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亂) - 할인행사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나카다이 타츠야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영상으로 형상화했을 때, 이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까?

처음의 각본은 ‘리어왕‘과 사뭇 달랐다고 하지만 극본 작업 과정에서 영화는 ‘리어왕‘의 충실한 리메이크로 변모했다고 한다. 초고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내내 나는 이렇게 기묘할 정도로 원작에 충실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주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의 미학적 요소들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일본의 건축미 뿐 아니라 전반적인 예술미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 대가의 작품들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전반적인 일본의 예술문화가 나와는 안 맞는 지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형상화한 일본 문화의 아름다움, 특히 비장미는 극강이다. 정확히 말하면 막부와 사무라이 시절의 미학을 재현한 것인데, 원작에서 묘사된 유럽 여러 나라와 지역 영주들간의 난세를 표현하기에 일본 전국시대만큼 딱 떨어지는 예도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영상미학 중 나를 사로잡은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과의 유사성이다. 배리 린든은 제3자의 시선으로 한 인물의 지난한 삶을, 조금은 냉소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배리 린든이 그러하듯이, ‘란‘에서도 이야기 중간마다 자연풍광이 롱숏으로 들어온다. 하나의 광경이 그림 같이 나타난다. 구름은 어지럽게 이지러뜨려져 있는데, 그 아무 의미없는 변화가 인간사의 역경을 비웃듯이 평화롭다.
IMDB에서도 지적하는 사실인데, 이 영화는 클로즈샷이 매우 드물다. 히데토라의 얼굴이 그나마 가깝게 보이지만 나머지 인물들의 얼굴은 유심히 봐야 그 얼굴을 알 듯 하다. 셋째 아들인 사부로의 얼굴은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지막 부처의 평안한 존안만이 인상적으로 기억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인간사의 허망함을 가까이 들여다 보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또 하나는 전투장면의 충실한 표현이다. 찬란하다고 표현할 만큼 미적으로 우수한 세번째 성에서의 전투 장면은 직접 성을 지어서 불을 지르는 상태에서 찍었다고 하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대한 고집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여러 장면은 히데토라의 충복들이 죽어가는 찰나의 모습들인데, 히데토라의 고집이 자기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인다는 그 잔혹한 사실이 생생해서 특히 좋았다. 또한 근육질의 말들이 잘 드러나 무사의 이미지가 아주 잘 표현되었다. 이 영화는 인상적일 정도로 말들이 달리는 모습이 멋있다. 직접 말들을 길들이는 노력을 들여서 그런 것일까? 마술의 측면은 내가 잘 모르겠지만, 시각적으로는 확실히 훌륭했다.
호흡이 길기 때문에 참을성 없는 관객이라면 이 대작 앞에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은 루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말 그대로 대작 아닐런지. 그러한 지점도 비극적 성격과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잘 지키고 있다. 폭풍전야는 항상 고요한 법이니까. 사부로와 무사들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말 아래서 앉아있다가 군사들이 몰려오니 말 위로 재빠르게 올라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멋졌다. 군사의 멋지고 빛나는 순간만을 보여주지 않고 그 과정 자체의 많은 사소한 것들도 포착한다.
가장 좋은 장면은 광대를 죽이려는 무사가 히데토라의 활에 맞아 죽고, 히데토라가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노려보는 부분이었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버튼을 누르는 장면 같았다.

주제면으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절대비극이라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원작을 하도 옛날에 봐서 가뭇하긴 하지만 카에데와 스에라는 여성 캐릭터가 가미되며 영화 제목 ‘란‘이 모든 내용을 더욱 아우르게 되었다고 본다. 히데토라는 정말 불운한 인물로 나오고, 그의 예전 악행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일들은 그의 비극이 사필귀정임을 짐작하게 한다.
처음 나는 히데토라가 세 아들들에게 뭉쳐야 함을 가르칠 때, 사부로가 속된 말로 훼방꾼처럼 보였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정말 사부로가 한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히데토라가 해온 짓들, 그리고 아들들에게 보인 짓들은 화합과 단합을 가르칠 수 있는 언행들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약한 자들에게 해온 짓들, 후환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없애버리기 위해 한 잔악한 짓들이 잠복해 있다가 그를 덮쳤다. 아들들은 그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공격하는 법만을 안다. 애초에 히데토라가 그들에게 그것만을 가르쳤다.
며느리인 카에데와 스에는 시아버지 때문에 모든 가족을 잃은 인물들이다. 스에는 불심의 힘으로 증오를 극복해냈지만 카에데는 그 증오와 원한을 뿌리 깊게 가진 인물이다. 카에데 역할을 한 배우의 연기에 찬사를. 그녀가 묘사한 카에데는 행동거지부터 전형적인 일본의 고전적 여인상으로 마치 인형이 걸어다니는 것과 같이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내면의 광기를 폭발시키며 칼로 둘째 아들 지로를 위협하는 장면은 가히 전복적이다. 얼마나 많은 분노와 증오를 안에 꾹꾹 눌러담고 있었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끝에 잔혹하게 살해당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또다른 면이다. 원한감정을 잊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의 복수에 성공했다. 혹자는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철저히 그녀의 계산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히데토라는 그녀 아니더라도 결국 이러한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스스로가 지옥을 열어둔 사람이었고, 그저 자신이 서있는 곳이 지옥임을 너무나 뒤늦게 알게 된 것일 뿐.
스에와 그 오빠 츠루마루는 가련하고 불쌍한 주인공들이다. 카에데처럼 분노에 가득찬 인물들은 아니지만 한 명은 부처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현세의 고통들을 외면하였고, 다른 한 명은 히데토라에게 눈을 잃어 현세의 아픔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초라한 오두막에 갇혀 있는 팔자이다. 카에데는 스에의 목을 원하고, 스에는 그러한 위협을 피하려 하지만, 츠루마루는 스에가 준 피리를 찾는다. 부처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림 속에서 잠잠히 웃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 피리 하나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결국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스에는 자신을 돌봐준 나이 많은 하녀와 같이 죽고, 본인은 목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히데토라 본인의 비극,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가졌다가 자신의 아집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불행이 설령 자기 자신의 과오로 비롯되었다 해도 우리는 그 아픔에 대해 논할 수 없다. 그를 보며 괴로워하는 역할은 광대가 대신 맡아주고 있다. 흔들리는 돌 위에서 뛰어내려야 함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히데토라를 외면하지 못한 광대는 온갖 짜증을 내면서도 그를 주군이라 부르며 쫓는다. 이미 주종관계는 사라진지 오래인데, 광대가 그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연민 때문이다. 광대는 관객이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풍자적으로 논평하기도 하지만, 미칠 듯이 슬퍼한다. 그의 아픔은 히데토라를 보는 우리의 슬픔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맨 마지막, 절벽에서 헤매는 츠루마루의 모습이 비쳐질 때, 우리는 그 츠루마루가 광야에서 미친 듯이 헤매는 히데토라이며, 떨어진 부처의 그림이 펼쳐져 우리를 바라볼 때, 히데토라가 다시 우리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부처는 우리를 그렇게 멀리서 평안히 쳐다본다. ‘난‘을 사는 우리가 히데토라를 어리석은 인간이라 비웃을 수 있을까? 우리도 어쩌면 그처럼 우리가 저질러놓은 지난 날의 과오들이 어느 날 우리를 최종적으로 겨냥하여 그와 같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빠질지도 모른다. 그 때도 여전히 부처는 히데토라를 돕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돕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 변화라는 것은 ‘나‘라면 하지 않을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라고는 교과서에서나 마주하는 것이었지 내가 따로 읽는 것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돌고 돌아 끝없어 보이는 여러 번의 바퀴를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오니 이상스럽게도 시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나누는 이들의 애상이 눈에 밟힌다.
윤동주는 어쩌면 내가 요새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져서 그럴지 모른다. 겨우 백년 전 일인데, (우리는 일만년전의 과거까지 공부하고 있으니 백년이라 함은 정말 얼마 안 되는 한 줌의 시간 아닌가.) 그와 내가 조금만 시간의 조각이 맞아졌더라면 내가 그의 시간을 살았을 수도 있고 그가 나의 시간을 살았을 수도 있는 것인데, 우리는 정말 옷깃이라도 스쳤을 수도 있는데, 그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살았단 말인가?
기형도도 마찬가지다. 그의 글을 읽으며 믿을 수 없었던 점은 그의 글에서 시대를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기형도는 1960년 생으로 우리 부모님 뻘이다! 단지 29살에 죽어 박제가 된 탓에 백년 전 사람인 윤동주나 그나 내겐 별 차이 없는 문학인인 것일 뿐. 그 역시 어떤 마음으로 살았단 말인가?
왜 나는 과거를 산 그들의 마음을 읽으려 하는 것일까. 왜 나는 그들의 글을 알려고 하는 것일까.
왜 나는 굳이 그들의 글자락이라도 스쳐지나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참 솔직하지 못해서,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산다 해도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인들은 적어도 예술로는 참 솔직해서,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와 소통한다. 나는 영혼의 진실을 듣고, 위안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영혼의 진실이 다 같은 식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나와 결이 다른 윤동주로부터는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와 결이 비슷한 기형도에게는 연민과 공감이 생겼으니까.

1. 윤동주의 시집을 읽고

윤동주의 글을 읽노라면 한 번도 보지 못한 만주벌판의 허연 눈발과 극심한 추위만 떠오른다. 그곳에서 작은 집에 앉아 초롱불에 의지하고서는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로 훨훨한 존재론적 아픔을 글로 푼 소년이 보인다. 윤동주는 결국 끝까지 소년이었다. 그의 글에는 성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제거되어 차마 마주 보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만연하다. 그가 집중한 것은 욕망의 대상, 분노의 상대 같은 외면의 요소가 아니다. 그는 그것들을 통렬히 보려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보려 했다. 부끄럽고 괴로운 자기 안의 소리를 잘 들으려 했다. 내면의 소리를 그가 잘 들을 수 있던 이유는 그의 마음에 잡음이 많지 않고 깨끗해서이다. 순결함을 사람에게 감히 묘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례할 수도 있지만 그는 적어도 시적으로 그러한 사람이다. 잎새에 지는 작은 바람에도 괴로워 하는 그의 고통은 숭고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우러르게 된다. 벌판의 눈발과 같이 시퍼렇게 차가운 내면이 그에겐 지옥이 되어 만사 형벌과 같아도 그는 그것을 인간으로 태어나 당연히 지는 짐이라 생각하고 결연히 목덜미를 드러내며 예수,
와 같이 그곳에 서 궁극에는 잔학한 외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순연함을 지키다 비극적으로 죽었다.
그의 죽음에 경의를!
그의 시가 더욱 숭고하고 아름다워지는 이유는 그의 괴로움과 아픔이 가식이 아니라 진정이었음을 스스로 보인 까닭이다.

2. 기형도의 전집을 읽고

기형도는 반면 깨끗한 내면이 아니라 시궁창과 같아 괴로운 사람이다. 스물아홉에 죽었건만 그가 적은 글들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깊고 시커매 우리는 그의 글을 읽을 때 늪으로 초대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인으로 유명하지만 나는 그의 산문이 더 좋았다. 시인으로서 생경하면서도 아삭아삭 질감이 살아있는 표현이 냉소적이고 자학적인 이야기와 섞이니 그가 살아생전 얼마나 울적했을까 상상하기 쉬웠다.
그는 매번 울고 싶고 죽고 싶구나 생각하니 종로 심야극장에서 남은 삶을 홀연히 버리고 뇌졸중으로 죽었다. 그가 만약 살아 21세기를 보았다면 어떤 글이 나왔을까 궁금하다.
다른 어떤 글을 떠올릴 것 없이, 그의 시나 산문을 합친 전집을 보면 결국 우리는 그 모든 글의 조각조각들이 다 그라는 한 시커먼 영혼에서 누출된 어둠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가 좋은 이유는 그의 우울함엔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이다. 그는 명확히 직시하고 있고, 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우울함이 나와 소통할 수 있다. 그에게는 아픔이 많고 절망도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을 하진 않는다.
시와 관해서도 그러다. 참회록이라는 수필에서 이리 말한다.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문이다. 구원할 수 있다 혹은 없다의 구분은 이미 시에 기능이나 효용의 틀을 뒤집어씌운다. 따라서 어떠한 예술 장르가 최초에 성립되었을 때 본연적으로 갖는 기능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있음에 귀착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은 그 질문이 던져져야 하는 상황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 시가 구원으로서 군림해야 할 지금의 위치는? 그 설정 방향은?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따분하고 졸릴 뿐이다. 그런데 평자들이나 고고한 시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끌까지 물고늘어진다. 사회학, 철학, 심리학, 심지어 컴퓨터까지 동원하여. 시는 시다. 그리고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얘기하고 듣는다. 그리고 감동한다. 감동? 감동...˝ p331
그래, 시는 시다. 그는 청년이었다. 어느 정도 세속의 때에 물들여졌던 그는 결국 나름의 도를 깨닫고 죽은 것이다. 시는 시다. 우리는 가끔 다른 언어를 동원해 설명하지 못할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쉴 필요가 있다.

4. 요절한 이들에게 경배를. 그들이 더 살아 어떤 글을 적었을까 궁금해하지 말자. 이들은 지금도 살아있고, 나는 그들을 만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 차

 

I. 서론


II.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감각을 통한 물리적 범위 형성

2. 언어를 통한 사회적 위치 형성


III. 자아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1. 마음이 그려낸 세상 

2. 예술적 자아론


Ⅳ. 결론: 규정된 경계를 뚫고 나아가는 예술적 삶을 위하여


참고문헌 


Ⅰ. 서론


세상에 태어나 만난 가장 큰 인연은 누구인가? 필자는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이 누구인가 고민해보면, 나의 의지만 오롯한 진정한 주체도 아니요, 주변 요소들로만 이루어진 단순 합성물도 아니다. 나는 나의 의지와 외부의 지형이 만나 만들어졌다. 그러한 스스로를 바탕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니,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특별한 인연이지 않을까? 필자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자아(自我)’로 고정하여 이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만들어져 있지만 앞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수동적 운명을 따르지만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이 존재를 고찰해보고 싶다.

 

이 논문의 관심은 100년의 삶을 사는 인간이 자아를 떠날 수 없다는 전제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만들어져 있다. 그 사실을 통렬히 아는 것이 첫 번째 작업이다. 자아는 인생을 주재할 수 없다. 우리는 영원히 세상에 남을 수도 없고, 언젠가 죽어서 해체되어야만 한다. 그런 허무함이 순리다.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 우리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불교에서는 해탈을 주장한다. 모든 업력을 청정시켜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 사상의 큰 종착점 중 하나이다. 윤회의 업을 끊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철저한 없음이 우리가 언젠가 도래할 종착지라면, 우리의 삶은 지금 왜 이렇게 펼쳐져 있는가? 정녕 내가 사는 지금 이 삶에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인가? 이것들이 다 순간이고 가짜라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다 착각에 불과하단 말인가?

불교에 의하면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이 세상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연기론의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나누어진 실체는 가유(假有)다.[주석1]  하지만 우리의 일상 삶은 그러한 진리에 의거해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 사회는 자아라는 하나의 고정된 개체, 즉 헛된 의식을 상정해 작동한다. 우리는 그러한 분별의식을 필수 전제로 세상을 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우리가 육체와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함을 엿볼 수 있지만 우리 자체가 무한해질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한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으로서 ‘종적 환상’을 산다. 종적 환상[주석2]은 큰 그림에서 보면 미몽이지만, 우리의 작은 눈에서는 삶의 터전이다. 그 종적 환상이 우리를 인간으로 승인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인간이 되지 못한다.

 

어떤 정해진 절대 기준이 우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임의적으로 고정된 기준이 우리를 만들었음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허무의식에 빠졌다면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음으로 자신이 앞으로 스스로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의 기반이 허무지만 그것이 바로 예술적 자아가 갖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곧 인간을 만드는 것이며, 인간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즉, 만들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참된 해탈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지점은 자아가 물질적으로도, 사회적(혹은 관념적)으로도 제약받아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몇몇 사상을 살펴보면 물질과 정신을 이분한 상태에서 정신의 자유를 설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의 자아가 실상 양 측면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동서양의 여러 논의를 참고하여 그 점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다음 두 번째 지점에서는 자아의 능동적 측면을 이야기하려 한다. 첫 번째 지점에서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수동적 측면에 집중한 것과 반대된다. 자아라는 그 얼기설기한 화합물들이 한 발짝 전진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세계도 변화시키는 예술적, 창조적 주체라는 관점이 필자의 최종 결론이다.


Ⅱ.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감각을 통한 물리적 범위 형성

 

자아라는 말을 필자는 일종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받아들인다. 나는 누구인가? 이 말을 더 정확히 풀어쓰면 “나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이다. 앞의 ‘나는’의 나와 뒤의 ‘내’라는 나가 같은 존재인 것일까? 자기동일성을 지닌 나라는 주체는 누구인걸까? 아니, 그 주체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자아를 언제부터 나 자신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걸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 그 둘을 같은 것이나 혹은 적어도 유사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 논의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지는 자기 동일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동일성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이다.

 

필자는 자아가 스스로를 자각하고, 단 하나의 존재로 의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단계가 자아와 외부의 충돌이라고 본다.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경계의 설정이다. 경계는 외부와의 지속적인 충돌을 통해 정립된다. 무한히 펼쳐져 있고 평화롭게 겹쳐질 수 있다면 경계선이 생길 이유가 없다. 그러니 유한한 영역 안에서 충돌들은 자연스럽고, 그것을 감지하게 해주는 것이 우리의 감각이다. 그렇지만 감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감각은 금방 흘러가버리고, 현재에서 벗어나버리기 때문이다. 감각을 묶어내고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언어이다. 무차별적으로 발생하는 감각들을 의미에 따라 묶어내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그때 비로소 자아가 태어난다. 하지만 언어는 다음 항목에서 더 상세히 이야기를 하고, 이곳에서는 우선 감각만 논의하겠다.

 

감각은 외부 대상들의 존재를 자신에게 알려주는 지표이다. 또한 자신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준다. 자아가 누구인지를 질문하고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남들과 분리되어 있고, 그렇기에 남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필요성은 자신 아닌 다른 존재가 분명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감각은 인간이 자신과 자신 아닌 다른 것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자극들이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세상과 조우하는데 이때부터 감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심지어 엄마의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도 감각은 존재한다. 불교에서도 태아 때부터의 육체 형성을 인정하는데, 이를 이전 생의 업이 태아의 뱃속으로 수정된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이 단계에서 앞으로의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가 형성된다. 이 육입처(六入處)라 불리는 것들을 통해 현실화된 기관들은 삶에서 접촉(觸)을 낳고, 그 접촉은 느낌, 집착 등을 연속적으로 발생시킨다.3 불교에서는 이것이 무아를 깨닫지 못한 무명에서 비롯된 집착으로 설명한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는 해방되어야 할 윤회의 끈이다. 중요한 점은 신체 기관이 다른 것들과 만나는 일종의 입구 역할, 시작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업이 끊어지지 못하고 재생산된다. 그 입구에서 발생된 감각들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세계와 분리해내고, 나의 테두리가 어디까지인지인지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아집이 발생한다. 감각은 세상과 자신을 분별시킨다.

단지 불교철학에서만 감각과 자아의 발생을 연결짓지 않는다. 프로이트 역시 감각을 자아가 세계와 자신을 분리시키는 작업 중 하나로 보았다.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1956년 생)는 자신의 책에서 [주석4]프로이트의 저서 󰡔On Narcissism󰡕[주석5]에서 나온 빌헬름 부쉬(Wilhelm Busch)의 시 「발두인 발라민(Balduin Bahlamin)」중 한 행을 인용한다. “어금니의 좁다란 구멍 안에서만 영혼이 머물고 있는 것이다.(Einzig in der engen Höehle, des Bachenzahnes weilt die Seele)”[주석6]이다. 해당 구절이 나온 맥락은 버틀러가 후에 󰡔자아와 이드󰡕라는 글로 발전한 프로이트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글에서 프로이트는 육체의 고통이 육체적인 자아발견의 전제조건[주석7]이라고 밝힌다.


두 논의를 살펴보면 감각은 이중으로 설명된다. 불교에서 감각은 우리가 이전 생에 지은 업의 결과이며 다시 그 다음 업을 잇게 하는 연결고리이다.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경계 짓게 만들어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다소 부정적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일단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자아’로 키워내는 것이 감각이다. 극심한 분열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세상과 자아 사이의 경계지점을 나타내주는 필수요소이다. 자아가 다른 것들과 접촉할 수 있는 입구는 육체이고, 그 육체로 인한 감각이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접촉을 통해서 발생된 호오의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프로이트의 관점이 상통한다.

감각의 역할을 주로 살펴보았는데, 감각을 경험하는 방식과 그 대상에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사람들은 주로 시각에 의존해 세상의 다른 존재들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자신의 몸도 만져보고 탐구함으로써 육체를 체험한다.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신의 몸의 경계를 알게 된다. 그것의 기능과 작용을 파악한다. 기본적으로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어디까지가 팔부터 목, 다리부터 허벅지인지를 파악하게 만든다. 그 뿐 아니라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좋고,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아픈지도 알아낸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관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살핀다. 한마디로, 감각이라는 느낌 작용은 우리 자신의 테두리를 실험하고 시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총체적인 능력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도 확인하게 돕는다. 세상과의 분별 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도 측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육체적 고통이 생기면 우리의 온 신경이 집중한다. 이처럼 고통이라는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고통을 호소하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필사적인 관심을 쏟는다. 고통은 강렬한 감각으로써 그에 필적하는 관심과 집중을 요한다. 고통과 비슷하게 아주 인상적인 감각일수록 충격이 배가된다. 보통 강렬한 감각이 발생하는 이유는 자신을 이루는 경계가 이때껏 마주치지 못한 강한 힘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감각경험 중 보편적으로 강렬한 것이 단연 고통이다. 고통은 그 어떤 감각보다도 효율적으로 경계선을 느끼게 해준다. 불교에서 고통에 주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집으로 인해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느낀다고 하는 불교의 설명은, 우리가 자신의 경계선에 속박되어 있을 때라고 말한다. 유한한 자기 자신에 머무르면 우리는 제한되고, 제약받기에 끝없이 고통 받는다.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어떠한 강하고 압도적인 힘에 억눌려지거나 적어도 자신과 준하는 힘에 의한 저항을 통해 피곤할 정도의 긴장을 겪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향한 세계의 여지없는 폭력과 대면하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렇게 생긴 고통, 혹은 감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놀라운 진리는 이 세상이 명백히 자신의 뜻과 생각에서 어긋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자신은 분리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게 해준다. 우리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이다. 세계는 굳건할 뿐 아니라 강력해서 자아로 하여금 좌절을 맛보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부의 세계에는 우리를 능가하는 큰 힘이 작동한다. 자아로 하여금 자신의 힘이 미약함을 느끼게 한다. 구부려질 수 없는 그 힘 앞에 자아는 외부의 것과 자기 자신이 철저히 다르다는 이질성을, 그리고 자신의 약한 힘으로는 그 강한 힘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가져왔던 세상에 대한 의지를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통이다.

 

불교가 인간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가? 자신의 경계선이 지어질 때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것인 줄 알았던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세상이 우리를 내동댕이칠 때마다 우리는 고통을 경험한다. 강력한 감각들을 경험한다. 그것은 분열의 경험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탈을 한다면 자아의 경계선에서도 해방되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경계선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아라는 한 존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느끼는 사건이다. 그것은 존재의 아픔이며 실존적 고통이다. 존재가 세계라는 시공간 안에서 겪는 물리적 범위 설정의 문제이다. 그리고 감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2. 언어를 통한 사회적 위치 형성

 

그러나 이러한 감각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연속성이 필요하다. 동일성은 시간적 지속성을 요구한다. 이제 남은 하나의 것, 인간이 스스로에게 자기동일성을 부여하기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은 바로 언어다. 수많은 감각경험들이 인간으로서의 내가 가진 경험들이 되기 위해 단지 언어를 기다린다. 감각적 계기를 통해서 자신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고, 경계를 지어 범위를 설정했다면 이제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바로 해석과 공유, 분별을 위한 의미화이다. 이 의미화 작업을 통해 언어는 매순간 범위 지어진 한 개체를 묶어내어 인간 사회 안으로 진입시킨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작업은 바로 사회 안에서 살아나갈 자신을 규명하는 일이다. 자기가 이때껏 느껴온 자신을, 감각으로 범위 지어진 자신을 말로 풀어내고, 말에 빗대어 이해를 시키는 시도이다. 자신이 세계와 다르고,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고, 얼마나 다른 존재임을 피부로 느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한 감각은 모든 순간들에서 이루어진다. 생물학적 원리로 물질계에 현현된 존재들이라면 기초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다. 동물 중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개체가 아닌 종족 구성원으로 인식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순간에만 작용하지 않고 일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회적 근거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자아 설정의 작업이 가능할 인간의 생체적, 사회적 나이가 어느 때인지 생각해보면 아마 사춘기 때일 것이다. 여러 모로 자신의 몸 뿐 아니라 다른 세계들에 대한 경험도 어느 정도 쌓아둔 상황이고,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나이이기도 하다. 그것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언어의 습득 정도가 성숙해졌을 때이다. 물론 사람의 성숙도와 축적된 경험의 양에 따라 자아를 고민하는 문제가 더 이르게 찾아올 수도 있고, 더 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껏 스쳐지나간 경험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를 이용해서 규명하고 생각하는 작업, 자기 자신을 언어로 물어보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그 자아 형성의 순간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경계 짓게 만든다. 감각이 실존적이고 물리적인 세계 차원에서 경험적인 범위 설정을 하게 만든다면, 언어는 인간 사회의 구조 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설정하게 만든다. 이는 자아가 사회 속의 한 개체로서 안정성을 획득하도록 만든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허망한 언어에 우리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무명의 극치일지 모른다. 계속 변하며, 연결성에 의존한 존재를 하나의 위치로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언명은 인위적 고정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엄마’가 되기도, ‘아빠’가 되기도, ‘연인’이 되기도 한다. 그 이름에 해당하는 수많은 의무들이 이름을 따라온다. 그 단어를 차용해서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일이다. 사회로부터 발생한 언어에는 사회가 기대하는 수많은 의무와 제약조건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로 자신을 안전하게 위치 짓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고, 스스로가 안정화 되게끔 유도한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의무가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그 역할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대되는 것들에 스스로를 맞추어나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라는 인간 생태 안에서 일정한 위치에 안착하여 그에 따른 여러 명시적, 암묵적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사회에서 좋은 친구라 불리는 여러 덕목과 의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이름값을 잘 수행한 대가가 그로 하여금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사회 구성원이 되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각 자체는 어떻게 보면 자아 형성 의미를 주지 못한다. 감각은 휘발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언어로 이루어진 사회를 구성해서 만들어 나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휘발되는 감각들조차 가치와 연결되어야만 고정된다. 언어가 감각을 만나면 그 감각경험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그 부여된 의미에 따라 경험들이 분류가 가능해진다. 즉, 묶이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서 동일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자아는 그 동일한 것들 위에 정체성을 다지게 된다. 그 근본은 매우 가변적이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기원을 따지기보다는 현상적 측면에 기대어 살아간다. 무한함이 진리이지만 우리에게는 유한한 삶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이 비록 허상일지라도 마음 놓고 의존하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위험천만하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안전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후기철학에서 언어의 이러한 기능 및 역할을 논의한 바 있다. 특히 필자가 인상적으로 본 부분은 언어 혹은 언어게임이 본질적으로 공적이라는 점[주석8]과 관련해서이다. 언어 그 자체가 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적인 것을 말할 수 없다. 사적인 경험을 그 자체로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것은 사용될 수 없다. 아무리 표현해본들 수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라는 독자성을 언어화해서 정체성으로 삼을 수 없다. 어차피 공적인 언어가 개입하면 모든 사적인 것들은 파괴된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인 언어는 단순히 인간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정의 내리는 데 도울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 하여금 개별 언어의 특성과 그 언어가 쓰이는 맥락에 종속되게 만든다. 그 언어가 쓰이는 문화라는 배경이 우리의 자아를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보면 이해가 쉽다.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 한국어를 쓰며 한국 문화에 포섭되는 것을 보라. 한국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와 접하는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들은 한국어가 불러일으키는 모든 상(像)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상들이 바로 그를 그로 만들기 때문이다.

 

부연설명하자면 우리가 사적 경험으로 얻은 내적 감각이라 해도 그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인 언어로 인해 공적인 틀에 포섭된다. 애초에 의미가 그렇게 주어진다.[주석9] 그 의미는 우리가 자유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맥락에서 파생된다. 우리는 텍스트이며,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맥락이 우리를 사회라는 인간 공동체 안의 한 개인으로 인정한다. 언어를 통해 사회 안에서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이 작업이 다른 말로 사회화이다. 이 작업들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자아를 가진 한 인간이 태어난다.

 

Ⅱ. 자아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1. 마음이 그려낸 세상

앞에서 자아가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두 조건들을 고찰해보았다. 자아는 외부 환경과 사회 맥락에 의해서 특정하게 경계 지어진 존재이며 그 경계선을 따라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다. 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규정되어야 하고, 한계 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과 언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자아는 가변적이다. 제한적이고, 외부에 의존적이다. 우리의 자아는 무한한 활동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의 실상이 무한한 것과 별개이다. 우리라는 존재는 물질과 세계의 엄연한 장벽에 의해 가로막힌다. 또한 우리는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타인들에게 인식되고, 다시 자신도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언어라는 사회화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하나의 자아로 탄생한다. 스스로를 대상화시킨 자아는 이제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과 세계에 접속한다. 우리는 외부 맥락에서 끝없이 자아라는 경계선을 인식 받고 있는, 여러 한계를 통해 선이 그어진 존재들이다.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의미도 공급받지 못한다. 우리는 구성물이고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가장 재미난 이야기는 지금부터이다. 그 제작의 과정은 일회적이지 않다.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나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지각도 못한 채 계속 바뀌고 있다.

이때까지의 논의는 우리를 공포에 빠트릴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주체성과 일관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라는 정체성도 결국 내 손이 아닌 다른 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나는 그들의 영향력 속에서 항상 내 자신의 위치를 지정받고 있다. 얼마나 무기력한가? 얼마나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인가? 나란 없는가? 미래도 정해진 것인가? 아니, 모든 것이 짜인 시나리오에 불과한가?

 

여기서 다시 불교의 논의를 끌어올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오온의 인연화합물이라고 이야기한다.[주석10]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경계와 조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성물이라는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된 나라는 생각이 허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법이 있다는 믿음도 다 허상, 공(公)임을 아는 것이다. 즉, 법무(法無)이다.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열쇠가 그곳에서 비롯한다.

 

우선 자아를 만들어낸 기준들이 감각과 언어라는 가변적인 경계로 인함을 안다면, 그 경계를 지워내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그 작업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직면하려는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개체의 경계를 지워내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바로 무한의 마음, 공의 마음[주석11]이다. 모든 것은 사실상 거대하고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단 하나이다. 우리는 단지 그 중 조각내어 이어진 일시적 파편들이다. 그곳에서부터 우리의 여러 한계가 생성될 뿐, 우리를 이루는 진짜 정체는 단 하나의 일심(一心)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갖는 분별의식조차 사실은 이 일심, 거대한 심층 아뢰야식에서부터 나온다. 즉, 세계는 마음이 그려내는 거대하고 지속적인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에서 설명하는 아뢰야식의 작동 기제를 살펴볼 때, 아뢰야식이 일방적으로 세계에 관한 모든 상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이므로 근본적인 마음이 모든 현상을 그려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 그려내는 과정에서 그 구체적인 상은 의식이나 말나식의 활동인 현상세계의 업이 남긴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어지고, 다시 그 심어진 종자들이 기반인 아뢰야식에 떨어지고, 그 떨어진 것이 싹을 틔워 다시 현상으로 올라오는 구체적인 전개를 따른다.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주석12] 이것은 모든 것이 만들어진 과정들이 계속 순환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처럼 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심의 끊임없는 활동성을 이해한다면 왜 우리를 만들어낸 조건들이 가변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만큼 앞으로 우리가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구체적인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력의 중요성이다. 만약 우리가 여러 흐름에만 이끌린다면 우리가 심는 업조차 타성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아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변할 수 있다는 혹은 열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이때까지의 반복을 끊고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불교에서 해탈하기 위해 수행을 강조한다면, 필자는 그것을 진정한 주체성의 확보라고 이해한다. 여기에서의 주체성은 단순히 하나의 실체적 개체만을 상정하는 유아론적 아집을 전제로 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주체성은 무아라는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명확히 아는 작업은 자신이 연결된 하나의 망에서 어느 특정한 지점 위에 올라와져 영역 지워졌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신의 현재 지점, 위치, 경계선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즉, 자기 자신의 흐름과 역사를 아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읽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 공부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갑자기 어디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때까지 먼저 존재해온 많은 것들의 합임을 알게 된다. 그것을 향한 수행법 중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관(觀)이 일맥상통하는데, 자신에게 흐르는 모든 것들을 관한다는 의미는 자신과 관련한 모든 것을 살핀다는 자기배려[주석13]와 유사하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 작용과 우리 자아의 경계선을 잘 살필 때,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산물이며 우리를 지금 여기 있게 한 많은 것들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은 일심이 그려낸 무한한 그림이며 그 수많은 부분들은 서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 자아는 연결된 무한의 조각들 중 아주 임의적이고 우연한 곳에 놓인 존재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읽어야만 자신이 독자적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연결고리들이 수없이 얽혀져 표현되는 하나의 장(場)임을 알 수 있다.

 

그때서야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선 다른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특정한 텍스트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재배열, 재위치화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변이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만든다. 나는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내가 행하는 업이 다시 이 일심을 변화하게 만든다. 달라진 일심은 새로운 세계의 상을 그리고, 그 상이 다시 새로운 자아의 장을 형성한다. 이 세상은 이처럼 끝없이 창조되는 현재진행형 무대인 것이다.

 

2. 예술적 자아론

 

이 부분에서 한 번쯤, 세상을 다르게 만드는 능동적 작업 중 하나를 예시로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한 젠더 패러디 개념이 그러한 작업을 설명한다. 성소수자들은 젠더 개념 아래에서 패러디 작업을 시도했다. 이들의 패러디는 선행적으로 만들어진 경계 안에서 의미가 고착화된 언어를 자신만의 새로운 의도로 재사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활용을 통해 언어에 따라 고정되어 있던 정체성이 사실 특정 권력에 의해 생성된 경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석14] 많은 퀴어들(우리말로 성소수자들)은 처음에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질서에서 배제되는 정체성을 지녔다. 그들이 이성애자 남성/이성애자 여성으로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체계에서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며 여자와 자식을 낳는 존재이고,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며 남자와 자식을 낳는 존재였다. 이는 마치 상식처럼 여겨졌는데, 감각적으로 분별된 생물학적 차이와 언어로 규정된 남성과 여성의 이분 체계가 이를 공고히 했다. 그래서 그 구분 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비정상인들로 취급받았다. 영어 퀴어(queer)의 원뜻은 ‘이상한, 괴상한’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하지만 ‘퀴어’들은 곧 그러한 이분 체계의 틈을 노리게 된다. 여성이 남성 역할을, 남성이 여성 역할을 흉내 내는 식으로 패러디를 시도한다. 그러한 패러디의 충격은 곧 당연시된 경계로 보인 체계가 사실은 인위적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결국 기존의 이성애 중심 질서는 그 권위와 확실성을 도전받기에 이른다. ‘퀴어’라는 용어가 확장하여 중립적인 의미로 성소수자들 전반을 가리키게 된 것도 기존에 쓰이던 단어의 맥락이 다른 식으로 변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를 의미한다)라는 언어가 등장하여 성소수자들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들이 행한 저항이 얼마나 새로운 개념의 확장을 일구었는지 체감할 수 있다.

 

이처럼 기존에 만들어진 세상과 반대되는 그 무엇을 꿈꾸기 위해서는 저항을 해야 한다. 저항을 한다는 것은 먼저 기존의 자신을 억압하는 규칙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이곳에서 어떻게 낙인찍어져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형성하는 이 세계가 얼마나 위압적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주변 지형을 잘 알아야 한다. 푸코는 이것과 관련해 자기배려라는 윤리적 방법론을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면서 중요한 것은 세계와 인연을 끊고, 또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정확하게 세상에서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자신이 속해 있는 필연적인 체계를 헤아리는 것이다."[주석15]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야기한 패러디 기법의 근본적 성격은 무엇인가? 자신을 잘 안 다음에 비트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 과정을 통해 기존을 전복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뒤집을 때 확신하는 것은 그것을 뒤집는다 해도 모든 것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성애 중심주의가 아닌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할 때,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이고,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괴와 전복이 허용될 수 있다. 그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을 우려스럽게 만들 수 있기도 하고, 어쩌면 허탈하게 만들기도 한다.[주석16]

하지만 철저한 무, 혹은 공을 직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 해탈하고 열반에 가든가 아니면 이 세계에 남아 끝없이 세계 속 하나의 개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만들고, 우리의 파괴도 우리가 만든다. 이 세계를 우리의 마음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집중한다면 이 세상은 우리가 창조하고 만들어내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이러한 예술론이 우리로 하여금 드디어 자유로운 주체가 되도록 한다. 유희와 예술을 통해 모든 것이 무라는 니힐리즘 개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 니체가 이러한 사상의 대표주자이다.

 

니체는 예술이 진리보다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인간이 꾸는 종적 환상 너머를 응시한다. 우리의 삶은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꾸며낸 무수한 오류들에 영향 받는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인간적 왜곡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 자신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억누르는 힘들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그때서부터 적극적인 창조의 시대가 개막한다. 왜냐하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의 가치, 방향 모두 직접 자아가 스스로 창조하고 지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공과 허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맨쉬이다.[주석1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술론은 한편으로 윤리론이요 존재론이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만들어진 우리가 모든 것을 돌아보고 나면 인간이라는 가치조차 누군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푸코와 니체가 한 계보학적 작업의 의의가 그에 있다. 경로를 추적하면 신화화되었던 것들이 사실 역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모든 것들도 앞으로 변한다. 모든 언어적 개념과 물리적 경계로 빚어진 이 세상이 우리의 현재 행동에 따라 영향 받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나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냐 그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다른 존재들이 아닌 이 태도를 푸코는 일종의 현대적 태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에게서 현대성은 단지 현재에 대한 관계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정립해야 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자발적인 현대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금욕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의 흐름 속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복합적으로 공을 많이 들여서 세련되게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보들레르 시대의 표현을 따른다면 멋부리는 것dandysm이다.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구절들을 상세하게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천박하고, 저속하고, 비열한' 본성에 대한 구절들, 스스로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인 반항에 대한 구절들, 가장 끔찍한 종교보다 더 전체적으로 '열정 있고 교만하지 않은 제자들'에게 부과된 '우아한 교리'에 대한 구절들, 마지막으로 그의 신체, 그의 행위, 그의 감정과 정열, 그의 실존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댄디의 금욕주의에 관한 구절들 …… 보들레르에게서 현대인은 자기 자신, 자신의 비밀, 자신의 숨겨진 진실 따위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주석18] 현대성은 ‘인간을 자기 자신의 존재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현대성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생산하라는 과업을 떠맡는다."[주석19]

 

 

철학과 윤리가 예술의 창조성과 만날 때, 예술가들은 이제 단순히 특정 직업인으로 남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작업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의 방법적 표본이 된다. 푸코에게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1821년 생)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의 진실과 자유의 실행 사이를 오가는 힘겨운 상호작용[주석20]”, 그것이야말로 현재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자유로의 몸짓, 예술적 자아론이다.

Ⅳ. 결론: 규정된 경계를 뚫고 창조하는 예술적 삶을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우선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비록 아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 몰라도 자아는 감각으로 물리적 범위를 형성하고, 언어로 사회적 위치를 확립한다. 그렇게 해서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으로 기능하는 하나의 자아가 탄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우연한 존재이며 가변적이다. 불교에서 우리를 오온의 연기화합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진리를 더도 덜도 말고 표현한다. 얼기설기 붙여져 규정되고 제한되는 바가 바로 현재의 나를 만든다. 그렇게 규정된 경계는 인간이 적어도 사회 안에서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세는 안일하다.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소 괴롭더라도 우리의 인생이 공이며 가(假)임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를 이루는 경계성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일심으로부터 생성되며, 그 무한한 마음이 세계와 소통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방치하는 것, 나아가 이 세계를 방치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저 변하는 대로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면 그것은 자신을 배려하지도 않는 것이며, 세상을 배려하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그려내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창조적 행위가 다시 이 세상을 그려낸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가 자신의 위치에서 더 좋은 ‘나’와 ‘세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를 발견한다. 불교에서는 “신(信)이 깊어지면 지(智)가 깊어진다”[주석21]는 말을 한다. 자기 자신을 만든 규칙과 일심을 믿고 그에 소통하면 다시 자신을 만들어내는 규칙과 일심이 변화한다. 그 와중에 자아가 서있다.

허무함과 허상은 긍정해야 하는 것이지, 부정해봤자 자기기만이다. 물론 미약하고 연약한 자신의 어깨에 세상이라는 너무 무거운 짐이 올라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무거워 보이는 무한성을 그리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을 사랑하고 긍정하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이 가진 한계는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지만, 그 유한성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의 무한함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현세를 긍정하는 여러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세계를 어떻게 보냐에 따라 이곳은 극락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현세를 긍정하고자 한다면, 가장 바른 길, 즉 정도(正道)는 무엇일까? 자문자답하자면, 바로 인간이 속한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의 길을 충실히 걸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이때의 충실함이 무조건적인 ‘네’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반발심과 반항심에 차서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니요’만 외치는 것도 아니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낙타의 길도 아니고 사자의 길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몸짓은 어린아이처럼 가볍고 무용수처럼 즐거워야 한다. 자신이 가변적이고 우연한 고리 중 하나라고 해서 자신을 쓸모없는 무한 개 중 하나라 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존을 형벌처럼 받아들 필요도 없다. 끝없이 말하고, 춤추고, 이야기하고, 소통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가변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언제나 변화할 수 있음을 즐겁게 받아들이자. 지금의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것, 자기 자신을 행복에 다다르게 하고, 앞으로의 자기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계속 살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다. 창조는 무책임한 행위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살피지 않는 배려 없는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인 것을 알고, 자신의 기준을 세워 완벽히 자립하는 것이 창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면서 불행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동시에 행복한 삶을 살면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존재한다. 어떤 세상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그저 당신이 혼자가 아니며 당신과 이 모든 세상이 하나라는 것만 알면 된다. 그러면 당신이 그리고자 하는 세상을 향해 당신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규정된 경계를 뚫고 창조하는 예술적 삶의 본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Ⅴ. 참고문헌

김용준, 이유선, 황설중, 임건태, 이병철,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 아카넷, 2014.

박병철,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필로소픽, 2014.

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Butler, J. 김윤상 옮김,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

Butler, J.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Foucault, M. 정일준 편역,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새물결, 1999.

Foucault, M. 심세광 옮김, 󰡔주체의 해석학󰡕, 동문선, 2007.

단행본 꺽쇠 󰡔 󰡕

[주석]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51.

 

2.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p66. 이 책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일정한 공통성에 의해 갖는 종적 환상이라는 개념을 빌려왔다.

 

3.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61.

 

4.주디스 버틀러, 김윤상 옮김,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 p119

 

5.한국어 번역 제목은 나르시시즘에 관한 서론이다. 지그문드 프로이트, 윤회기 옮김, 무의식에 관하여, 열린책들, 1997 참고

 

6.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p475

 

7.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p120

 

8.박병철,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필로소픽, 2014, p208

 

9.박병철, 위의 책, p215

 

10.오온은 색수상행식으로 이루어진 인연화합의 축적물이다. 이 오온에 관련한 설명은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p32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참고가 가능하다. 여기서 대략적으로 요약을 하자면, 우리가 흔히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일하거나 결정된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임의적으로 만나 형성되었다는 무아론(無我論)의 원리라 할 수 있다.

 

11.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p27

 

12.한자경, 위의 책, p39

 

13.자기배려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년 생)가 자신의 후기 이론에서 윤리적인 삶의 방향을 모색하며 이야기한 개념이다.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 작업으로, 불교에서 하는 수행법인 관과 유사한 지점이 있어 언급하였다.

 

14.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p350

 

15.미셸 푸코, 심세광 옮김, 주체의 해석학, 동문선, 2007, p567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책에서는 이 부분을 푸코의 강의록 중 <타자들>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16.이성애중심 체계를 기반으로 한 결혼 제도, 가족 제도에 대한 회의가 바로 잇따를 수 있다

 

17.김용준, 이유선, 황설중, 임건태, 이병철 ,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 아카넷, 2014, pp231~233. ‘위버맨쉬는 흔히 초인으로 알려져 있다. 위 책은 로티 철학을 설명하는 책이지만, 미국 철학자 리차드 로티(1931년 생)가 어떻게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하는 부분에서 니체 철학을 잘 설명하는 부분이 나와 인용하였다.

 

18.밑줄은 필자가 본 논문과의 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첨가하였다.

 

19.미셸 푸코 외, 정일준 편역,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새물결, 1999, p190 본 책 중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한 부분이다.

 

20.미셸 푸코 외, 위의 책, p189

 

21.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민들레 Vol.104 - 2016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 엮음 / 민들레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정말 수준높은 교육잡지. 자랑스럽습니다. 이때껏 잡지 1년 구독을 신청해 본 바 없는데, 꼭 하고자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트겐슈타인 누구나 철학총서 2
박병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우연히 박병철의 비트겐슈타인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그냥 비트겐슈타인 인물 소개만 읽으려고 했는데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너무 재미있어서 약 270쪽의 책을 문학책 읽듯 읽어버렸다. 간만에 책 한 권을 훌쩍 떼어버려 모쪼록 즐거웠다. 기대했던 바대로 비트겐슈타인은 흥미로웠다. 시간이 되면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전기 철학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사실 많은 반감이 들었다. 물론 그 이야기가 갖는 의의는 매우 유의미하다. 사고에 매몰되어 자신들이 사용하는 도구인 언어의 성격도 잊었다는 점을 철학사 안에서 이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지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소위 그림이론이라 하여 세계와 언어가 대응된다는 논리 전반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한 체계를 바탕으로 문장(언어)를 하위요소까지 분석한 다음 참과 거짓을 가려내어 명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글에서는 어떻게 이 세상의 온갖 복잡다단한 다층적 요소들을 이렇게 단순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싶어 이 사상이 참으로 위험하다 생각할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자체보다는 그것이 악용될 만한 사례들이 걱정되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결국 자신의 이론 안에서 여러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이론을 수정, 비판하여 다른 이야기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저자의 책을 직접 보아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이야기이겠으나, 박병철 씨의 해제에 의존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후기가 그렇게까지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라는 직감을 받는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와 탐구를 같이 엮어서 출판해달라고 했다는데, 그 두 가지를 같이 보아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전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일반성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고 가족유사성을 제창하며 서양철학사에서 이론적 정초 작업을 시도하여 확보하려 한 객관성을 폐기한다. 그러한 습성은 유용하지 않고, 실제 생활의 다층적 차원을 반영하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나는 모든 다층우주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여러 차원에서는 여러 새로운 규칙들이 통용되고, 그 규칙들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유의미함은 그곳 안에 참여함으로써만 확보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사고야말로 사변적이거나 신학적이던 서양철학의 역사를 비로소 인간의 속세와 현세로 끌고 온 중요한 테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아무리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의 천재 호칭을 받았다 하나 나는 그조차 시대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의 철학은 체계적이고 군더더기가 없고 매끄럽다는 점에서 유용할 것이지만, 그 생각 자체는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전기 철학은 소개만으로도 칸트 철학과 엮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후기 철학에서는 개인적으로 니체와의 차이도 근본적으로 발견해 낼 수 없었으며, 모든 상황이 언어게임이라면 이는 곧 규칙을 정하는 담론과 권력의 문제이므로 푸코로서도 읽을 수 있고, 플라톤적 엘리트주의 정초작업을 거부하고 진리의 문제를 절대성이 아니라 맥락성과 삶의 현장에서 찾은 들뢰즈와도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결국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교육학과의 연결성도 느껴지고 (언어게임들의 규칙 설정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더 단단히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육이므로) 결국 모든 상황 속에서 화용론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한 언어라면 그것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삶에 쓸모가 되는 철학이므로 실용주의 철학에도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로티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직접 읽어보면 더 알 수 있겠지만, 요즘 들어 나의 생각을 미리 말해놓은 철학자들이 바로 이 실용주의의 계보를 가진 자들 아닌가 싶다.

  나에게 있어 푸코와 니체 식의 권력과 의지에 대한 탐구는 로티와 비트겐슈타인 식의 개별 상황에서의 유용성과 삶에서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합쳐져 앞으로의 개인들이 주체를 형성하는데 어떠한 식의 개방적이고 열린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사회와 공동체는 어떻게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고 분산시키며 자신들을 민주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야말로 핵심적 과제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