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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라 ㅣ 기담문학 고딕총서 8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이전에 접했던 기 드 모파상의 글들은 굉장히 사실주의적이었다. 어렸을 때 읽고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 『비곗덩어리』와 『목걸이』와 같은 단편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모파상의 작품에서 느껴진 강한 사실주의적 색채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수업을 들으며 모파상의 작품이 환상문학의 세계 강의계획안에 올라와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궁금증을 안고 본 모파상의 『오를라』는 상당히 강렬했다. 그러나 필자가 느낀 이러한 강렬함은 음침한 분위기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냉정한 눈을 가진 작가의 치열한 고민에서 나오는 바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전공 특성상 문학과 철학, 그리고 교육이라는 학문 안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여러 가지의 고민 중 현재 여실히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오를라』를 보면서 스스로가 갖고 있던 문학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이 안에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느낀 문학의 숙명적인 문제 상황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본질이라 느낀 것을 어떻게 다른 이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 질문을 해본다면 이러한 문장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순전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강렬함을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담아내어 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의미론적 기능으로서 언어는 구체적 체험을 추상화한다. 또한 감각의 전체성은 언어가 미치는 범위 밖에 놓이기 때문에, 언어는 감각적 대상의 전체상을 다 묘사할 수는 없고 결국 많은 부분이 생략될 수밖에 없다. 기표와 기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기표가 기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성을 통해 기의를 대표한다는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의 자의성이라는 유명한 개념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기표는 단지 우연히 선택된 것뿐이다. 이처럼 언어로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데 있어서 모든 글을 쓰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실패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각주 : 『시론』제4판, 김준오, 삼지원, 2002년, p65) 우리는 사물과 경험, 감정을 그 본연의 성질만을 보이며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수많은 시인들과 소설가들을 끊임없이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게 한 문학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필자는 단편 『오를라』에서 주로 나타나는 서술자의 자기분열이 바로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 작가의 괴로움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였다. 『오를라』에서 등장하는 1인칭 서술자는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 점점 자신의 주변에 있는 무서운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필자가 인상적으로 주목한 것은 그 두려운 존재가 우선적으로 작품의 서술자에게 공포감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즉, 나중에 ‘오를라’로 이름 붙여진 그 두려운 존재가 객관적으로 서술자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보다 ‘오를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느끼는 서술자의 불안함이 더 흥미로웠던 것이다.
유쾌한 관광을 다녀왔다며 서술자가 전하는 몽생미셸에서의 이야기는 서술자의 불안함과 겉보기에는 어떠한 관련성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몽생미셸의 사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서술자에게 당연히 있다고 존재하는 것들을 잠자코 생각해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실제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는 것들이라며 바람을 예로 든다. 몽생미셸의 사제와 한 대화는 서술자가 겪게 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설명되지 못하는 집안의 사건들과 자연스럽게 엮어진다. 즉, 도저히 확신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불명확한 상황 아래에서 서술자는 명백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몽생미셸에서 서술자와 신부가 한 대화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그렇지만 독자들이 고민할 틈새도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서술자의 혼란은 심화된다. 이러한 와중에 필자를 재미있게 만든 부분들은 서술자의 혼란이 더 심화되면서 나오는 자기고백적인 서술들이었다. ‘오를라’를 보기 위해 거울에 비친 상을 보려고 시도했던 일과 사촌누이의 최면과 관련된 사건들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필자는 서술자가, 사촌누이가 최면에 의해 조종당했던 일을 상기하며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 들어온 이방인의 의지를 따르고 있었다. 마치 또 다른 영혼이, 또 다른 어떤 영혼이 그녀의 내부에 기생하는 것 같았다.’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강력한 혼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서술자는 ‘오를라’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오를라’의 존재가 있음을 느끼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그 정체를 규명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서술자는 ‘오를라’를 무서워한다. 필자는 여전히 이 단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남아 있는데, ‘오를라’가 정녕 작품의 서술자에게 어떠한 위해를 직접적으로 가했는지가 그러하다. 필자는 글을 읽으면서 작품의 서술자가 느끼는 고통이란 것들은 모두 서술자 스스로가 느끼는 내적 공포와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작품의 그 어디에서도 ‘오를라’가 그를 괴롭혔다는 명백한 사실 판단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며 상당히 불확실하다. 또한 필자는 사촌누이가 겪은 최면이라는 현상을 보며 서술자가 그 괴이한 광경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표현은 주로 ‘오를라’에 대해 언급할 때 나오는 이방인 혹은 외계인과 같은 단어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필자는 작품의 서술자가 두려워하는 존재들은 모두 서술자 본인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검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이며 그것들이 통칭되어 하나의 ‘오를라’로 설명되지 않느냐는 의심을 궁극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오를라’들, 즉 정확히 묘사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필자에게 고통을 야기한다고 결론지었다.
알 수 없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충분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대해 무지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른다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무엇이든 잘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 나타날 때 그 두려움과 공포를 추스르지 못한다. ‘오를라’를 처음 발견한 서술자가 필사적으로 논리를 사용해 ‘오를라’를 설명하려는 장면은 그러한 인간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술자가 자신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들의 신비를 무서워만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그러한 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해 경탄하는 법도 알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의 신비는 얼마나 심오한가! 우리의 빈약한 오관으로는 그것을 측정할 수 없다.’와 같은 문장에서 그러한 서술자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경탄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기에 이것이 단순히 자연경관에 머무르지 않고 점차 서술자에게 가까워지며 그의 머릿속으로 다가올 때 두려움으로 변질된다. 그러한 이유는 서술자가 대상을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이성으로 작용하려 하지만 그것이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상술한 것처럼 이러한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서술자의 근원적인 공포와 동시에 잠재하고 있는 경탄이 바로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문학인의 펜촉 끝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단편으로 창작되었다고 본다. 문학인들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며, 뛰어난 묘사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묘사와 표현력은 사건의 진상과 감정의 진실성을 일백프로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한 이유는 그들의 실력과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원래 언어라는 것이 본연적으로 그러한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인들은 이러한 한계에 부딪쳤다 하여도 포기하지 않는다. 손에서 펜을 놓는 순간 스스로를 문학인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항거라도 하듯이 그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더 쓰기 위해 언어를 선택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천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감정과 경험들을 묘사하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짜낸다. 그들의 결과물에는 물론 그럴 듯한 것도 있고, 실패작도 있다.
모파상의 『오를라』는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자신이 느낀 감정과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설명 불가능함에 좌초되어 좌절한 문학인의 소설이다.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서술자의 시도들과, 자신이 언어로 이해시킬 수 없는 미지의 신비한 것들에 관한 동경과 동시에 표현과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문학인을 밤새 잠 못 들게 하며, 그의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문학인을 소생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그 끝에 문학인은 그러한 한계에 시달리다 쇠약해져 실패한 자기 자신을 징벌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인 본연의 의무와 한계에서 자기분열을 일으킨 자의 비극적 최후를 암시하는 결말은 작가의 냉소적인 모습을 엿보게 한다. 이렇게 모파상은 문학의 필연적인 실패를 ‘오를라’라는 존재로 그려낸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를라』가 그렇게 치열한 고민에서 나왔다고 하여도 그 결말에 동의하지는 못한다. 물론 문학은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마음에 품는다. 모든 문학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자 싶은 것을 전부 부분적으로만 형상화 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원본은 언어라는 여과기를 거치는 순간, 많은 부분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인 섭리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작품의 결말이 이야기하는 방향처럼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인간의 한계에 감히 나동그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에 대한 욕망을 멈추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동물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서로에게 묘사하고 이해시키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는 근원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또한 인류는 그러한 소통의 욕망 속에서 서로를 동물이 아닌 대화와 공감이 가능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동물성을 배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방향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동족상잔과 약육강식의 세계인 동물의 영역에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그러한 빛의 선택은 힘든 방해물들을 내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우선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라는 점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 개발한 언어가 근본적인 자연성을 설명해낼 수는 없다는 한계점이 바로 그러한 방해물들이었다. 이렇게 높고 냉엄한 방해물 앞에서 인류는 결국 사회의 결속을 향한 방향은 틀린 것인가 회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회의가 당연한 순간이라면, 회의의 끝에 남은 선택의 순간 역시 당연히 올 수밖에 없다. 즉 동물로 남느냐 인간으로 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이 동물성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기에는 순간순간의 선택 속에서 자신의 동물적인 욕망을 버리고 더 큰 지평으로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만 그 한에서 만족하며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비극적인 실패를 예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듯 언어로서의 소통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다. 그러한 선택이 비록 찰나의 순간이며 일관성을 갖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짐승처럼 자신만을 보며 살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필자는 인류가 그러한 삶의 방식에 도덕적 우위를 주는 것이 비단 사회적 합의와 관습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이고 가는 그 어려움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에 인류가 그러한 이들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나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한계를 저버리며 살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자신이 한 표현은 언제까지나 그 자신이 말하고 싶던 본질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다른 자와의 공유를 애타게 바라지만 그러한 공유는 언제나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동물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분열의 상태라고 해서 넋을 놓고 동물이 되자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동물처럼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스스로를 설명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간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를라』에서 나타난 자기파멸은 필자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도 아니며 공동체를 위하는 결말도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한 다음에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무수한 노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무용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원래 모순이다. 인간은 동물이 아닌 인간이 되고자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인간을 규정짓는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의 고민도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본다. 이처럼 문학, 그리고 인간의 필연적인 실패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걷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