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공부 - 조선 왕은 왜 평생 배움을 놓지 않았을까
김준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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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가볍게 읽는 책이라 페이지 인용은 생략하였다.


1. 아이와 함께


아기를 키우며 열심히 공부하면 한 가지 단점이, 흐름이 끊긴다. 아기가 잘 있다가도 울기 때문에 달래주어야 한다.


소위 손을 탄 아기라서 아기띠에 메고 살짝 걸어다니면 금방 진정을 하는데, 그 와중에 아기에게도 조금 읽어줄까-그리고 공부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좋지 않을까- 싶어 군립도서관에서 여러 책 중 이 책을 빌렸다.


2. 조선시대는 참 흥미롭다


요새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영 방식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어 앞으로도 관련 책을 많이 읽게 될 것 같다.


3. 공부론, 공부방법에 대해서는 유학자들을 따라갈 수 없지 않을까


이 왕의 공부라는 책은 기본적으로 조선 시대 왕이 어떤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국 유학적 기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론이기도 하다. 여기서 왕이라는 단어를 자기 자신에게로 바꾼다면 우리 자신에게도 아주 많은 배울 점을 시사한다.


4. 감정, 호오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이유


(1) 왕은 감정을 제어해야 한다

(2) 좋아하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왕도 인간인지라 사적인 마음이 드는 것 자체는 어쩔 수가 없다. 감정이 나타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제나 분심을 다스려야 한다. 그리고 맑은 눈으로 스스로를 관찰해야 한다. 현재 우리 한국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모든 문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사람들이 마음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지금처럼 폭력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소리지를 수 없는데, 그것을 배우는 엄격함이 우리 사회에서 저물어버렸다.


우리는 형식적 엄격함, 엄정함을 "꼰대의식"으로 묻어버렸다. 물론 "꼰대"는 있으나, 이 사회는 극단적 치우침 때문에 중(中)을 찾는 미덕을 발휘하여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과 호오를 절제하라는 윗세대들의 가르침을 여과하여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온고지신이라 했는데, 감정을 발휘하지 말라고 옛날 선비들도 말한 적은 없다. 다만 그 적절한 방식을 찾으라고 했다. 우리는 그 적절한 방식에 대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5. 성의(誠意;뜻을 성실하게 세우라)의 중요성


우리 사회의 교육은 영혼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대안이 없어져 사회 공동체가 방향을 잃은 것과 같은 이치다.


과학적 지식으로서 영혼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영혼은 지향성, 방향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나침반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이냐를 자신이 정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따라야 하는 것은, 이 공동체, 이 사회, 이 환경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그 점찍힌 장소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이를 푸코가 잘 기술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유학자들이 말하는 격물치지의 논리와도 상통하지 않나 싶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만전을 기해야 하는데, 이때 이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은 행동 아니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성의를 "내가 배운 지식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라 하였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배웠다 한들, 당최 그것의 실천이 없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과연 옳은 말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경건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즉, 두려움을 간직하라는 것이다.


왜 두려움을 간직하느냐, 아무리 임금이 높다 한들, 또한 우리 현재 인간들의 인권이 높게 설정되어 우리 모두 스스로를 타인과 같은 위치에 둔다 한들, 이 자연만물 앞에 우리 인간이 보잘것 없음에 대한 상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 앞에서, 위기 앞에서, 풍전등화의 존재인데, 그리하여 그 수많은 비극들 앞에 봉착했을 때 같이 똘똘 뭉치기 위하여 다른 이들이 중요한 것인데, 자기 자신만 잘난 줄 알고 까불대니 두려움이 없어서 무슨 일이든 성의 있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절실하게 해야 하는 것, 나도 절실하게 공부한다. 그리고 매사 두려움의 마음을 갖는다. 항상 낮추어야 할 필요성을 간직하고자 한다.


6. 왕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 경연(經筵)의 중요성; 공부할 때 때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훌륭한 인재들을 가까이 해야 할 필요성


조선시대에서 경연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임금에게 요구되는 학문 수양, 정심(正心)과 성의를 위해서는 끝없는 채찍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왕이 지속되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을 조선시대의 신하들은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경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신하들은 꼭 간언하는 말을 하였다.


만약 책에서의 이 부분을 짧게 줄여본다면,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격식이라는 말이다.


 때와 장소가 안 정해져 있으면 금방 게을러지고 시간이 분방해진다. 훌륭한 신하들이 옆에 모여 같이 질의응답을 하는 것은,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열심히 토론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성현의 옛 가르침을 남의 입을 통해 다시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공부의 길이었던 것이다.


6. 조선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파레지아(이른바 간언諫言, 솔직한 말하기)가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부족한 미덕; 혹은 그 미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질되었을 수도


왕의 주요 자질 중 하나를 이 책에서는 경청이라 이야기하는데, 경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옳은 말을 해주는 자들이다.


나는 일찍이 석사 논문에서 푸코가 중요하게 다루었던 파레지아라는 그리스 시대의 관습을 통해 민주주의를 고찰하였는데, 비록 조선시대는 당연히 민주정은 아니었으나 왕과 신하 사이에서 옳은 통치 방향성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옳은 말을 듣고 뱉을 수 있는 용기였다는 것은, 푸코 본인도 동서양의 여러 케이스들을 빗대어 인용한 바 있으니 모든 고전에서 왕정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다룬 미덕이 바로 이 간언과 경청의 자세일 것이다.


나는 이 경청과 간언에 관한 부분을 보며 현재 우리 사회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학계에서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릴 뿐, 대중들에게 일거의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일리가 있는 것이, 현재의 소위 지식인들, 배운 자들, 지식을 연구하는 자들은 옛날 유학자들과는 마인드셋팅부터 다르다. 그들에게는 "이끌어간다" 혹은 공동체의 더 나음을 위해 "당연히 희생한다"는 정신이 없다. 그들에게는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지식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고, 그 위치에서 더 나아가 간언을 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일면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수많은 대중들의 공격이 따갑고, 그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날 유학자들이라도 용기를 내는 신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이 책에서도 말하듯, 좋은 군주가 있을 때는 용기를 내는 신하가 많아지지만 연산군과 같은 포악한 군주가 있을 때는 신하들이 모두 간신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왕정이 아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일궈낸 사회는 연산군과 같은 포악한 군주가 다스리는 사회와 다를 바가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가 대체 어떤 면에서 왕정보다 낫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사실 노예의 길을 쓴 (내가 최근 노예의 길을 띄엄띄엄 읽고 있다) 하이에크에게서도 발견되는 질문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부정하진 않는다. (마치 차선을 선택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가 어떤 절대 지상 목표가 아님을 이야기하는데, 나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지식인들이든 아니면 소위 "이끌어나가는 층"에서 옛날 조선시대 지식인들만큼도 못한 면을 발견한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패배하고 더 이상 사회가 교육을 숭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가 과연 촌스러운 왕정, 군주정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술술 읽히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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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글에서 다루는 주요 결론을 미리 요약 제시

(ㄱ) 리버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누칼협을 들이댈 정도로 인간은 자유롭지만은 않다

(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젠더차별과 갈등, 낮은 출산율, 자살을 둘러싼 모든 현상이 바로 생명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써본다.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되는 사회"

아래는 푸코의 원문에 대한 해석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에 대한 나의 단순 비판을 섞은 좀 더 나아간 요약

=> 인간 자본화된 생산의 문제에서 성공하지 못한 경제적 인간이 성공적인 인간 자본을 낳을 수는 없다는 계산 > 낮은 출산율

=> 비생산적, 고립되고 단절된 인간들에 대한 안전 방편 없음 > 노인 자살율

=> 기존 보통 여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가정을 돌보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불리한 입장. 신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에 목표 지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것을 주문받고 있음. 그래서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남성에 비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약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사회적 끈도 덜 약화되어 있음 (특히 자식-아기로서 남성보다 더 선호받는다는 현상에 주목) > 제약이 많음

=> 기존 보통 남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경제적 가장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 편입되어 가장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변모, 그에 따라 고립 의식도 강화되며, 그에 따라 제2차 인간 생산의 안정성이 옛날만큼 따라와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차별의식 주장 > 고립이 쉽게 됨

이 중 보통 남성과 여성은 서로 제약과 고립이 따로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일어나기도 함. 제약이나 고립이라는 단어는 일반적 경향성에 대한 나의 짐작임.


1. 이 글을 쓰게 된 배경

2022년 막바지, 나는 이번 년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인 화제의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누칼협 (누가 너보고 네가 하는 일을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이었다는 말을 듣고 소름이 쫙 돋았다. 이미 한 두 해전인가-신자유주의가 승리하여 이 땅에 도래한지 이미 오래라는 글을 쓴 당사자임에도, 아니 어쩌면 이렇게나 신자유주의적인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 대유행이 될 지경이 온 것인가-놀랍기도 하고 우려스럽기도 하고.

이러한 리버럴적 정신이 만연한 사회를 살아가며, 이미 70년대에 2022년의 대한민국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푸코의 "생명정치의 탄생"을 일독하는 것만큼 값어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2. 내가 읽은 텍스트

생명정치의 탄생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8-79

© Editions du SeuiVGallimard 2004, Edition estabLished under the direction of Franl;ois EwaLd and ALessandro Fontana, by Michel SeneLlart. TransLation © Graham Burchell, 2008.

이라는 영어 판본으로 읽었다.

언젠가는 불어를 꼭 구사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혼자서 스리슬쩍 해본다.


3. 글의 구성에 대한 미리 알림

글의 구성은 푸코의 글들에서 내가 밑줄 쳐놓은 것들부터 하나하나씩 가볍게(?) 둘러보도록 한다. 영어는 모두 인용이다.


4. 정치경제학, 정치-경제 간의 관계

16쪽에서 푸코는 "political economy"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Finally, the last point explaining how and why political economy was able to appear as the first form of this new self-limiting governmental ratio is that if there is a nature specific to the objects and operations of governmentality, ... In other words, there will be either success or failure; success or failure, rather than legitimacy or illegitimacy, now become the criteria of governmental action. So, success replaces [legitimacy].*

정치경제학이 중요한 이유는 통치성의 문제에서 이전까지는 정치적인 정당성, 소위 무협이나 중국역사에서나 많이 볼 법한 '명분'과 같은 문제보다는 정치 공동체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일련의 일들이 성공을 거두었느냐 실패를 하였느냐는 문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효율성의 극한을 추구한다는 경제적인 문장이 현재 정치와 사회 전반에서 그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양태를 미리 예견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20쪽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Politics and the economy are not things that exist, or errors, or illusions, or ideologies. They are things that do not exist and yet which are inscribed in reality and fall under a regime of truth dividing the true and the false.

...

At this moment he has laid down clearly the principle of the self-limitation of governmental reason. But what does "the self-limitation of governmental reason" mean? What is this new type of rationality -in the art of government, this new type of calculation that consists in saying and telling government: I accept, wish, plan, and calculate that all this shquld be left alone? I think that this is broadly what is called "liberalism."*

정치와 경제라는 것은, 푸코가 이 책 3쪽에서 언급한 광기의 문제처럼,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참과 거짓을 가르는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무엇이다. 나는 이 부분이 시사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해진 팩트, 바꿀 수 없는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그것을 통치하는 기반 방식인 통치성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동시에 그 개입하는 정치와 경제의 내용을 다시 인간들이 변용하고 간섭하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푸코가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소위 리버럴리즘,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국가는 국가의 작동에 자기 제어를 가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이것이 푸코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버전의 국가가 작동하는 통치성이기도 하다.

31쪽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In the middle of the eighteenth century the i market no longer appeared as, or rather no longer had to be a site of jurisdiction. On the one hand, the market appeared as something that obeyed and had to obey "natural,"*

... they permit the formation of a certain price that Boisguilbert3 will call the "natural" price, the physiocrats will call the "good price,"4 and that williater be called the "normal price,"

가격에 대해서도 “natural, good, normal”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면서 마치 어떤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어느 정도에 다다라야만 기준치를 충족하고 정상이 된다는 인식, 즉, 시장의 자연성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이에 따라 마켓이 진실을 다루는 장소가 된 것이다.


5. 자유주의-리버럴-는 정말 자유를 담보하는가. 누칼협은 과연 온전히 맞는 말인가.

63쪽과 64쪽에서 각각 푸코는 다음과 같이 아주 중요한 구절을 남긴다.

If I employ the world "liberal,"...

it is a consumer of freedom. It is a consumer of freedom inasmuch as it can only function insofar as a number of freedoms actually exist: freedom ofthe market, freedom to buy and sell, the free exercise of property rights, freedom of discussion, possible freedom of expression, and so on. The new governmental reason needs freedom.

Therefore, new art of government consumes freedom. It consumes freedom, which means that it must produce it. It must produce it, it must organize it. The new art of government therefore appears as the management of freedom, not in the sense of the imperative: "be free," with the immediate contradiction that this imperative may contain. The formula of liberalism is not "be free." Liberalism formulates simply the following: I am going to produce what you need to be free. I am going to see to it that you are free to be free.

64

Liberalism must produce freedom, but this very act entails the establisllment· of limitations, controls, forms of coercion, and obligations relying on threats, etcetera.

푸코는 자유주의, 리버럴에 대한 환상을 까발린다. 나는 위의 부분이 "누칼협"이라는 요새의 단어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칼협"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상정한다.

너가 무슨 일을 하든 너의 자유였고, 지금도 그 일을 하든 말든 너의 자유인데, 왜 너는 이걸 마치 네가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처럼 억울해하는 거니?

만약 푸코의 비판을 "누칼협"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지금 자유라고 생각하는 이 사회는 단순히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소비자이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유 그 자체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들을 리버럴 사회에서 누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푸코가 언급한 것처럼 시장의 자유, 사고 팔 자유, 개인 사유권의 자유로운 행위, 토론의 자유, 가능한 표현의 자유 등의 여러 가지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얼마냐 이 사회에 존재하냐에 따라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운 소비자인 것이다.

푸코는 이 시점에서 이미 마르크스의 시대 분석을 뛰어넘었다.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그곳에서 촉발된 많은 담론들은 이미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촌스러운 빨갱이 사상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빨갱이 자체보다 문제적인 것이 "촌스럽다"는 인식이다. 계급 투쟁과 계급 의식의 공격성과 고루함, 올드하고 반시대적인 이미지가 이번 화물연대의 시위를 무너뜨린 한 가지 중요한 토대이지 않았을가.

아무튼, 푸코는 명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계급상의 투쟁이 더 이상의 우리 사회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본 듯 하다. 오히려 권력은 그가 말한 것처럼 미시적으로, 더욱 촘촘하고, 더욱 개별적으로 들어간다. 어찌 보면 이 시대의 권력과 담론들, 통치성은 "포스트모던"적으로 행위한다. 미시권력적 차원으로 우리 삶의 차원에 들어간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유행 단어를 빌어보자면, 이제 우리 모두는 어떠한 “장”에 속하여 있다. 푸코는 이 시대의 개별자들이 그 장의 원리원칙을 삶의 근거로 삼아야만 우리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개별 주체자로서 자유를 추구하게 될 것임을 예견해냈다.

푸코의 말처럼, 리버럴리즘의 체제 아래에서 자유란 것은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것이지, 자유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면 "누칼협"도 사실상 딱 들어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 순수한 자유의 개별의지로 내가 지금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때의 이 자유란 것도 “리버럴리스트들의 자유”에 불과한 것이다.


(반론)

그러나 여기서 그럼 우리에게 자유란 없는 것인가? 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 푸코는 자신에게 구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일 것을 완강히 거부하다 죽은 듯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장이든, 그 장이 여러 가지이든 하나이든, 어쨌든 그 장에 속하는 순간, 우리 인간의 개별 의지와 개별 자유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리버럴리즘의 체제든, 인간 운명에 우리가 종속되는 것이든,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이 윤리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선악조차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면 인간의 윤리적 선택들에서 우리 자신은 그저 자유롭지 못한 노예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법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자유롭지 못한 노예 인간을 대체 무슨 명목으로 처벌/교화할 것이란 말인가?

존재론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근본적으로 애초에 자유든 어떤 것이든 어떤 개념(이데아)에 대응하는 완벽한 실물적 존재가 존재는 하는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인간 사회가 만들어내는 경험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만 존재하는 것이냐?

아마 맨 마지막 질문에 푸코는 이데아는 없고 이 사회의 모든 관념들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정확한 구조들의 이해가 아닌 불명확성을 기반으로 한 이해를 끝까지 상정하겠다면서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자신의 대답을 내놓을 듯 하다.

그러나 또 한 번 생각할 것은, 푸코는 자기 자신을 구조주의자나 심지어는 후기 구조주의자라고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던 듯 싶다. 외려 자신을 역사적인 분석을 사용한 역사학자/계보학이라는 니체의 방법을 사용한 계보학자 정도로 생각한 듯 한데, 후기 구조주의가 암시하는 불분명성은 다른 학계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반감을 사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한 모호함, 우리에게 자유가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를 푸코가 계속 후기 철학에서 알아내고 발견하려 하였으며 그 뒤에 나오는 자기배려나 파레시아, 주체에 대한 문제가 자기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는데, 본인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뚝 끊겨버린 듯한... 그런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지금 이 글에서 밝혀두고 싶다.

읽으면서 참고한 위키피디아 두 항목.

https://en.wikipedia.org/wiki/Post-structuralism


6. 경제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 사회의 주문-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된다

푸코는 66쪽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First, we can say that the motto of liberalism is: "Live dangerously." "Live dangerously,"

...they are conditioned to experience their situation, their life, their present, and their future as containing danger. I think this kind of stimulus of danger will be one of the major implications of liberalism.

리버럴 자유주의는 흥미롭게도 삶을 더 위험하게, 더 리스크를 걸도록 주문한다.

174쪽에서 나오는 부분과 연관지어 보도록 하겠다.

Concretely, in this liberal society in which the true economic subject is not the man of exchange, the consumer or producer, but the enterprise, in this economic and·social regime in which the enterprise is not just an institution

but a way of behaving in the economie field in the form of competition in terms of plans and projects, and with objectives, tactics, and so forth-you can see that the more the law in this enterprise society allows individuals the possibility of behaving as they wish in the form offree enterprise, and the greater the development of multiple and dynamic forms typical ofthis "enterprise" unit, then at the same time so the number and size of the surfaces of friction between these different units will increase and occasions of conflict and litigation multiply.

나는 우리가 리스크를 걸어야 하는 것-하면 최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투기에 빠져들었던 사회적 순간이 기억난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자신들의 돈을 걸었고, 일확천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게 비트코인 광풍이 벌기도 했었다. 리버럴 자유주의 안에서 우리는 푸코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 단순한 소비자나 생산자가 아니다. 우리는 enterprise 하나의 사업체이다. 마침 자영업 비율이 높은 대한민국 사회와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표현 아닌가? 우리는 경쟁이라는 비자연적 (경쟁이 비자연적이라고 푸코가 120쪽에서 말한 부분이 있다) 요소 안에서 충실하게 자유주의적 사업체가 되어 이 모든 "비즈니스 관계"를 훌륭하게, 그러면서 self-limited 자기제한적인 요소로 관리해주는 "법칙 rule of law"에 의존하는 게임 플레이어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 Enterprise에 대한 개념이야말로 이제 더 이상 소위 옛 맑시즘이 완벽하게 설명해내주지 못하는, 인간들이 단순히 계급 투쟁을 할 정도로 계급화하거나 사회화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기업체 수준으로 바라보며 리버럴 사회 안에서의 정치 경제학적 질서를 재생산해내고 활동하는 주역이 된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푸코의 글 226쪽에서 그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 분석 중 하나를 소개해보고 싶다.

In neo-liberalism-and it does not hide this; it proclaims it-there is also a theory of homo oeconomicus, but he is not at all a partner of exchange. Homo oeconomicus is an entrepreneur, an entrepreneur of himself. This is true to the extent that, in practice, the stake in all liberal_analyses is the replacement every time of homo reconomicus as partner of exchange with a homo oeconomicus as entrepreneur of himself, being for himself his own capital, being for himself his own producer, being for himselfthe squrce of [his] earnings.

Homo oeconomicus, 즉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는 푸코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존 스튜어트 밀이 정치경제학 이야기하면서 나왔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잠깐 차치하고, 푸코가 경제적 인간을 일컫는 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인간 개별들이 enterprise가 되는 현상과 동급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 우리는 리버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모두 경제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biopolitics 생명정치의 문제에서 바로 젠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젠더 갈등이 심화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인간은 바로 생명을 낳고 관리한다는 그 지점과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코도 228쪽에서 바로 유전자 공학으로 인간 조작하는 것 따위의 상상을 언급은 한다. 자신도 SF적 상상이라고 겸연쩍어 하는 듯 하지만, (글의 맥락은 70년대다!!) 특히 대한민국의 낮은 출산율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전혀 웃을 이야기가 아니다.

228쪽 원문을 공유해보겠다.

a child whose human capital,

understood simply-in terms of innate and hereditary elements, is high, you can see that you will have to make an investment, that is to say,

you will have to have worked enough, to have sufficient income, and to have a social status such that it will enable you to take for a spouse or coproducer of this future human capital, someone who has significant human capital themselves.

우리가 경제적 인간이라 함은, 바로 우리가 낳는 또 하나의 인간, 우리가 생산해내는 또 하나의 인간이 바로 인간 자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연히 아이는 투자해야 할 무엇이 된다.

그런데 만약 자기 자신이 투자할 만한 훌륭한 인간이 아니라면? 내가 훌륭한 경제적 기업체가 아니라면? 내가 또 다른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러한 "자격"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제 인간 생산은 단순한 경제적 생산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살아나갈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가치까지 허락받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 양심에 손을 얹고 보면, 가난한 사람은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된다는 수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도처에 있지 않는가. 가난해도 덮어놓고 애를 낳았던 옛날 시대와는 천지차이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245, 246쪽에서 푸코는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Well, it is that this contract between spouses enables them to avoid constantly renegotiating at every moment the innumerable contracts which would have to be made in order for domestic life to function." Pass me the salt; I will give you the pepper." This type of negotiation is resolved, as it were, by a long-term contract, which is the marriage contract itself, which enables what the neo-liberals call-and I think they are not the only ones to call it this moreover-an economy to be made at the level of transaction costs.

결혼생활은 불필요한 합의의 과정들을 다 생략해줌으로써 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윤을 막대하게 하는 사업체 간의 합의가 된다. 물론 이 이야기들도 옛날의 결혼 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일 수 있긴 하지만, 특히 개개인이 경제적 인간이 된 요즘 시대에 빗대어 보면, 결혼은 손해다 그래서 할 필요가 없다, 혹은 결혼을 하려면 아예 동등한 합의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때 동등하다는 것은 서로 간의 소득 수준, 공평한 반대반의 소비 구조, 같은 속칭 계급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혼의 난이도 상승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신자유주의 주체화에 가장 열심인 젊은 남성들에게 동거 등 여러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한 채 그들의 독립/고독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모두 경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 안에서 기존 보통 남성들은 이때까지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사회 안에서 자기 몫을 해야 한다 (바깥 양반)라는 굉장히 전통적인 가치에 따라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어정어정 기어들어가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신자유주의 안에서 경제성의 극단적 추구와 그들이 이야기하는 rationality 이성은 인간 하나하나에게 기업체 수준의 자율성을 강요하고, 그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의 남성들에게 독립, 주체성, 자율성을 문화적으로 중요시 여겼던 점들은 한편 독이 되어 돌아와 그들이 가장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변모되었음에도 그에 따라 전통사회의 기존 가치들-가족이나 사회적 측면-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립에서 취약해진다. 그들은 소외되지는 않는다. 돈이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젊은 몸뚱이가 있는 한 아직은 소외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고립될 뿐이다. 연대의 필요성을 딱히 느낄 필요도 없지만 기회도 많지 않다. 그리하여,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결혼, 짝을 만나지 못한다는 불평등함이 강하게 제기된다.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마가렛 대처가 한 그 유명한 말을 생각해보라. 그녀는 사회도 없고 국가도 없고 단지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이 결혼해 사는 가정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아래는 그녀가 한 말

There is no such thing!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there are families and no government can do anything except through people and people look to themselves first.

그런데 지금 보라, 결혼을 안 하니 가정도 없다! 신자유주의적 주체에게는 사실 나라는 경제적 인간과 그 성공한 경제적 인간이 낳을 수 있는 제2세의 홈그라운드인 가정까지는 필요한데, 그것까지 못 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도 국가도 없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라고 인간의 사회성이 아예 말살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충족시켜 줄 가장 최소의 사회기준인 가정이 없으니 그들은 독립/고립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거 문화가 발달한 것도 아니니 신자유주의적 주체라 할지라도 혼자인 상태로 남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한다고 해서 안전한 가정이 존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우리나라의 기록을 살펴보면 연세 드신 노인들이 가장 많이 죽는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적응을 못하거나 패배한 것이지, 어렸을 때부터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도 대부분 전통 사회 질서에 순응을 하고 타협을 하여서 결혼 정도는 했을 텐데, 여전히 단절되었음을 호소한다. 즉, 우리에게 이제 가정/전통문화 질서란 옛날만큼 강한 울타리의 작용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기사를 한 줄 요약. 왜 노인들이 자살을 생각하느냐. 딱 세 가지 문제이다. 돈 없어서, 아파서, 가족과 단절되어서.)

이때 웃긴 건, 나는 다른 하나의 이상한 현상을 스스로 관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존 보통 여성들의 위치이다. 기존 보통 여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가정을 돌보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불리한 입장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애 낳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취직하기가 힘들거나 회사 들어가도 버티기가 힘들다는 그 이야기, 모두가 알고 들어본 그 이야기가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적 인간으로서 경쟁에서 불리한 여성의 위치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하여 요새 많은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에 목표 지점을 둔다. 즉, 결혼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평이한 이야기인데, 나는 이번에 임신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아주 이상한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한때는 남성 선호 사상이었다지만, 요새는 아이를 낳을 때 부모가 딸을 낳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저 그냥 딸이 귀여워서 그런가보다 정도였는데, 이번에 나도 딸을 임신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주변이나 사회적 인식에 대해 챙기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요새는 딸을 더 마음 속으로 선호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들이나 딸이나 크게 상관은 없을 텐데, 왜 그런 걸까? 보통 사람들은 딸이 더 귀여워서, 키우기 쉬워서, 나중에 엄마인 나랑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아들보다는 나를 더 챙겨줄 것 같아서-라는 대답으로 귀결되는데, 이를 찬찬히 살펴보니...

결국 딸한테 이때까지의 전통 사상에서 아들들에게 요구되었던, 가정을 지키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 그러한 전통 사상적 측면들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딸을 낳는다 해도 그 딸이 아이를 낳을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나의 가정이 더욱 '원활하게 혹은 오순도순하게, 즉, 조금 옛날 전통문화적 가족 같이' 유지될 확률이 딸을 통해 더 보장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설령 여자가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자식 노릇을 한다는, 계속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것을 주문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점에서 살펴보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남성에 비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약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사회적 끈도 덜 약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좋은 것이냐, 그것은 아무도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20대 자살을 살펴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2배 이상 많이 죽지만 여자들의 자살 시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보다 높다는 기사를 확인했다.

이 기사와 내 개인적 생각을 말미암아 생각해보면, 젊은 여성들은 발이 이곳저곳 묶이고 제약이 많아서 우울감을 많이 느끼는 것이고, 젊은 남성들의 경우 혹시라도 신자유주의 사회에 적응이 실패하면 고립된 상태에서 바로 자신의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마음 아픈 추측이 든다.

즉,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겠다.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되는 지금 우리의 사회. 그게 지금 우리 사회 아닐까나.


7. 남아 있는 논의-시민 사회의 역할

푸코는 296쪽에서 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두 가지 요소가 하나 경제적 인간, 다른 하나가 바로 시민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시민 사회를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미시권력이 미칠 수 있는 장의 범위라고 보는 것 같은데, 내가 사실 이 후반부는 조금 힘이 딸려서 이해가 부족한 듯 하다.

그리하여 이 책의 정리를 끝내고 다음에는 바로 이 책의 논의들과 관련된 다른 2차 논문들, 글들을 찾아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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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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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라톤의 변론을 읽었다. 옛날 학부 시절에 한글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때 나의 인상은, 참 소크라테스가 비호감이다- 그 자의 변론이 계속 되면 될수록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고 죽어라 쪽에 표를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멋대로 생각해본다. 이런저런 정황을 똑바로 파악하라면 그 시절의 사회상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 정도가 아니라서 짐작해 볼 뿐이다.



2.

옛날에는 플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를 보며 오만한 노친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후반부쯤 눈물이 나더라. 아마 나이가 들어서 자신의 진실을 사수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이 속삭이는 소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선택인지를 체감할 수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십년 전에는 소크라테스가 노년이니 죽는 것을 생각보다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몇 살이 되어도 인간이 죽음 앞에 무력하다는 사실을 더 이해하게 되니, 소크라테스의 선택이 단순히 노인의 마감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플라톤 본인이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그려냈는가, "진실한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었을까는 어차피 답할 수 없는 것이니 남겨두고, 제자가 그린 스승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며 질문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철학자"인가, 아니면 “신의 사도"인가?

미셸 푸코는 그를 진정한 “파레시아스트"의 사례 중 하나라고 규정한 바 있다.


왜 그는 그의 “진실"을 사수해야 했던 것일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것도 신에게서 부여받은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종교인가, 철학인가?

이것은 윤리인가, 욕망인가?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철학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하는 행위가 "철학"인가? 철학은 진실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어원을 그리스어로 갖고 있다고 하는데, 대체 "진실"이 무엇인가?



3.

심지어 소크라테스 본인도 고발된 내용이 공동체의 젊은이들을 현혹시키고 신이 아닌 다른 것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고발된 것이 아닌가.


즉, 그의 "진실"이 타인의 "진실"과 다를 때, 우리는 무엇을 판별기준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4.

대체 소크라테스가 자기말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했다 못했다의 그 기준을 삼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신으로부터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두루 만나며 시험을 해보았다.

그 결과로 얻어낸 것은 인간은 모두 무지한데 자신만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철학일 수 있단 말인가?

종교와 거리가 멀어진 현대인들은 사실 이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마음에 깃든 신의 신탁을 스스로 "해석"해내어 그것이 "진실"임을 그 누구보다도 "믿음"을 가졌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현실이 되고, 탄압을 받았을 때 그는 "진실을 사랑한 철학자"로 기록되고 기억된다.



5.

만약 나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참과 거짓을 판별한 기준이 무한히 상대적인 것이라면,

절대적인 것이 없다면,

결국 수많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은 잣대와 기준과 권력과 힘이라는 조건들로 구성된, 한 판의 잘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래밍 게임에 불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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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The Wild One (위험한 질주)(한글무자막)(Blu-ray)
Mill Creek Ent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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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 Sons of Anarchy를 보다가 검색해서 어찌저찌 보게 된 영화이다.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고전영화가 전편이 다 올려져 있어서 보게 되었다. 링크는 아래


https://www.youtube.com/watch?v=KmOipZaw_qY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단순히 마쵸남자들의 으쌰으쌰 깡패놀이 보여주는 게 목적도 아니고, 혹자들이 비난하듯 약자나 여성 괴롭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린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공권력과 저항력, 그 영원한 딜레마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민초의 마음을 주인공 "캐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명작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떤 한쪽의 단순한 구도로 읽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상 본질이 단순한 선과 악의 사이드로 나뉜 것이 아니라 굽히려는 힘과 굽히지 않으려는 힘 사이에서의 불협화음을 그대로 보이는 예술작품이었다.

1. 말론 브란도가 주인공이 아니라 "캐시"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나의 이러한 해석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쟈니가 아니라 마을의 삼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캐시로 상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물론 배우 이름값이나 상징성을 생각하면 쟈니도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영화 제목이 The Wild One이니 당연히 쟈니가 주인공인데, 나는 생각보다 이 영화의 대칭성 때문에 쟈니가 주인공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대칭이냐, 바로 쟈니가 몰고 다니는 wild, 날 것의 오토바이 갱단이 상징하는 반항하는 자들과 한곳에 상주하며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공권력에 의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마을사람들의 대칭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바로 캐시가 서있다. 그래서 내가 캐시를 주인공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딱 보기에는 물론 오토바이 갱단 놈들이 깽판을 치고 캣콜링하며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것이 혼돈 그 자체에 무례하고 상스러운 마초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억압적인 깡패집단을 미화한다라는 비난들이 있다. 실제로 물론 어느 정도 그러한 면이 있다. 그 정화되지 않은, 여과되지 않은 날 것의 리비도와 자유로움, 무절제함과 내일 없이 사는 망나니들의 모습 안에서 섹슈얼한 상대를 대상으로 자신의 본능을 그대로 표현하는 무례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캐시가 중간에 쟈니와 오토바이를 둘이서 타고 난 다음의 대화를 보며, 그리고 이 영화에 묘사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밥그릇이 위험해지자 바로 무장과 폭력을 선택하는 그 양상을 보며, 과연 소위 마초적인, 그리고 여성억압적인 면이 그 "상스러운 마초"들한테만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즉, 만약 이 영화에 여성억압적인 측면이 있다면, 오토바이 갱단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질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어울리지도 않는 마을의 보안관 노릇을 하며 껍데기처럼 남아 있는 "가부장제"와 기존 질서의 상징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책임감으로 옆에 남아 있는 캐시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하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그녀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캐시가 매일 어떤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과 사랑에 빠져 마을 밖으로 자신을 꺼내주기는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성별에 대한 노골적이고 깊은 성찰은 아주 분명하지 않다. 사실, 성별이 문제가 아니다. 캐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억압적 측면도 같이 드러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억압"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캐시가 만약 동네에서 자라나는 아들내미라고 생각해보자. 과연 마을을 떠났을 수 있을지? 떠나지 못하는 아들에게도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캐시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시민의 모습에 가깝다. 외모는 평범하지 않지만, 항상 일해야 하고, 부모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탈을 꿈꾸기 때문이다. 쟈니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이성적 호감도 있지만, 동시에 쟈니가 그녀에게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보았기 때문이다. 쟈니는 실제로 자신을 꿈꾸며 자신이 좋다고 들이대는 여자에게는 아주 냉정하다. 사실 들이대는 여자가 거의 답정너를 요구하는 식으로 나는 너 좋아 너도 나 좋니를 물어봐서 짜증을 낸 것이기도 한데, 캐시에 대한 끌림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모로 미묘하다. 쟈니는 캐시에게도 구속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캐시와 쟈니의 관계를 조금 더 상징적으로 보았다. 쟈니가 이 영화가 의미하는 the wild one이겠지만, 내 생각에 그는 캐시 안에 존재하는 the wild one이었던 것 같다. 캐시는 보통의 옛날 스테레오 타입의 상상을 거쳐 자신의 탈출 욕구를 "자신과 일시에 사랑에 빠지는 이방인"으로 미화를 거쳤지만, 사실 그게 로맨틱하게 들려서 그렇지, 결국 가출하고 싶다는 이야기 아닌가. 쟈니처럼 막무가내로 목적지 없이 정처없이 달리고 싶은 것, 그러한 야생성이 캐시가 받아들이기 두려워 울면서 도망쳐야 했던 그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곱게 교육 받은 캐시에게는 결국 사랑에 빠지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 금상을 캐시에게 주는 쟈니, 그리고 그 둘의 마주 보는 웃음은 캐시 내면의 불만과 가출 욕구가 쟈니와 쟈니가 몰고온 폭주단들의 소동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된, 즉, 캐시 내면이 평화를 어느 정도는 찾은 모습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모터사이클 갱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 안에서 누군가가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한 여자의 갈등하는 내면이 해소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정의가 아닌 공권력, 대책은 없는 저항력

아주 뻔한 인용을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다. 사실 너무 뻔해서 구절도 대충 기억은 안 나는 건데, 니체 말이다. 니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의 기준에 대해 접근할 때 이것조차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으로 쌓이고 쌓인 일종의 문화적이고 변동적인 가치라고 일찍이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 영화가 그 이야기를 고대로 한다. 

마지막에 쟈니를 풀어주는 경찰 높은 양반이 쟈니를 보며 내가 너를 볼 때 너 안에 무슨 선/좋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풀어준다는 이야기를 대충 하는데, 이 경찰 높은 양반은 공권력을 상징하고, 공권력의 눈에 자신에게 반항하고 저항하는 쟈니에게는 어떠한 선도, 좋음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쟈니에게서는 선이나 좋음이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쟈니나 모터사이클 갱단은 애초에 선이나 좋음을 쫓아서 그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고,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사회에 말 그대로 반항을 하고 저항을 하는 것 뿐이다. 반작용적인 것이다. 

나의 야매 정신분석을 돌려보면, 마을 사람들한테 얻어맞는 쟈니가 옛날 내 애비가 때리는 것보다 약하다 라며 조롱하는데, 한 번 통밥 굴려 때려 맞춰보면 쟈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즉, 그는 자신보다 더 큰 권위한테 얻어맞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찰나에 오토바이를 타고 튀지 않았을까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쟈니 아버지가 경찰이나 그 비슷한 것이었다면 이단 콤보로 그의 상위권력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 더 이해도 될 것이고.

방금 이전 문단은 내가 영화의 대사 한 토막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돌려본 것이고, 결국 어쨌든 그들은 "상대방이 가진 무언가"에 대한 저항을 끝도 없이 하는, 한마디로 존재 자체에 대한 반항, 끝없는 혼돈과 변동, 격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오토바이 갱단을 이들을 코스모스와 카오스, 공권력과 저항력, 질서와 혼돈으로 양분하여 바라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강조하건대, 이것을 정의와 비정의로 나누는 것은 철저히 공권력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혼돈과 카오스가 불러 일으키는 짜증남과 혼란의 씨앗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할 수밖에 없다. 사고만 치는 것들, 자기들이 가장 강한 놈팽이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자.

그런데, 그러면 공권력은? 

그들이 질서를 지키며 공동체를 안정으로 유지시키며 자신들이 법이고 질서이고 정당성인양 서있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자. 너희들이 그냥 대빵 깡패 아닌가? 즉, 국가가 가장 큰 깡패 아니냐는 말이다.

실제로 국가와 질서에 기댄 마을 공동체가 과연 정의롭고 비폭력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냐, 보면 그렇지 않다. 캐시의 아버지인 보안관은, 모터사이클 갱단에 맞서서 싸우려 드는 마을의 한 아저씨가 어렸을 때부터 깡패였다는 식으로, 그래서 말릴 수가 없다는 식으로 대사를 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인간의 집단 군상이며 어떻게 보면 호전적이기도 하고 분연히 총으로 자신을 맞서는 놈들을 패주고 쏴서 죽이려는 그 사람들도 당장 모터사이클 갱단에 들어가서 오토바이만 안 끌고 다닐 뿐, 자신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사적인 제재와 폭력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수호하고 안위를 지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안경 낀 아저씨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혔는데, 한쪽이 나쁜 짓 하다고 똑같이 나쁜 짓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나름 양식 있는 말을 호전적인 마을 아저씨는 겁쟁이가 하는 소리로나 치부해버리는 것을 보면, 지식인의 말을 대중은 항상 무시한다-는 패턴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공권력과 경찰에 힘을 빌리고 빗대어 있지만 결국 마을 공동체는 그 평화 안에 나름의 힘과 권력 앞에 붙어 있는 것이고, 그 큰 권력 앞에 이죽거리는 저항군단은 사실상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폭도들이지만, 결국 경찰들이 너네 혼난다 하면 깨갱해버릴 수밖에 없는, 국가라는 최종보스 앞에서는 깨갱하는 소규모 양아치들인 것이다.

나의 이러한 해석에 빗대면 결국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하나 저 길을 선택하나 억압, 억압, 억압 속에 갇혀 있는 중생들인 것이다. 마을 안에서 평화롭게 있는다 치손 결국 우리는 강력한 힘에 깃대어 돌아가고 있는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혀 있는 것이며, 그 반대로 가봤자 철부지 양아치 짓하면서 손가락질이나 받고 금방 빨리 죽기에 딱 좋은 위험한 일이나 하는 또 다른 종류의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히는 것이다. 


3. 남자다움 혹은 badass에 대하여

마지막 관전 포인트는, 이 시점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 바로 남자다움에 관한 것이다.

참 요즘 같은 시대에 미묘한 단어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한 번 생각해보자. 대체 남자다움이 뭐냐?

영미권에서는 badass라고 속칭되는, 말론 브란도나 제임스 딘으로 형상화되는, 영원한 반항아들. 어떤 시점으로 보면 철부지 같은 놈들이기도 하고.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말 같은 사람들.

우리가 남자답다, 멋있다-라고 표현하는 이 종류의 사람들은 내 생각에 기존의 문화 질서에서 남자들이 숭상하는 남성다움의 전형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남자답다, 멋있다 할 때의 기준은 보통 옛날 관용구들을 생각해보면, 사나이가 한 번 칼을 빼면 무를 썰어야지 이러한 말들이 떠오르는데, 나는 이게 주체적인 삶의 자세, 적극적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어떠한 자세를 보통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여자는 "백마 탄 왕자"가 와서 꺼내주길 기다리고, 보통 남자라면 자신이 마을 밖으로 나가 사내라면 한 번 이것 저것 해보고 살다 죽어야지!라는 그 고정관념? 옛날 마인드의 결정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나는 이 자세에서 남성이나 여성의 성별적 구별을 버려버리는 순간, 그것이 바로 이 딜레마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되는 자립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씨앗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다.

결국 인생은 억압받는 것이고, 위태로운 것이다. 공권력에 기대 있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잃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저항력에 빠져 자유를 만끽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선택을 내려야 하고 그 선택에 걸맞게 분연히 자기 갈 길을 걸어야 하며, 그 선택의 길에서는 변명도 딱히 필요 없고 두려워 하는 모습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쟈니는 자신에게 억울한 순간이 왔을 때도 자신이 해야 하는 말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말만 군더더기 없이 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말하고 행동했다. 

자신은 자신만이 보호할 수 있고 자신만이 그 길에 책임이 있다는 그 분연한 자세-그것을 우리는 멋있다-남자답다라고 표현해 왔으나 이제는 앞으로의 시대에서 모든 개인이 바라는 그러한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독고다이적 자세가 동시에 얼마나 공동체성을 취약하게 할 수 있는가. 약자에 대한 연대나 공감, 연민을 위해 어느 정도 길을 틀어줄 수 있는가. 자립은 연대와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거기까지는 논의가 쉽게 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쟈니는 그냥 달린 것 뿐이고, 달리다 보니 어중이 떠중이들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쟈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패고 싶기도 하다. 그들이 친구인가? 어떤 연대인가? 그 연대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막무가내 연대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게 얼마나 정당화되는가? 그들을 그렇다면 항상 억압해야 하는가? 그렇지만 그들이 동시에 우리의 또다른 모습, 우리가 갖고 있는 양면인데?

그렇지만 인간이 자유를 꿈꾸는 한 그것에 대해 분연히 "자립의 길"을 가려는 그 지향성, 그리고 그 지향성에서 나오는 저항의 매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나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 그 길에도 큰 매력이 있다. 오토바이 갱단이 찾아온 날은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옛날 옛적 바쿠스 신을 모시는 무녀들이 벌였다던 환락과 혼란의 축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페스티벌이 있는 이유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루 쯤은 해방구를 주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나.

이 모든 딜레마와 아수라장이 섞인 사이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바로 이 The Wild One이었다고 생각한다. 


4. (사족)


영화에 대한 열망이 10대보다는 많이 시들해져 요즘은 무슨 영화를 봐도 시큰둥하였는데, 이 영화는 생각지도 않게 보았어도 이렇게 긴 글까지 적을 수 있었다. 나는 영화의 리뷰를 쓸 때, 내 안에 말이 차오르는 영화만 쓴다. 이건 마치 대화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길기 때문에 마치 내가 술집에 앉아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나에게 주욱 두시간 정도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보통 흥미없는 경우라면 네 그렇네요, 대충 재미있는 경우라면 네 재밌네요, 답변하고 지나칠 것이지만, 가끔 정말 나한테 그 이야기가 의미가 있다면, 나도 내 이야기를 풀게 되고, 내가 느낀 바를 죽 대답하듯 적게 되는 것이다. 정말 최근에는 영화에 한참 시들해져 있던 나에게 영화의 중요성, 아름다움을 다시 가르쳐준 영화라 더 의미가 있는 리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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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을 재미로 다 본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보았다. 나한테 이 만화는 재미의 차원보다는 언제나 철학적 차원으로의 접근이었기 때문이다. 



1. 타치코마들


타치코마들은 분명 정보를 공유하고 병렬화되어 있는 기계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원래 정보를 공유하는 말 그대로 기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바토에게 '선택받고' 바토에게 '길들여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고스트, 즉 우리 말로 하면 영혼을 가지게 되고 개성을 가지게 되는 차원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 한 개체가 개성을 가지면서 정보를 공유하는 다른 타치코마들까지도 개성을 가지게 되면서, 어떤 타치코마는 온갖 책들, 문학 책까지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개성이 무기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본 쿠사나기 소령에 의해 타치코마들은 퇴역/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 


2. 웃는 남자


웃는 남자의 정체는 26화에 나온다. 진짜 정체로 밝혀진 아오이란 청년-사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사건들을 불러일으킨 "첫번째 오리지널"이 아니었다. 그조차도 어떤 논문을 보고 그 논문에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의미를 추출해내고 변용한 "복제품"이었던 것이다. 그는 6년 전 일에만 관계가 있었을 뿐, 사후의 모든 일들은 아오이의 행동에서 다시 영감을 얻어내어 "웃는 남자"라는 상징성에 기댄 자들의 홀로서기 증후군 Standing Alone Complex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다. 


3. 홀로서기 증후군의 이유


홀로서기 증후군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 바로 정보의 바다에 빠져 정보의 공유라는 현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 개체들의 우울함 때문이다. 비록 공각기동대가 픽션이긴 하지만, 이 픽션은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지금 우리 인간들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내밀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여러 정보와 암시에 빠져 자기 자신의 개성과 인간성, 내러티브를 거대한 담론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고 있다. 특히 요새 이론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좌지우지 당하여 "돈"이 모든 자유와 권력의 척도가 된 시대에서, 무수히 펀딩하고 투자하고 부동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안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른 말로,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소에 의하여 결정지음 당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들은 괴로워한다. 돈에서 지면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려 우울해지고, 심지어는 어떤 사람들은 자살도 한다. 이처럼 거대담론에 치우친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자기 자신의 내러티브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의 관계를 상실하여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이때 그들은 완전히 상실된 채, 파편화된 채 홀로 고독하게 떨어져 있게 된다. 이때 이들은 자폐처럼 침전되거나 혹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강한 목적의식에 자신을 맡긴다.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빠져 돈이 최고 하면서 미친 듯이 돈을 벌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극 중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이치로 웃는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웃는 남자는 일종의 안티히어로로써 강한 존재감, 혹은 강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갑갑한 이 세상을 돌파하고 어떤 선례를 남기면서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적에게 맞서싸우는 자는 우리가 기다리고 상상해온 '영웅'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파편화된 여러 사람들은 아무런 위치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만난 강렬한 "웃는 남자"의 의지에 빠져들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호응해버린다. 그들의 존재 의미가 존재하지 않다가, "웃는 남자"라는 상징에 의해 호응되면서 존재의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영웅'이란 오리지널은 없다.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부응하여 '영웅적 행동'을 수행하는 '영웅이 되고 싶어 자신을 영웅으로 만드려 하는 주체화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아오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어떠한 "의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려 한다. 자신이 의지가 없기 때문에 "타인의 의지"를 보고 따라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근본적으로 그 모방행위가 바로 다시 오리지널의 위치에 올라간다. 이 세상에 진품은 없기 때문이다.


"원본의 부재가 원본 없는 사본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각기동대에서는 "홀로서기 증후군"이라고 표현한다. 


4. 인간과 로봇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만약 그들에게 모두 똑같이 영혼(고스트)이 있다면


공각기동대에서는 특이하게 고스트라는 개념이 있는데,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란 것과 같은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3번에서의 홀로서기 증후군에 대한 어떤 종류의 문제의식에 대해 쿠사나기 소령이 대답하는 해답이 바로 1번 타치코마들에게서 발견된 "개성"인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마치 로봇처럼 몰개성화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외부의 거대한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고스트를 잃고 로봇이 된다. 


그런데 거꾸로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들이 영혼을 잃는 반면 로봇들에게서 영혼이 태어난다. 그 태어나는 과정의 묘사를 살펴보면 나는 두 가지의 선행조건이 필요했다고 파악했다.


첫번째는 애정이다. 타치코마들은 바토라는 남자가 쏟아주는 애정(여기서는 바토가 규격과 맞지 않는 사제 오일로 상징한다)에서 발생한 "우연의 일치"로 "오작동"으로 인해 개성을 갖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쿠사나기가 말한 "호기심"이다. 쿠사나기는 바로 이 "호기심"이야말로 정보 병렬화 현상에서 너무나 많은 정보 공유 현상으로 사람들이 방향성을 잃었을 때도 개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해법이라고 제시한다. 


실제로 타치코마들은 정말 어린아이 같이 행동한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들의 해답과 토론으로 자기 자신들의 개성을 만들어 나간다. 바로 이 "질문하는 힘"이야말로 그들 스스로가 "개성"을 만들어나가는 실마리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영혼이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와 로봇의 기계육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스트가 로봇에게 있고 인간에게 외려 고스트가 없고 아무런 질문의식 없이 조건에 따라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사실 로봇이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이 로봇과 같은 것 아닌가?


5.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연결지어서 생각한다-바로 "호기심"은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들이 필요한 "비판능력"이다


내 블로그를 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민주주의를 정치철학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긴말 필요 없이, 나는 현재 대의민주주의 문제가 바로 공각기동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인간적인, 탈개체화하고, 몰개성화하여, 일종의 거수기 혹은 물질을 소모하고 자본을 창출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이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며, 대의제가 궁극적으로 직접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주체가 함양해야 할 능력을 범박하게 묘사하자면, 바로 이 "호기심" 다른 말로 "비판능력"이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은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서 변용하는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실천윤리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철학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껍데기 식의 주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부모는 누구인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속한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 자신은 정해져 있지 않다-우리 자신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끝없는 문답 과정에서 나라는 한 명의 개성이 만들어지고, 나를 둘러싼 내러티브들이 태어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어떤 성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부모를 가지고 있고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왔으며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


이런 주체의 의식이 없이 우리는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한 주체의식이 없는 사람은 민주주의에 참여가 아니라 끌려다닐 뿐이다. 


이를 다시 한 번 공각기동대의 맥락에 적용시켜보자면, 원본이 없을 때, 원본이 진짜 있냐 없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원본이라는 이미지에 감응하여 내가 만들어 나가는 원본과는 다른 사본, 그러나 원본과는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종류의 원본이 되는 것- 그 행위에 필요한 것은 바로 호기심,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옳습니까? 이대로 가면 괜찮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합니까? 나는 이런 삶과 사회에 만족합니까?"


아오이는 지가 베르토프라는 영화감독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을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계다" 


나는 이를 이렇게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했다. 


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만들어 낸 자기 자신의 세상을 타인과 공유할 때, 보여주는 나와 그것을 보는 관객들이 묶인 "공동체"가 태어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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