에 와서야 페미니즘의 선봉자가 된 아르테미시아.

자신의 지참금을 직접 관리하고 빚까지도 자신이 감당했다.

남편이 있었지만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고, 예술적 능력과 더불어 사업적 재능도 있었다.

그 시대에도 당차게 자신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 당참이 그림에도 표현되어 있다. 그녀가 그린 그림 속 여성들은 모두 '힘'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헤쳐나갈 지혜와 용기가 있는 모습이 그림에 스며있다.

그래서인지 다부진 여성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나에게도 에너지가 채워지는 기분이다.

 

미술사학자로 르네상스.바로크 미술의 연구자이자 오랫동안 아르테미시아를 연구해 온 메리 D. 개러드에 의해 아르테미시아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젠틸레스키라는 이름만 여러번 듣고, 스치듯 그림 한 점씩만 보았던 내게 이 책은 아르테미시아를 좀 더 잘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이 책에는 아르테미시아의 그림 30점과 그녀와 함께 활동했거나 비교가 되는 화가의 작품 70점이 실려있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어떤 화가가 그리냐에 따라 그 느낌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시대의 남성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여성을 그렸다.

아르테미시아는 있는 그대로의 여성을 그렸다.

우리는 상상과 현실 중 어떤 것을 보아야 할까?

 

나는 현실을 보고자 한다.

여기, 아르테미스.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당장이 아니라 먼 미래에 자신이 인정받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찾아 갈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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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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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치러야 할 값이 있는 거죠. 저애가 머지않아 그걸 깨달았으면 싶네요."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일은 흥미롭다.

알고 있는 배경들을 다르게 말할 줄 아는 작가를 만나는 순간은 짜릿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을 알려주는 작가를 만났을 때는 책을 읽는 보람을 느끼게도 한다.

존재하지만 잘 몰랐던 세상과 역사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압둘라자크 구르나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열강의 위세 아래서 힘겨운 삶을 살아내야 했던 대다수의 사람들.

세상이 어찌 돌아갈지 모르지만 그 불운한 느낌을 직감으로 감지했던 사람들.

적들이 자신들의 삶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있음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빨려 들어갔던 사람들.

그들의 낙원이 그들의 손에 닿지 않도록 높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걸 빤히 바라보았던 사람들.

그러나 현실을 탓하면서도 현실에 안주해야만 했던 사람들.

 

어린 유수프의 삶은 자신에게 동전을 주는 아지즈 아저씨에 대한 그릇된 호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대상인인 그가 어째서 자신의 집에서 밥을 먹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주는 동전만큼 유수프에게 아지즈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열강들이 식민지를 어떻게 만들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모습이다.

 

아지즈 아저씨를 따라가게 된 유수프.

그곳에서 만난 칼릴을 통해 자신이 아버지의 빚에 팔려온 거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볼모로 그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즉 아버지가 진 빚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가 아지즈 아저씨에게 저당잡혀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빚 대신 거상에게 맡겨진 유수프.

잘생긴 유수프가 열일곱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낙원.

낙원은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행복 같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음속에서만 항상 닿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아프리카인만 살았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낙원'의 아랍 사람들은 꽤 인상적이었다.

말만 들었던 카라반들의 모습도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여성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태도, 느닷없이 나타나 아무나 잡아가는 현실도 백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관점이라서 색다른 기분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인이 쓴 한국 사람의 이야기만 읽다가 한국인이 직접 쓴 한국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이럴까.

이런 섬세하고 절제된 표현들이 가지는 압축된 힘이 있는 글을 처음 만나는 작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니..

나의 세계가 좀 더 넓어진 기분이 든다.

 

변화해가는 세상 앞에서 이제는 청년이 된 유수프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나는 이런 여행들에 지쳐가고 있다. 네가 나를 위해 그걸 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조심해라, 너희 둘 다. 칼릴! 너도. 북쪽 국경에서 독일인과 영국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얘기가 있다. 언제라도 독일인들이 자기 군대를 위해 짐꾼으로 쓰려고 사람들을 납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라."

 

유수프는 돌아갈 곳이 없다.

아지즈 아저씨는 유수프를 좋아한다.

그리고 세상은 이제 전쟁에 돌입할지도 모른다.

하나의 시대가 가고 있는 즈음 청년이 된 유수프의 앞길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유수프의 뒷이야기를 자꾸 추측해 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유수프에게 빠져가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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