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을 재미로 다 본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보았다. 나한테 이 만화는 재미의 차원보다는 언제나 철학적 차원으로의 접근이었기 때문이다.
1. 타치코마들
타치코마들은 분명 정보를 공유하고 병렬화되어 있는 기계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원래 정보를 공유하는 말 그대로 기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바토에게 '선택받고' 바토에게 '길들여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고스트, 즉 우리 말로 하면 영혼을 가지게 되고 개성을 가지게 되는 차원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 한 개체가 개성을 가지면서 정보를 공유하는 다른 타치코마들까지도 개성을 가지게 되면서, 어떤 타치코마는 온갖 책들, 문학 책까지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개성이 무기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본 쿠사나기 소령에 의해 타치코마들은 퇴역/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
2. 웃는 남자
웃는 남자의 정체는 26화에 나온다. 진짜 정체로 밝혀진 아오이란 청년-사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사건들을 불러일으킨 "첫번째 오리지널"이 아니었다. 그조차도 어떤 논문을 보고 그 논문에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의미를 추출해내고 변용한 "복제품"이었던 것이다. 그는 6년 전 일에만 관계가 있었을 뿐, 사후의 모든 일들은 아오이의 행동에서 다시 영감을 얻어내어 "웃는 남자"라는 상징성에 기댄 자들의 홀로서기 증후군 Standing Alone Complex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다.
3. 홀로서기 증후군의 이유
홀로서기 증후군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 바로 정보의 바다에 빠져 정보의 공유라는 현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 개체들의 우울함 때문이다. 비록 공각기동대가 픽션이긴 하지만, 이 픽션은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지금 우리 인간들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내밀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여러 정보와 암시에 빠져 자기 자신의 개성과 인간성, 내러티브를 거대한 담론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고 있다. 특히 요새 이론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좌지우지 당하여 "돈"이 모든 자유와 권력의 척도가 된 시대에서, 무수히 펀딩하고 투자하고 부동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안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른 말로,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소에 의하여 결정지음 당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들은 괴로워한다. 돈에서 지면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려 우울해지고, 심지어는 어떤 사람들은 자살도 한다. 이처럼 거대담론에 치우친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자기 자신의 내러티브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의 관계를 상실하여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이때 그들은 완전히 상실된 채, 파편화된 채 홀로 고독하게 떨어져 있게 된다. 이때 이들은 자폐처럼 침전되거나 혹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강한 목적의식에 자신을 맡긴다.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빠져 돈이 최고 하면서 미친 듯이 돈을 벌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극 중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이치로 웃는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웃는 남자는 일종의 안티히어로로써 강한 존재감, 혹은 강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갑갑한 이 세상을 돌파하고 어떤 선례를 남기면서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적에게 맞서싸우는 자는 우리가 기다리고 상상해온 '영웅'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파편화된 여러 사람들은 아무런 위치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만난 강렬한 "웃는 남자"의 의지에 빠져들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호응해버린다. 그들의 존재 의미가 존재하지 않다가, "웃는 남자"라는 상징에 의해 호응되면서 존재의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영웅'이란 오리지널은 없다.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부응하여 '영웅적 행동'을 수행하는 '영웅이 되고 싶어 자신을 영웅으로 만드려 하는 주체화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아오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어떠한 "의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려 한다. 자신이 의지가 없기 때문에 "타인의 의지"를 보고 따라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근본적으로 그 모방행위가 바로 다시 오리지널의 위치에 올라간다. 이 세상에 진품은 없기 때문이다.
"원본의 부재가 원본 없는 사본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각기동대에서는 "홀로서기 증후군"이라고 표현한다.
4. 인간과 로봇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만약 그들에게 모두 똑같이 영혼(고스트)이 있다면
공각기동대에서는 특이하게 고스트라는 개념이 있는데,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란 것과 같은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3번에서의 홀로서기 증후군에 대한 어떤 종류의 문제의식에 대해 쿠사나기 소령이 대답하는 해답이 바로 1번 타치코마들에게서 발견된 "개성"인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마치 로봇처럼 몰개성화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외부의 거대한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고스트를 잃고 로봇이 된다.
그런데 거꾸로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들이 영혼을 잃는 반면 로봇들에게서 영혼이 태어난다. 그 태어나는 과정의 묘사를 살펴보면 나는 두 가지의 선행조건이 필요했다고 파악했다.
첫번째는 애정이다. 타치코마들은 바토라는 남자가 쏟아주는 애정(여기서는 바토가 규격과 맞지 않는 사제 오일로 상징한다)에서 발생한 "우연의 일치"로 "오작동"으로 인해 개성을 갖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쿠사나기가 말한 "호기심"이다. 쿠사나기는 바로 이 "호기심"이야말로 정보 병렬화 현상에서 너무나 많은 정보 공유 현상으로 사람들이 방향성을 잃었을 때도 개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해법이라고 제시한다.
실제로 타치코마들은 정말 어린아이 같이 행동한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들의 해답과 토론으로 자기 자신들의 개성을 만들어 나간다. 바로 이 "질문하는 힘"이야말로 그들 스스로가 "개성"을 만들어나가는 실마리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영혼이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와 로봇의 기계육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스트가 로봇에게 있고 인간에게 외려 고스트가 없고 아무런 질문의식 없이 조건에 따라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사실 로봇이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이 로봇과 같은 것 아닌가?
5.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연결지어서 생각한다-바로 "호기심"은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들이 필요한 "비판능력"이다
내 블로그를 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민주주의를 정치철학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긴말 필요 없이, 나는 현재 대의민주주의 문제가 바로 공각기동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인간적인, 탈개체화하고, 몰개성화하여, 일종의 거수기 혹은 물질을 소모하고 자본을 창출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이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며, 대의제가 궁극적으로 직접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주체가 함양해야 할 능력을 범박하게 묘사하자면, 바로 이 "호기심" 다른 말로 "비판능력"이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은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서 변용하는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실천윤리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철학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껍데기 식의 주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부모는 누구인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속한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 자신은 정해져 있지 않다-우리 자신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끝없는 문답 과정에서 나라는 한 명의 개성이 만들어지고, 나를 둘러싼 내러티브들이 태어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어떤 성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부모를 가지고 있고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왔으며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
이런 주체의 의식이 없이 우리는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한 주체의식이 없는 사람은 민주주의에 참여가 아니라 끌려다닐 뿐이다.
이를 다시 한 번 공각기동대의 맥락에 적용시켜보자면, 원본이 없을 때, 원본이 진짜 있냐 없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원본이라는 이미지에 감응하여 내가 만들어 나가는 원본과는 다른 사본, 그러나 원본과는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종류의 원본이 되는 것- 그 행위에 필요한 것은 바로 호기심,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옳습니까? 이대로 가면 괜찮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합니까? 나는 이런 삶과 사회에 만족합니까?"
아오이는 지가 베르토프라는 영화감독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을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계다"
나는 이를 이렇게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했다.
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만들어 낸 자기 자신의 세상을 타인과 공유할 때, 보여주는 나와 그것을 보는 관객들이 묶인 "공동체"가 태어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