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를 쓰시기 전까지 따로 문학 수업을 받으신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어떤 계기로 글을 쓰시게 되었는지요?
- 음, 제가 만화와 영화를 무척 좋아해서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습작을 하기도 하면서 머릿속으로 자기의 세계관과 스토리를 만들어나갔어요. 그러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서, 또 그때까지는 자신의 감성이 메이저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마이너였더군요. 그래서 만화는 포기했습니다. 아무래도 만화라는 형태로는 좀 삐딱한 제 발상이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았거든요.
■ 그러셨군요. 그럼 소설을 쓰시기 전에도 아이디어는 많이 갖고 계셨던 거네요?
- 네,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단 적습니다. 나중에 보면 진짜 썰렁하거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싶은 게 대부분이라 건질 만한 건 많지 않습니다만 개중에 간혹 발전시켜보고 싶은 것들이 있지요. 상상이니까요. 로맨스나 추리, 호러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합니다.
■ 디지털작가상에는 어떻게 응모하게 되셨는지?
- 대학에 들어와서 잠시 고시 공부를 했었어요. 그러다 저에게 맞지 않는 길이란 걸 깨닫고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누구나 다 겪는 정체성의 혼란 같은거죠. 그래서 고민하다가 머릿속에 있는 스토리나 한번 풀어보자 해서 글을 쓸 만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때 검색에 걸려든 게 디지털작가상이었어요. 마침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을 재미있게 읽던 무렵이라 이런 식으로 글을 써보면 어떨까 싶었고, 그래서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의 초고를 썼습니다. 하지만 장편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플롯을 뒤집어엎었어요.
■ 히가시노 게이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 일단 그 작가는 허세가 없어요. 알기 쉽게 자신의 세계관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점이 좋습니다. 저는 소설이건 영화건, 불편함이 없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수용자가 감상하면서 도중에 멈추게 되는, 흐름이 자꾸 끊기는 작품은 별로예요. 그래서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를 쓸 때도 독자가 최대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스피디하게 전개해나가는 방식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책이 나온 뒤 친구가 "재미있긴 했는데 너무 금방 읽게 되더라."라는 평을 했는데 전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였어요.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질 못하고 한달음에 끝까지 읽게 되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 저도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 초고를 처음 잡자마자 내려놓질 못하고 단숨에 읽어버렸지요. 그렇게 쓰시려면 사전에 치밀한 설계도가 필요할 것 같은데 집필 전 스토리를 놓고 고민을 많이 하시는 편입니까?
- 아닙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처음에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발상에서 시작해요. 이게 온전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면서 일단 붙잡아 상황의 살을 붙여 전개해나갑니다. 플롯을 미리 정해놓고 쓰면 그 안에 갇혀버려서 작중 세계에 한계가 생깁니다.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인 스티븐 킹이 말하길, "길에 갇히지 말고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라"고 했거든요. 그런 식으로 쓰다 보면 도중에 어, 이게 아닌데 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그래도 상상력이 자유롭게 날뛰면서 제 형태를 찾아가도록 이끄는 방식이 저한테는 맞는 것 같습니다.
■ 와, 스티븐 킹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럼 그와 같은 스타일의 소설을 써보실 계획도 있나요?
- 네. 스티븐 킹의 가장 큰 매력은, 호러건 판타지이건, 그것이 기본적으로는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러면서도 현실의 한계에 얽매이지는 않는, 그래서 평범한 일상이 졸지에 악몽으로 변했는데도 자신의 발은 여전히 땅에 붙박여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인공들의 상황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오죠. 같은 맥락에서 저는 좀비 영화도 좋아해요. 인간성이란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아주 리얼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것도 그런 글입니다.
■ 그러고 보면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도 선악의 대결이나 트릭의 해명보다는 인간의 나약함에 초점을 둔 작품이었지요?
- 맞아요.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점차 "누가 흑이고 누가 백인가"조차 모호해지고 종혁과 창모, 희선 등 등장인물 저마다의 드라마만 생생하게 떠올라 얽혀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트릭의 비중을 축소하고 드라마에만 집중했지요. 아마 본격 추리물을 기대하고 보신 독자분들께서는 좀 실망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 첫 소설은 작가 자신의 투영이라고들 하는데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의 두 주인공 창모와 종혁 중 작가님과 닮은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 음, 글쎄요. 종혁의 소심함과 창모의 욱하는 성격이 반씩 닮았나?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제 모습에서 시작된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쓰다 보면 인물들이 하나하나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움직이니까, 가끔은 저도 주체 못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해요.
■ 차기작도 이미 구상 중이시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추리물인가요?
- 아닙니다. 전 장르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추리소설이 이미 벌어진 사건의 뒤를 쫓는 이야기라면 스릴러는 벌어질 일을 따라가는 이야기잖아요? 어떤 소재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피력하고 싶은지에 따라 장르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처음에 소재에서부터 출발해요. 거기에 살을 붙이면서 그 이야기에 어울릴 만한 최적의 방식을 찾지요. 지금 구상 중인 이야기는 약간은 SF 스타일의 드라마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