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테임드 - 나는 길들지 않겠다 뒤란에서 에세이 읽기 2
글레넌 도일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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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것이 아닌 삶을 내 삶으로 여기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길들여진 대로가 아니라 자유로운 여자로서 내 영혼으로부터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이야기는 야생성을 잊은 철창 안의 치타 이야기로 시작한다.

동물원에서 태어나 사육사에게 길들여진 치타.

사람들 앞에서 재롱 떨 듯 야생성 비슷한 흉내를 내고는 철창 안으로 들어가서 마치 그곳이 내 집인 것처럼 순응해버리는 치타.

그 모습에서 자신을 본 글레넌은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세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바람을 피웠다.

부부관계를 개선해보기 위해 심리 상담을 받았지만 글레넌은 도저히 남편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상담사에게 남편과의 섹스가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솔직한 이야기에 대한 답은 '구강성교'를 하라는 것이었다.

글레넌은 결혼생활 내내 불성실했던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각종 중독 문제도 가지고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내내 뭔가 자꾸 불편했다.

아마도 내가 이 글들에서 나 자신의 억압된 모습을 보게 되어서 그랬던 거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지워진 사회적 규율들은 여자이던 남자이던 굴레가 되어 온몸에 동여매어진다.

마치 야생은 구경도 못한 채로 야생을 흉내 내야 하는 동물원 치타처럼.

 

 

이 글은 한 사람이 이런저런 사회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감당하고, 싸우고, 이겨내고, 쟁취한 이야기다.

짤막한 에세이들로 이루어진 소설 한 편이다.

 

책을 읽기 전 수많은 찬사가 담긴 리뷰들을 먼저 접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 인사들의 아낌없는 칭찬이 이 책에 쏟아졌다.

도대체 뭐길래?

 

책을 읽으며 내가 이런저런 굴레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그 굴레를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이기에 감당해야 하고, 치러야 하고, 책임 지워지고, 참아내야 하는 것들의 부당함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라는 생각이 내 안에 있었거나, 어쩜 내가 뭔지도 모른 채로 그렇게 살아지도록 강요받는 것을 당연시 해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 여자들에게 <아줌마>라는 단계가 생성된 것이 바로 글레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도 엄마도 아닌 아줌마.

이 단어가 가진 강렬하고 강력한 힘은 알게 모르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들이 자신의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

이 관습적인 사회에서 그나마 숨통을 트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어떤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되어가는 단계가 <아줌마>가 아닐까.

어디에도 없는 <아줌마>는 우리 조상들이 일구어낸 본래의 야생성이 아닐까.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누군가가 주입시킨 모습이 아닌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자는 글레넌의 이야기는

우리 여성들에게 필요한 지침서 같다.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낸 굴레에서 벗어나도 된다.

여자니까. 여자라서. 여자는.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서

사람이니까. 사람이라서. 사람은. 으로 살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여자> 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여자이든, 여자가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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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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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이야기 보다 더 특별한 이야기.>

 

 

"수사 속도를 높여야겠어. 피해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으니, 이를 막으려면 앞질러 가는 수밖에. 자네가 미래 세계로 가줘야겠어.

 

 

시간여행자 수사관 섀넌 모스.

미래 세계에서 종말을 일으키는 터미너스로 인해 죽음 직전에 구출된 섀넌은 그 후유증으로 다리 하나를 잃는다.

그런 그녀에게 사건 현장에 참여하라는 전화가 온다.

NCIS 소속인 섀넌은 해군 가족이 몰살당한 현장에 도착한다.

그 현장은 그녀의 절친이었던 코트니가 살던 집이었다.

 

십 대 때 살해당한 코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집은 두 아이와 엄마가 참혹하게 살해된 살육의 현장이었다.

사라진 큰 딸과 그 집에 가장인 패트릭 머설트는 사라진 우주선 <리브라>호의 선원이었다.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터미너스.

시간 여행 중에 사라진 <리브라>호.

그러나 <리브라>호의 선원들은 굳건한 대지에 어떻게 돌아왔을까?

풀리지 않는 사건의 실마리를 위해 상관 오코너는 섀넌을 미래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전함이 목격하는 미래 세계란 현재 조건에 기인하는 가능 세계이며, 달리 말하면 사실상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에 불과하다.

 

 

시간 여행자가 방문하는 미래는 시간의 갈래상 여러 줄기 중에 하나로 시간 여행자가 방문하고 있는 그 시기에만 생성되는 세계다.

따라서 시간 여행자가 떠나면 그 세계는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아는 미래 세계 사람들은 시간 여행자를 발견하면 자신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간 여행자를 붙잡아 두기도 한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떠난 섀넌은 미래에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코트니의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머설트와 불륜 관계였던 니콜을 찾아 그녀가 말하지 않은 머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몇 달 동안 공을 들인 섀넌은 드디어 니콜에게서 진실을 듣게 되는데...

 

나는 앞으로 어떤 테러가 여전히 일어날 수 있는지 알아보고, 그것이 굳건한 대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추적하러 떠난다. 그래야 하일데크루거가 이 굳건한 대지에서 무슨 일을 벌일 계획인지 예측할 수 있고, 막을 수 있다.

 

시간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SF 소설의 단골 소재이지만 그 빤한 이야기를 이렇게 색다르게 만들어 낸 작가의 세계관이 경이롭다.

굳건한 대지는 현재이고 미래에서 몇 달이나 몇 년을 살다 오든 현재의 시간은 멈춰있다.

하지만 시간 여행자는 미래의 세계에 머물다 온 만큼 나이를 먹는다.

현재의 시간에서 섀넌은 점점 늙어가고, 미래의 세계에서는 세월을 먹지 않은 젊음을 가졌다.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은 그녀의 달라진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래의 그들은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돌아온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어떤 세상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섀넌.

그녀가 미래를 다녀올 때마다 점점 더 빨라지는 지구의 멸망.

결국 굳건한 대지 현재까지 터미너스가 따라오고 섀넌은 그것을 막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한다.

과연 그녀는 이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까?

 

나는 하나의 웜홀을 항해했다. 각각의 웜홀은 별개의 미래 세계로 향하는 다중우주로 이어지는 터널이다. <그레이 도브>호가 사납게 요동치는 수많은 갈래의 거품 속에서 어떤 웜홀로 나올지는 오로지 우연의 문제였다.

 

 

머릿속에서 모든 장면들이 저절로 재생되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야기의 끝을 향해 갈수록 전 세계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뜻은 같았지만 자기희생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일데크루거는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다.

지구의 멸망을 구원하기 위해.

하지만 섀넌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면 비로소 이 책의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이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자, 섀넌, 일어나. 다른 사람이라면 그만뒀겠지만 넌 할 수 있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섀넌의 말이 힘겹지만 포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한다.

눈앞에 닥친 지구 멸망 앞에서도 나는 그녀가 해낼 거라는 걸 안다.

지구는 섀넌이 있기에 멸망하지 않을 거라는걸.

 

고독한 수사관이자 어느 세계에서도 이방인이 되었던 섀넌 모스.

사라진 세계로 사라진 섀넌 모스.

그리고 무한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갈래들.

우리는 그 어느 갈래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섀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어떤 삶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집념으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 어느 한 가닥의 시간에서만이라도 섀넌이 평범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이야기의 강렬함은 책을 다 읽고 나서 점점 커져만 간다.

영화보다는 이야기로만 남아서 자꾸 곱씹어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특별한 이야기에 굶주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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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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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신작 4편이 담긴 <피가 흐르는 곳에>

4편의 이야기 모두 은근한 광기와 오싹함과 믿지 못할 세계를 담았다.

 

 

 

나는 그날 그렇게 안아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만약 그날 엄마처럼 나를 안아준 사람이 있었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적한 할로 마을에 갑부인 해리건씨가 은퇴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사를 온다.

해리건씨는 크레이그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하고 그에게 기념일들마다 복권이 담긴 카드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해리건씨가 보내준 복권에 3000달러가 당첨된 크레이그는 그에게 아이폰을 선물한다.

모든 신문물을 경계하던 해리건씨는 의외로 아이폰에 관심을 가지고 애용하게 된다.

노환으로 죽은 해리건씨의 장례식에서 크레이그는 몰래 아이폰을 관속에 넣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 못 할 일들이 생겼을 때 해리건씨에게 전화를 건다.

 

 

환상특급 같은 이야기인데 생각할수록 뭔가 오싹한 분위기가 스멀스멀 퍼지는 이야기다.

해리건씨의 영혼이 크레이그의 고민들 때문에 영면에 들지 못했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일까?

아무에게도 관심 없을 거 같았던 갑부 해리건씨는 사실 세심하게 자기 사람들을 돌봐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묘한 반전으로 남는다.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구.

인터넷은 끊긴지 오래고 갑자기 싱크홀이 생겨나고, 연료도 바닥나고, 전기도 언제 끊길지 모르고

식량도 곧 그렇게 될 처지에 놓은 지구.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고마웠어요. 척! 이라는 문구는 온 세상을 도배한다.

그러나 그 '척'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누구일까?

 

 

빅토리아풍 주택의 다락방에 숨겨져 있는 건 시간 터널일까?

가까운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공간.

그 미래를 본 사람은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가 그 미래를 바꾸려고 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4편의 이야기 중에 가장 아리까리했던 작품.

 

 

 

"이제는 비행접시에서부터 킬러 광대에 이르기까지 뭐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2의 세계가 실제로 있거든요. 그게 존재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이에요."

 

 

피가 흐르는 곳에.

전작 <아웃사이더>를 읽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이야기에서 만났던 비슷한 존재를 또다시 느낀 홀리.

절대 악.

사람들의 고통과 공포를 먹고사는 그것.

언제나 재난의 현장에 젤 먼저 달려와 피 맛과 공포와 고통을 흡수하는 그것이 이제는 스스로 재난을 일으키고 있었다.

홀리는 홀로 그것을 추적하고, 홀리와 마찬가지로 평생 그것을 추적하며 살아온 90 넘은 노 형사는 집념의 기록물을 홀리에게 넘긴다.

그것과 담판을 지으려는 홀리의 계획은 무사히 진행될까?

홀리는 아끼는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그 절대 악을 해치울 수 있을까?

 

 

빌 호지스 시리즈에서 파생된 홀리 기브니는 그래서인지 평범한 사건들보다는 뭔가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따라오는 모양이다.

4편 중 가장 긴 이야기 피가 흐르는 곳에.

홀리의 곁엔 호지스가 늘 함께 하는 거 같고, 항상 형사들이 그녀를 도우며 똑똑하고 다정한 제롬까지 홀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서 기쁘다.

호지스 씨가 그리웠는데 피가 흐르는 곳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어서 더 아련해진다.

스티븐 아저씨~ 호지스 씨를 그렇게 보내시면 안 되는 거였어요... 아쉬우셔서 자꾸 이름이라도 등장시키시는 거죠?

 

 

 

뭐 어때? 드류는 생각했다. 그냥 가상의 질문이잖아. 그것도 꿈속에서 듣고 있는.

"그렇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고 소원을 빌겠어." 드류는 말했다.

 

 

대가를 치르는 소원은 함부로 빌면 안 된다.

당신은 그 죄책감을 죽어서도 짊어지고 갈 테니.

그것이 곧 죽을 사람의 목숨이라도...

 

 

단편으로만 살았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뭔가 족적은 남기고 싶었던 드류 교수님.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라 장편을 써보겠다고 아버지의 오두막으로 떠난 그는 폭풍우를 만난다.

그리고 그날 거의 죽어가는 쥐 한 마리를 끝장내지 않고 불쌍히 여겨 난로 앞에 둔다.

따뜻하게 죽으라고.

그러나 쥐는 죽지 않고 드류에게 작품을 멋지게 끝내게 도와준다고 한다.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소원의 대가였다.

 

 

드류는 소원을 빌었다.

완성된 작품은 드류의 작품인가? 쥐의 작품인가?

 

 

 

어떤 이야기를 써도 독자를 푹 빠지게 만드는 스티븐 킹.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진 이야기의 킹.

짤막한 그들이 뿜어내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현실.

 

 

우리는 모두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삶은 모두 선택의 기로에 있고 그 기로에서 우리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항상 무언가의 도움을 받는다.

그 무언가는 쥐일 수도 있고, 해리건 씨 일 수도 있고, 척일 수도 있고, 절대 악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저마다 선택한 길에서 받은 도움에 대가를 치른다.

그리나 절제를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제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4편의 주인공들이 모두 맘에 든다.

그들은 멈출 줄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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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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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편지 속에서 나는 너의 것이야. 가든의 표적도, 네 임무의 일부도 아닌, 오로지, 너의 것.

 

 

언제인지 모를 먼 미래

가든과 에이전시로 나뉜 그들은 시간을 차기하기 위한 시간 전쟁을 벌인다.

가든의 블루

에이전시의 레드

그들은 각각의 최고 요원이다.

 

우연처럼 필연적으로 그들은 전쟁터 속에서 서로를 감지한다.

절대로 아무도 알 수 없도록 그들은 시간의 타래 속에 서로에게 편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런 레드의 뒤를 추적자가 바짝 뒤쫓는다.

 

 



 

 

 

레드의 편지는 빨강으로

블루의 편지는 파랑으로

서로의 이름과 같은 잉크 빛으로 쓰인 편지들을 읽노라면

내 자신의 무개성과 무지와 무감성과 마주치게 된다.

 

레드는 잠을 거의 자지 않지만 그래도 잘 때면 어둠 속에 꼼짝 않고 누워 두 눈을 감고서, 눈앞에 떠오르는 청금석을 보고, 혀끝에 느껴지는 붓꽃 꽃잎과 얼음을 맛보고, 귓가에서 지저귀는 파랑 어치의 노래를 듣는다. 레드는 그렇게 '파랑'을 수집하여 간직한다.

 

 

상대가 서로의 조직에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흔적을 없애는 레드와 블루의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간절함을 부여한다.

절대 만날 수 없는 그들

고전적인 편지를 온갖 장치로 교모하게 숨겨가며 각자에게 남기는 방식은 그 어떤 지구상의 편지보다도 간절하고 절절하다.

 

그녀들로 이루어진 그녀들의 세상.

자신의 손 아래서 시간의 타래가 짜인다는 걸 깨달은 블루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든의 승리.

레드를 꼬여내기 위한 블루의 작전이라고 생각하는 에이전시는 역으로 레드를 이용해 블루를 잡으려 한다.

 

내가 사는 이 골짜기를 통째로 삼켜도 허기가 가시지 않은 것 같아. 그 대신 나는 내가 느끼는 갈망을 실로 자아서 너라는 바늘의 눈에 끼우고, 내 살갗 아래 어딘가 꿰매어 감춰 뒀어. 너에게 쓰는 다음번 답장을 그 실로 한 땀씩 수놓으려고.

 

나는 모든 시인이 될 거야. 그들을 다 죽이고 한 명 한 명의 자리를 차례로 차지할 거야. 그래서 모든 시간 가닥에서 사랑에 관한 시가 쓰일 때마다 모두 너에게 바치는 시가 될 거야.

 

 

이 이야기에 실려 있는 방대한 인용들은 주석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석을 읽어도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은유와 비유들 사이로 흐르는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다 주워 담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껏 이토록 서로를 갈망하는 연서를 읽은 적이 없는 거 같다.

그동안 읽었던 소설 속 연애편지들은 이제 아무리 잘 썼다고 평가되는 편지라도 블루와 레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

끝도 없이 되풀이될 거 같은 그들의 편지에도 마지막이 존재하고

서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서로 안에 있었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이야기를 다 읽고 제목을 다시 음미해본다.

시간 전쟁을 하고 있는 자들은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한계치를 뛰어넘었기에.

 

이 이야기는 앞으로의 많은 이야기들에 영향을 줄 것이다.

너무나 색달라서 모든 감각을 깨워서 읽어내야 했다.

마치 레드와 블루의 편지를 입수해서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유추해내야 하는 추적자가 된 것처럼.

 

모든 소설의 줄기에서

완전히 다른 줄기를 생성해낸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블루의 손가락 사이에서 레드만 알아볼 수 있도록 꿰어진 새로운 시간의 타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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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2 - 단골손님을 찾습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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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행복에 충실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아직 만나지 못한 행복을 위해 미래를 기대해야 하며,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행복을 위해 과거를 되새기며 살아야 한다.'

 

어른들의 판타지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두 번째 이야기로 돌아왔다.

1년간 열심히 일한 페니는 꿈 산업 종사자로 인정받아 '컴퍼니 구역'에도 갈 수 있게 된다.

기대에 부푼 페니 앞에 달러구트는 이번에도 생각지도 못한 심각한 과제를 준다.

다름 아닌 792번 손님.

이 손님은 오래전 "왜 저에게서 꿈까지 뺏어가려고 하시나요?" 라는 민원을 넣고는 두 번 다시 방문하지 않은 손님이다.

 

게다가 달러구트는 25년 만에 '파자마 파티'를 열기로 하는데 한때 단골이었던 손님들을 다시 오게 하기 위함이다.

언제나 달러구트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일들을 계획하는데

그 일들이 저마다 의미를 가지기에 처음에는 갸우뚱하다가도 나중에야 그 깊은 뜻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파자마 파티도 내심 기대를 하게 한다.

 

 

"빨래는 저렇게 푹 젖어 있다가도 금세 또 마르곤 하지요. 우리도 온갖 기분에 젖어 있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괜찮아지곤 하지요. 손님도 잠깐 무기력한 기분에 젖어 있는 것뿐입니다. 물에 젖은 건 그냥 말리면 그만 아닐까요?

 

 

녹털루카 세탁소에서의 장면이 인상적이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녹털루카들

무기력에 빠진 옛 단골손님에게 파티 초대장을 건네는 달러구트.

 

가끔 나도 모르게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는데

그런 무기력증이 찾아올 때마다 나도 녹털루카 세탁소에서 나의 무기력증을 뽀송뽀송하게 말려 버리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꾼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꿈을 사는 사람들의 꿈을 엿보며 나도 잠시 그들의 꿈속에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느껴보게 된다.

나는 달러구트가 꿈을 소개하는 방식이 맘에 든다.

그리고 그런 달러구트의 방법을 알게 모르게 습득하고 깨달아가는 페니가 좋다.

 

한국형 판타지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어준 이미예 작가의 꿈 이야기는 어디까지 갈까?

3탄이 나올 거 같은 분위기라 살짝 기대를 더 해 본다.

페니가 일하는 시간이 늘어 감에 따라 이 이야기에는 더 깊은 감정이 담길 거 같아서.

페니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성실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약간 괴짜인 달러구트와 잘 어울린다.

나중에 페니도 멋진 꿈을 만들어 내는 제작자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페니가 제작한 꿈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따듯한 기운을 남겨줄 거 같다.

페니와 막심의 러브라인도 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맨날 남의 나라 판타지만 보다가

우리의 판타지를 보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더 포근해진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 달콤하고 다정한 꿈을 꾸게 만드는 거 같다.

나도 왠지 오늘 밤은 기분 좋은 꿈을 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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