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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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미치광이 짓을 한 거야. 어느 누구도 아이들을 납치해 사랑해달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어.

사람은 누군가를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는 거야.

 

 

영국 북부의 항구 도시 스카보로.

3년 전 아버지가 살해되고, 그 후 집을 세 놨지만 세입자들은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졌다.

케이트는 휴가를 내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을 치우고, 수리를 해서 팔아버릴 계획으로.

 

케이트는 전작 [속삭임]에서 나왔던 케이트 린빌이다.

런던 경찰국 소속인 그녀는 인근 숙박업소를 빌려 고향집이 수리될 때까지 머물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민박집 부부의 딸 아멜리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이진다. 그리고 그날 공교롭게도 실종되었던 다른 여자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한나 캐스웰, 사스키아 모리스, 아멜리 골즈비는 비슷한 나이에 납치됐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직감력이 뛰어난 케이트는 일련의 납치 사건을 한 명의 범인 소행으로 보지만 스카보로 경찰 반장 케일럽은 생각이 다르다.

과연 이 아이들은 각각 다른 사람에게 납치된 걸까? 아니면 한 사람에게 납치된 걸까?

 

사춘기 호르몬이 들끓는 시절의 10대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를 탁구공 같다.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을 우선에 두기 쉬운 아이들에게 주변 어른들의 모습은 본받고 싶지 않은 삶이다.

설사 그것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 부모라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중간중간 범인의 독백이 나온다.

링크 여사의 오래된 수법이다.

범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뿐 독자에게 단서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범인의 독백은 긴장감만 고조시킬 뿐이다.

 

고원지대 살인마라는 별명이 붙은 범인은 단서 하나 없고, 실종 일주일 만에 아멜리는 극적으로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아멜리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는 영웅으로 거듭나고 그걸 미끼로 진드기처럼 아멜리의 부모에게 들러붙어 버린다.

케일럽은 아멜리의 목숨을 구해준 알렉스를 의심하고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의 알리바이는 확고하고 아멜리는 납치되었던 상황에 대한 기억을 잃었는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엄마와 문제가 있던 맨디는 엄마가 화가 나서 끓는 물을 팔에 부어버리자 집을 뛰쳐나와 방황한다.

그리고 타서는 안되는 차에 올라타고 만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링크 여사의 솜씨는 치밀하게 발전했다.

서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모양새를 엮어 가는 솜씨가 탁월하다.

이 작품에서 링크는 십 대 여자아이의 반항심을 그려냈다.

누가 아이들을 순진하다고 했던가!

 

무모하다는 말에 딱 어울리는 아이들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다.

어른들은 몰라주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어른이라고, 다 컸다고, 세상을 안다고 생각한다.

품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겁을 먹고, 발버둥을 치지만 결코 소용없는 짓이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눈동자. 케이트는 이전에도 감정이 부재한 범죄자를 체포한 적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공감능력이 부재해 타인과의 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존재. 그는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무감했다.

 

 

갇혀 있어야 할 사람들이 사회에 나오게 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채울 수 없는 갈증과 같다.

사랑을 강요하는 사람은 남의 사랑도 아무렇지 않게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더 이상 자신에게 기회가 없다고 생각되면 가장 쉬운 방법은 잊는 것이다.

오직 자신에게 돌봐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에게만 신경 쓰면 될 일이니까.

그렇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아이들은 굶어 죽었다.

외딴곳에 갇혀서 살기 위해 변기 속 물과 자신의 오줌까지 마셔가며 버티다 결국 맞이 한 건 죽음이었다.

 

근무지가 달라 사건에 개입할 수 없었던 케이트는 프리랜서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사건을 혼자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발품은 자그마한 단서로 연결되고 케이트는 범인에서 성큼 다가간다.

이 부분에서 케이트가 너무 어이없이 당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긴. 모든 주인공이 완벽하게 똑똑할 순 없지!

 

정작 범인은 활개치고 다니게 놔두고 나처럼 힘없는 사람만 줄기차게 따라다녔으니 실패할 수 밖에요. 반장님은 완벽하게 범인을 헛짚었어요. 만약 내가 당신이라면 당장 술을 한잔 따라 마실 거예요. 당신은 술을 마셔야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수사력을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가 술에서 모두 나온다고요.

 

 

케일럽은 알코올 문제가 있고, 케이트는 매사 자신감 부족이다.

게다가 연애 전선에도 빨간 불이 켜진 이 두 사람.

서로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 두 사람이 스카보로에 둥지를 틀고 서로를 아끼며 사건을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이 수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링크 여사의 큰 그림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두 사람의 캐미가 다음 편에서는 더 진하게 발휘되기를 기대해본다.

 

꽤 두께를 자랑하는 책이지만 읽기 시작하면 시간 순삭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은근한 스릴을 즐기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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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 7년간 100여 명의 치매 환자를 떠나보내며 생의 끝에서 배운 것들
고재욱 지음, 박정은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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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의 밤은 낮과 다르다. 낮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혼란스러운 시간이라면, 밤은 뒤죽박죽이 된 어지러운 기억을 달래는 위로의 시간이다.

 

 

저자 고재욱은 강원도 한 요양원에서 치매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기억을 잃은 분들과의 기억을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박정은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이 곳곳에 사진처럼 담긴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부처님께 108배를 무사히 마친 할머니의 얼굴이 한결 평온해졌다. 노신부님의 말처럼 '그거면 됐다' 싶다. 할머니께서 뭘 비셨는지 짐작은 가지만 나 역시 말하지 않겠다. 부정 타면 안 되니까.

 

 

 

기억을 잃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르신들과 겪는 하루는 조용한 듯 보여도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와 같다.

홀연 사라져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되시기도 하고, 늘 같은 이야기를 매일 새롭게 하시는 분들도 있다.

자기 자식들은 못 알아봐도 과거의 기억은 또렷하기만 하다.

 

따스한 온기가 베어 있는 글이 읽을수록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므로.

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요양원이라는 말의 의미도 치매라는 병명도 늙는다는 것도 알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 감정들을 이 책을 읽는 동안 느껴봤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삶이 어떤 건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어머님이 계셨던 요양원 병동엔 치매에 걸린 어르신이 계셨다.

매일 새롭게 그곳에 있는 동안 계속 나를 알려드려야 했다.

그래도 아들과 딸들은 알아보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분 생각이 났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매번 "넌 누구냐?" 하시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죽음에 대해 겉모습만 알고 있던 사람과 죽음의 과정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의 마지막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전자가 자기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두려움에 떨었다면,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때가 되자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고 삶이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노인이라고 해서 죽음에 초연해지지 않는다.

나는 몇 번의 죽음 앞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죽음은 이제부터 내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끝없는 숙제라는걸.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나 자신도 그렇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야기엔 많은 분들의 추억이 담겼다.

그분들은 기억하지 못해도 글쓴이는 기억하는 추억들.

웃음 짓다가 뭉클하고, 간혹 숭고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전쟁세대의 기억은 많이 아프다.

치매는 현재의 기억은 지우고 과거는 또렷이 되살려 놓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달력이 6월에 멈춰진 분도 계신다. 

 

 

 

 

 

 

전쟁을 끝없이 소환하는 할아버지의 치매는 악몽 같은 기억을 끝없이 반복하게 하는 도돌이표였다.

짐승도 아는 도리를 인간은 알지 못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역사의 기록 같았다.

 

 

상대방의 의견은 묻지 않고 으레 그러려니 판단하는 독단적인 이해가 이들에게만은 유독 당연시된다. 기억을 잃었다고 감정까지 잃은 것이 아닌데,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하고 싶은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데.

 

 

일선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분의 글을 통해 내가 가진 편견을 벗겨낸다.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을 대충 대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다.

내가 그 자리에 선다면 나는 어떤 대우를 받고 싶을까?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집을 부리고, 같은 말을 계속하고, 별안간 화를 내는 그 모든 것에 한 인간의 자존감이 담겨 있는 거라면?

 

미래를 여행하고 온 기분이다.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 순간이 올 때 내 곁에도 이런 분이 계셔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음식을 먹여주고, 몸을 씻겨주고, 자리를 봐주는 일도 중요하고 고마운 일이지만 마음을 읽어주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면

자신을 잃어가는 분들에게 더 많은 의지가 되지 않을까...

끝으로 어느 할머니의 말씀을 잘 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30년도 금방이야. 허투루 살지 말어. 그래야 잘 죽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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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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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과거의 메어리이자 반복이다. 슬픔도 없다. 순전히 죽음을 앞둔 아주 작고 마른 고양이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 외로움, 배신감 속에서 몇 날 며칠 눈물을 흘리던 오래전 기억과는 조금 다른 경험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도리스 레싱의 고양이에 대하여는 1967년, 1989년, 2000년에 발표한 에세이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19호실로 가다로 많이 알려진 도리스 레싱이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들을 관찰하고 쓴 에세이다.

[특히 고양이는]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서 살던 시절에 온 집안을 점령했던 고양이들을 처리했던 이야기들이 인상적이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고양이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어머니.

동물을 죽이는 일이 집안일을 맡았던 어머니에게 주어지고, 어머니는 결국 어느 주말 자신의 짐을 남편에게 맡기로 집을 비운다.

고양이들을 방에 가두고 그곳에서 들리는 총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우던 풍경.

그런 야생의 땅에서 문명의 도시로 돌아온 그에게 도시의 고양이들은 색다름이었다.

 

누군가 키우다 버린 고양이

주인 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고양이

자연 속에서 제멋대로 야생을 탐하던 고양이들만 보다 도시 속에서 사람에게 길들여진 고양이들은 왠지 서글픔을 주었다.

인간의 편의에 의해 거세당한 고양이들.

그러고 싶지 않지만 도시에서 고양이를 키우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세심한 관찰력으로 고양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것을 글로 써 내려간 레싱의 글들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고양이에 대한 경이로움을 주기 충분하다.

레싱의 글로 남겨진 고양이들은 도도하고 우아하며 말끔하고 영리하다.

유일하게 인간을 집사로 만들어 버리는 동물. 고양이.

 

나는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서워한다.

앙칼진 울음과 사악미가 느껴지는 모습 때문에 나는 그냥 냥이가 무섭다.

레싱의 글에서 냥이는 다 생각이 있다.

쳐다보는 눈빛, 가르랑 거리는 소리, 스치는 몸짓에서도 다 자신만의 의사 표시가 있다.

레싱의 고양이들을 본 적 없지만 그 고양이들의 모습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같이 움직인다.

 

이런 것이구나. 레싱을 읽는다는 건.

 

[살아남은 자 루퍼스]

 

길고양이었는지, 버림받은 고양이었는지 분명치 않았던 루퍼스.

아프고 노쇠한 몸으로 레싱의 집을 찾아와 갈증을 채웠던 루퍼스가 결국 레싱의 부엌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레싱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끝없이 다른 고양이들과 대치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된 곳은 부엌, 그중에서도 주로 녀석의 의자 위였다. 녀석은 그 의자를 떠나는 것을 무서워했다. 작지만 녀석만의 장소. 녀석이 매달릴 수 있는 삶의 발판.

 

 

 

 

 

지능적인 루퍼스의 행동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언제든 쫓겨 날 수 있는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근성이 루퍼스라는 고양이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계획을 세우고 계산적인 행동을 하는 법을 어떻게 터득했을까? 어떻게 해서 이처럼 생각하는 고양이가 되었을까?




루퍼스는 떠돌이 고양이었다가 레싱의 집으로 들어온 지 몇 주 만에 응접실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고양이가 된다.

원래 있던 부치킨과 찰스를 제치고.

고양이 세계에서의 묘한 알력을 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 루퍼스에게 나는 자꾸 마음이 갔다.

생존법을 터득한 이 녀석이 불쌍하고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다.

 

[엘 마니피코의 노년]

 

부치킨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부치킨은 어깨뼈에 암에 걸려서 앞다리 전체를 제거해야 했다.

세발의 부치킨.

이 녀석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연한 자태를 보며 고양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포기하지 않는 의지.

자신의 남은 다리로 의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다.

 


녀석은 얌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니, 녀석이 세 다리로 균형을 잡고 고개를 들어올린 채 생전 들어 보지 못한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일부러 연극하듯 지르는 소리가 아니라,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다리를 잃고 대변을 보고 나서 흔적을 지우려고 애쓰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원래 어깨가 있던 자리의 근육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자신의 뒤처리를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된 고양이의 당황한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고양이에 대하여.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길러 본적도 없지만 이웃집에서 잠시 빌려왔던 고양이와 아무런 경고 없이 집에서 마주쳤던 순간의 오싹함이 아직도 남아있다.

검은 고양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부엌 한켠의 창고.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고양이와 마주치고 기겁을 하게 놀라서 소리를 지르던 그때의 기억이 내게 있는 고양이의 기억이다.

 

내 기억은 공포로 얼룩졌지만

그 기억에 대한 위안을 이 책을 읽으며 받았다.

나만큼 그 검은 고양이도 놀랐을 것이라고 레싱이 내게 말해주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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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알고 있다 다카노 시리즈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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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야나기는 무엇을 손에 넣었을까? 문득 야나기도 이곳 홍콩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도시를, 아니 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야나기의 모습이 보였다.

 

 

<숲은 알고 있다>는 요시다 슈이치의 다카노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이지만 다카노의 과거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실상 첫 번째 이야기라 해도 무관하다.

외딴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다카노와 야나기.

야나기에게는 지적 장애가 있는 동생 간타가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이 두 소년에겐 은밀한 비밀이 있다.

바로 그들이 산업 스파이라는 것이다. AN 통신에 속해 있는 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들 손에 길러져 스파이로 자란다.

18살이 됨과 동시에 임무를 부여받고 본격적인 스파이가 된다.

서른다섯까지 살아남는다면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카노의 과거는 끔찍했다.

그 끔찍함을 잊고 새롭게 시작한 인생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언제나 감시의 눈과 언제나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조직의 조직원들에게 희망찬 앞날 같은 것은 사치다.

다카노에게도 한줄기 빛 같은 풋사랑이 찾아오지만 그것조차도 사랑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다카노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런 다카노에게 야나기와 간토는 형제와 다름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나기는 다카노에게 자신은 탈출할 거라 말하며 자신이 없어지면 동생을 지켜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도 없이 야나기는 섬에서 자취를 감춘다.

18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조직을 위해 일해야 하는 그들의 가슴에 조직은 폭탄을 심는다.

24시간 안에 연락이 닿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세계적인 물 메이저 기업인 'V.O. 에퀴'와 일본의 '니치오 파워'가 손을 잡으려 한다. 그럴 경우, 어떤 그림이 떠오르나?

 

 

수도사업을 민영화시켜서 이득을 보려는 기업들이 수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땅을 사들인다.

그것을 염탐하고 정보를 취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거는 곳에다 판다.

이런 작업을 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AN 통신 조직이다.

조직에 쓸모 있는 자들은 아낌없이 써먹고, 쓸모없는 자들은 가차 없이 쳐내는.

겉으로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지만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은 애초에 없었다.

오직 그들을 이용하려는 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결국 야나기의 배신은 혼자 이룬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야나기를 꼬셔서 조직을 배신하게 한 것이었다.

다나카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될까?

잔잔한 섬 풍경 사이로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일들은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의 재미는 배신과 함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쿄, 방콕, 홍콩, 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이 작품의 스케일을 짐작케 한다.

다카노에게 사랑은 사치인 걸까?

아니면 조직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그의 전략인 걸까?

내가 네 앞에 있었던 걸, 내가 이 섬에 있었던 걸..... 전부 기억해줘. 시오리가 기억해주면 좋겠어.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조직의 그 누구도.

철저하게 혼자여야 하는 다카노에겐 그를 진정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잠시 자신을 맡아 주었던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알게 되는 날이 올까?

 

그러나 자기 자신 이외의 인간은 누구도 믿지 말라는 말에는 아직 도망갈 길이 남아 있다.

오직 한 사람, 자기 자신만은 믿어도 된다는 뜻이다.

 

 

다카노의 앞날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배신과 음모가 내내 따라다닐 거라는 건 알 수 있다.

그가 그 모진 생존의 그물 속에서도 삶의 의지로 찾아낼 수 있는 안테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살아남아 조직을 떠날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신호를 보내는 안테나.

그들이 공항에서 만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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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흡의 필요
오사다 히로시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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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된 게 아니었다. 문득 정신이 들어 보니,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 있었다'.

 

 

문장을 따라가다 나도 어른이 된 순간을 짚어 본다.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른 사이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때 일지도 몰라.

하나에서 아홉 개의 글을 읽어가며 나는 더디게 어른이 되어갔다.

어딘지 모를 순간

어떤 때인지 모를 시간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던 공간에서 나도 그처럼 어른임을 느꼈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그려진 풍경 속에서 잠시 마음을 산책했다.

작가의 기억 속을 걷다 온 기분이 한가롭다.

 

 

 

너라는 한 사람밖에 될 수 없었다. 그걸 알았을 때, 바로 그때였다.

 

 

어른의 모습으로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린 나를 본다.

한 번도 되돌아보지 못했던 내가 이 글 안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문장을 바라보며 어느 순간 깨닫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 버린 서툰 나를 다독거린다.

 

 

 

한 명의 아이가 아니라, 한 명의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순간.

나조차도 모르고 지나쳤던 그 순간을 이제야 이해받고, 이제야 위로받는다.

 

심호흡의 필요.

삶의 매 순간마다 필요했을 이 숨조차 남 들을세라 조용히 품어왔을 수많은 이들에게

가만히 그렇게 어른이 되었노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랬던 거라고. 가만가만 읊조려 주는 목소리 때문에 나보다 지혜로운 어른에게 위로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큰 나무 밑에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지만, 나무 크기만큼의 침묵이 있다.

 

 

오사다 히로시는 일상의 단어들을 가져다 문장을 만들었다.

지극히 당연한 줄로 알았던 것들을 마치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벅찬 순간이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글은 가끔 나를 흔들 때가 있다.

평범한 문장들인데 그것들이 모여 마음을 흔든다.

 

공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아무것도 없던 공터에는, 다른 어디에도 없던 것이 있었다. 너의 자유가.

 

 

 

언젠가 느꼈을 나의 느낌은 흩어져 공기 속으로 사라졌지만

오사다 히로시는 그 느낌을 담아 문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어딘가에서 홀로 서성이고 있던 잃어버린 나를 만나는 느낌이 든다.

 

내가 잊고 있었던 나.

어딘가에 흘려 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나와 산책을 다녀온 지금

곁에 두고 마음이 산란해질 때 꺼내 볼 책이 하나 늘었음이 고맙다.

 

 

일본 작가에 대한 나만의 편견을 가차 없이 녹여내는 시와서의 책들은

그렇게 내게 특별해지고 있는 중이다...

 

 

나를 찾는 시간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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