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씽 인 더 워터
캐서린 스테드먼 지음, 전행선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덤을 파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더는 궁금해할 필요 없다. 엄청나게 오래 걸리니까. 얼마를 예측하든, 그 시간의 두 배가 걸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혼여행지에서 바닷속에 있던 무언가를 발견한 마크와 에린.

그들은 그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 채로 호텔로 돌아온다.

일등석 비행기와 초호화 리조트. 겉으로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신혼부부인 마크와 에린의 속 사정도 그렇게 이상적일까?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다음날의 바다는 많은 것을 숨겨 놓았다.

그들이 건져올린 가방도 그중에 하나였다.

돈다발과 다이아몬드.

그들은 건지면 안 되는 것을 건져 올렸다.

그리고 가지면 안 되는 마음을 가졌고, 부려서는 안되는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겉모습은 사실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

왜냐하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1인칭 에린 시점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도입 부분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무덤을 파는 여자.

남편의 시체를 묻으려는 여자.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지만 그것으로 가는 단계는 예측하기 어려워야 한다.

그래야 성공한 이야기다.

 

에린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는 에린 때문에 짜증을 유발한다.

그녀의 생각을 읽어가며 나도 모르게 소리치게 된다.

- 그만 잊으면 안 되겠니?

- 그냥 그것으로 만족하고 일 좀 만들지 마!

- 그냥 멈춰!!!

 

여름용 심리 스릴러라고 생각하고 읽었다가 여러 가지 씁쓸한 상황들 때문에 되돌아보게 되는 이야기였다.

사랑의 시작과 끝.

누군가의 일방적인 이야기는 자신의 모순점을 교모하게 감춰버리지. 그래서 우리는 마크에 대한 에린의 생각을 읽었을 뿐 진정한 마크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이 몹시도 교묘한 함정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이 이야기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게 된다.

 

 

 

 

5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문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지만. 어쨌든 문 안쪽으로 들어오니 좋기는 하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막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다른 차원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다. 좋다고 여기던 것이, 단지 비교를 통해 갑자기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러니 아예 안 보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쉽게 돈을 손에 쥐게 되면 그다음은 더 쉬운 법이다.

그리고 계속 갈망하게 된다.

에린이 그랬다. 자기가 속한 세상에서 한 발 더 내디딘 세상의 '맛'을 본 에린은 나아가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뱃속의 아이마저 숨기고 자신을 합리와 하며 마크를 속였다.

마크 역시 멈출 줄 모르는 에린의 성격을 이용해 더 많은 걸 가지려 했다.

마크가 정말 그랬을까?

어디까지나 에린의 자기 편의 대로의 해석과 자기 합리화 적인 성격이 마크를 그렇게 규정지은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생각을 강요한 게 아닐까?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야 이 모든 게 트릭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완전 범죄 앞에서 얌전하게 세뇌당했던 게 아닐까?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잘라내고 달아나버리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낀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갖기 위해.

.

내 선택이 바로 나다. 내가 이 가족을 원하나? 그런가? 아니면 뭔가 다른 걸 원할까?

 

 

 

에디가 편했던 건 아마도 자신의 뒤를 봐줄 거라 여겼기 때문이겠지.

마크는 돈을 챙겨서 영국을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흔적이 남은 영국이 아닌 뉴욕에서 새로운 삶을 꿈꿨을 수도 있다.

모든 걸 돌려놓기에는 늦었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려면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자신들이 꾸려놓은 터전에서 보란 듯이 살기는 어려웠을 테니.

 

죽은 자는 말이 없음으로.

마크는 처음부터 자신의 입장을 말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에린의 입장만 헤아릴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어 보기 전에는 그 누구의 편도 들어서는 안된다는 걸 깨달아 버린 나는 에린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기 어렵다.

 

 

이것은 완벽한 범죄다.

자신의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고 모든 걸 차지한 여자의.

 

 

 

 

 

영국에서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읽자니 배경 묘사 하나하나가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아서 더 즐겁게 읽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펙트 마더
에이미 몰로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사람들은 임신한 여자가 어떤 축복을 받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드는 걸까요? 왜 우리가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거죠?

 

도시 여성 스릴러라는 호기심 어린 타이틀로 시작한 퍼펙트 마더.

제목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완벽한 엄마는 어때야 하는 걸까?

 

출산 전부터 맘 카페에 가입하여 아이가 태어나고도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육아의 고단함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위로가 되어주던 맘 카페 회원들이 어느 날 회원 중 한 명인 위니가 싱글 맘인 것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혼자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위니를 위해 엄마들은 하루 날을 잡아 아이를 맡겨두고 자유의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거절하는 위니를 계속 설득해서 모임에 나오게 만든 넬.

아이들의 사진을 재미 삼어 찍어주는 호기심 많은 프랜시.

시장의 전기를 대신 써서 대박 난 대필 작가 콜레트.

이렇게 셋은 엄마들의 모임 주축 멤버로서 그날의 모임을 이끈다.

겨우 설득 끝에 모임에 참석한 위니의 아기 마이더스가 바로 그날 실종되는 일만 없었다면 그날은 그렇게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다.

 

왜 안 돼? 나도 누구 못지않게 하룻밤 나가서 놀아도 괜찮은 사람이야. 재미있게 놀 자격이 있어. 왜 집에 남아서 아기에게만 집착해야 해? 다른 엄마들은 다들 나가서 잘만 노는데. 기념일도 축하하고, 술도 한 잔하잖아? 그 엄마들은 이 새로운 세상을 참 쉽게도 헤쳐 나가고 있잖아. 너무나도 평온하게.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게. 짜증나도록 완벽하게.

마이더스의 실종은 위니의 정체를 탄로나게 하고, 예전에 하이틴 배우였던 위니를 둘러싼 각종 가십들이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그날 모임을 이끌었던 엄마들 각자의 사연들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이야기는 끝을 알 수 없게 달려간다.

그리고 진실한 트릭이 이야기 속 이야기에 잘 숨겨져서 마지막까지 독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한다.

어떤 게 진실인지 읽는 이들을 오락가락하게 만든 이야기 솜씨가 좋았다.

그리고 정말 오지랖 넓은 프랜시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녀 때문에 많이도 짜증스러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했을지 생각해보니 프랜시야 말로 이 이야기의 일등 공신이 아닐까 한다.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한달음에 헤쳐 나가야 하는 여자들의 심리를 탁월하게 잘 써 내려갔다.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여자들의 입장과 현실과 감정의 들숨날숨들이 곳곳에서 불을 뿜는다.

 

 

 

 

 

 

 

'여자들이 전부 다 누려야 한다'라는 생각이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봅니다.

 

 

아이의 실종에서 아이 엄마의 과거로

아이 엄마의 과거에서 그날 모임에 참석했던 엄마들이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에 초점이 모아진다.

하루 단 몇 시간의 일탈이 그리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일까?

이 이야기는 단락마다 이메일 형식으로 육아 상식에 관한 글들이 적혀 있다.

맘 카페 회원들에게 매일 발송되는 메일이다.

그 육아 상식들을 읽자니 복잡한 마음이 든다.

과연 이 상식이 모든 아기들에게 올바르게 적용되는 상식일까?

초보 엄마들의 아기 키우기는 옆에서 잘 도와주는 남편이 있다 해도 어려운 법이다.

서로 각자의 정보를 공유하다 해도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법이다.

게다가 상실의 아픔을 겪었던 사람에겐 더더더욱...

여자들의 이야기다.

용감한.

돈을 주고 모르는 사람에게 아기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정작 엄마라는 사람은 아기 발 사진이나 보면서 몇 시간을 보내다니 얼마나 우스운 짓인가.

 

지구상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든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각자의 분신들이 이 이야기 속에 있을 거라 생각된다.

콜레트처럼 아이의 발육이 늦어져 속을 끓이거나, 프랜시처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위니처럼 홀로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했거나, 넬처럼 자신의 아이를 떼어놓고 출산휴가를 앞당겨 끝내야 하는 마음들이 곳곳에서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 불안정한 심리들은 그녀들의 호르몬 탓일까?

왜 아이에게 생긴 문제들은 모두 엄마 탓이어야만 할까?

이런 생각 뒤에 오는 반전이 너무 급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에 이야기의 맥이 잘 나가다 끊긴 느낌이다.

그 부분을 좀 잘 다듬었다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 이야기였다.

급하게 마무리 지은 느낌 때문에 조금 허무했지만 읽는 내내 숨 가쁘게 느껴졌던 긴장감이 좋았던 스릴러였다.

육아는 전쟁이다.

어쩜 전쟁보다 더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렴.

사람을 길러내는 일임에 그것은 갖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하지.

앞표지의 당당했던 여자들의 모습은 뒷 표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구가 더해졌다.

 

 

"아기를 낳았다고? 축하해! 이제 모든 게 네 잘못이 될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문지 에크리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도 사랑을 했던 나 같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써 사랑을 소외시켜왔던 것이다.

 

 

제목에 담긴 사랑에 대한 찰떡같은 느낌이 평소에도 좋아했던 시인의 산문을 더 멋있게 보이게 했다.

무수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글을 읽자니 지난 감정들과 현재 감정들과 앞으로 느낄 감정들을 만나고 온 느낌이다.

대화는 잊는 편이 좋다.

 

그녀는 쉬운 입을 어렵게 다루고, 어려운 귀를 좀 더 예민하게 다루기로 했다. 귀가 대화 너머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않는다면, 그 귀와 연결된 입은 더 큰 과오를 저지르기 십상이니까.

 

 

 

우정은 사랑보다 더한 질투를 유발하고

사랑보다 더한 관계의 무질서를 유발한다.

결국 사랑하기에 조금 더 차지해 보려는 욕심이 귀를 닫고, 입을 놀리게 만들지.

그녀는 외롭지만 그게 참 좋다. 홀홀함이 좋고 단촐함이 좋고, 홀홀함과 단촐함이 빚어내는 씩씩함이 좋고 표표함이 좋다. 그래서 그녀는 되도록 외로우려 한다.

외로움은 자신과의 유희의 시간이다.

그래서 외롭게 보이지만 외롭지 않다.

자신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들이 타인을 들여다보며 외로움을 채울 뿐이다.

 

지난 계절의 나는 천천히 천천히 마음을 준비해가는 임종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면.

어른스러워지고 싶은 시간이 오면.

내가 가진 것들을 점검하며 나를 벼리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동안의 나와 결별하는 시간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안다.

내가 달라지고 있다는걸.

좋아하는 작가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나를 꿈꾸게 한다.

그리고 그 꿈은 나를 달라지게 하지.

다양한 ' 사랑 ' 들의 관계를 읽으며

시인의 감각으로 쓰여진 산문이 노래처럼 들린다.

운율처럼 산문율의 리듬이 깊은 밤을 날아온다.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사랑은

영원히 아무것도 아닌 것. 중에 최고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늘 곁에 있기에 느낄 수 없는 공기라는 존재처럼.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한 권이었다.

사랑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시대가 도래한 거 같다.

아는 감정들이 새롭게 재정립되는 글들이었다.

그녀만의 언어로.

사랑에는

딱 한 발자국만큼의 거리가 필요하다.

책 속의 그녀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늑대의 역사
에밀리 프리들런드 지음, 송은주 옮김 / 아케이드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가 눈에 띄게 아름다운 책이다.

제목과 아름다운 표지는 심오한 이야기가 담겼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숲에 사는 소녀와 늑대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를 추측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나는 그런 일을 해 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한테서 나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원하던 것을 얻게 해 주는 것이다.



열다섯 소녀.

학교에서 '괴물' '빨갱이' 등의 별명으로 불리는 매들린에겐 친부모인지도 잘 모르겠는 부모가 있다.

한때 공동체 생활을 했지만 모두 떠나고 셋만 남아 각자 자신만의 생각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십 대 소녀에겐 따분하고, 답답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이었다.

외딴 숲에서 히피 부모와 함께 살며 어딘가에도 소속되지 않는 삶을 사는 소녀의 성장기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어갔지만 시간의 순서가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낯설음이 배가 되는 이야기였다.

아동 성범죄자였던 그리어슨 선생과 릴리의 소문들

이웃에 이사 온 젊은 부부와 그들의 아들 폴.

어쩜 사춘기 소녀 인생의 전부였던 그들은 그녀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를 남겨두고 떠난 사람들일 것이다.

곱절의 나이를 먹었어도 절대 이해되지 않은 그들의 삶.


 

 

 

그가 특별히 다르기 힘든 아이였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격한 데가 있기는 했다. 그에게는 어딘가에 질서와 혼돈을 가르는 뚜렷한 선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금이라도 일상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패트라와 폴은 그녀 인생에 찾아온 외지인이었다.

처음으로 깊이 들어가 본 그들의 삶에서 그녀는 행복함과 단란함과 사랑과 엄숙함과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조바심과 공포감도 느끼게 된다.

특별한 종교를 택한 그들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는지.

패트라가 대항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아들의 목숨 앞에서, 지켜야 할 신념 앞에서 흔들렸지만 거부하지 못한 패트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잔상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의 삶에 영향력을 미친다.

어른이 되면 이해가 될까?

어른들은 무엇이든 다 아는 걸까?

어른이 되면 그 시절의 흐릿함들이 되살아 날까?

어른이 되면 그때 모호하게 흘려버린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리어슨 선생은 자신의 문제가 있었지만 학생을 다른 관점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한 번은 나도 알지 못하는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

린다에게 그리어슨 선생이 그런 사람이었다.

릴리는 어수룩해 보였지만 영악한 면이 있는 아이였다.

패트라는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갇혀 있는 사람이었고, 레오는 자상하고 부드러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모든 게 종교 안에서 통제되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폴은 아이였지만 아이 같지 않았던 아이였을 뿐이었다.

우리 셋 사이에는 열한 살의 나이차가 있었다. 우리는 네 살, 열다섯 살, 스물여섯 살이었다.



11살의 차이

11이라는 숫자는 결국 각자의 홀로서기를 뜻하는 게 아니었을까?

매들린이라는 이름 보다 린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 아이는 늑대에 대한 발표를 멋지게 한다.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그리어스 선생뿐이었지만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의미를 처음으로 알게 된 시간이었다.

어쩜 린다는 그 이웃 가족의 비극을 예리한 후각으로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린다가 릴리 같은 아이였다면 분명 폴을 위해 그 가족의 중심으로 쳐들어 갔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을 알았기에 린다는 릴리에게 가죽부츠를 훔쳐다 주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하지 못하는 것을 그녀는 해내는 강단이 있음으로.

불분명하고

미완성이며

용감한 척하지만 겁 투성이인

그저 십 대.

그 시절을 온전히 보내지 못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안정하다.

하지만 그 원인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일은 묻어야 한다.

내가 어쩌지 못한 일들은 시간이 흘러도 어쩌지 못하기 때문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옛날에 내가 죽은 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면 나 역시 그 오래된 집에서 죽은 게 아닐까. 어릴 적 나는 그 집에서 죽었고, 그대로 내가 맞이하러 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누구에게나 옛날에 자신이 죽은 집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곳에 그저 죽어 있는 자신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 할 뿐.

 



비채 X 히가시노 게이고 컬렉션 시리즈.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은 게이고의 초기 작품이다.

오래전 다른 출판사에 출간된 적이 있으나 이번에 비채에서 새롭게 출간하였다.

 

 

 

[저의 야심작,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

 

 

 

게이고 자신이 추천하는 자기 작품이다.

1994년에 출간 이래 일본에서만 75만 부가 팔렸다니 게이고 팬이라면 안 읽은 사람이 거의 없을 작품이다.

 

 

 

사야카는 7년 전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전 여친이다.

얼마 전 동창회에서 만났지만 별 얘기 없이 헤어졌다.

그러고 며칠 뒤에 사야카가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한다.

거절해야 마땅했지만 사야카의 목소리에서 거절하기 힘든 무언가를 느끼고 나는 사야카를 만나러 간다.

 

그녀가 내민 사자머리 모양의 열쇠와 지도.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유물이라 했다. 어릴 적 기억이 하나도 없는 사야카는 이 유품이 자신을 어린 시절로 데려다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자신을 잘 아는 그에게 같이 가달라고 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곳에 있는 별장 같은 집엔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아있다.

마치 갑자기 어디론가로 증발해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집은 출입문도 모두 봉해져있고, 유일하게 지하실로만 드나들 수 있었다.

그 집의 모든 시계는 11시 10분에 멈춰져있다.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야카의 아버지는 왜 이곳을 드나들었을까?

그 집은 사야카랑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 이야기의 배경은 그 이상한 집이다.

그곳에서 사야카와 나는 그 집을 둘러보며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과거를 파헤친다.

유스케라는 소년의 일기장으로 시작해 점점 알 수 없는 과거의 일들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소름 돋는 이야기들.

 

아동학대와 부모의 강요.

말하지 못할 죽음들.

숨겨진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나는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생각했던 관점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귀신이 나오거나 끔찍한 참상을 보거나, 무서운 이야기를 대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으시시하고, 뭔가 터질 거 같은 긴장감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무섭지 않은 데 무섭고

겁나지 않는 데 겁이 난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에서 터져 나오는 반전의 실타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 더 소름 끼친다.

상세한 묘사가 없기에 더 상상하게 되는 비극이 이 이야기의 묘미인 거 같다.

제목 때문에 호러물처럼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예상을 빗나갔다.

여러모로 독자들의 예상을 뒤엎는 소설이다.

 

 

 

신세가 많았습니다. 나는 역시 나일 수밖에 없다는 걸 믿고 앞으로도 살아가려 합니다.



사야카가 보낸 마지막 편지의 글은 그녀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겠다는 의지였다.

기억의 봉인이 풀어진 지금에야 그녀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맞아들이는 일을 하고 있음이다.

 

가해자는 잊어버리지만 피해자는 계속 되풀이되는 시간을 산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를 몰라서 괴로웠던 시간은 이제 사라질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의 고통을 되씹지 않으며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