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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내게는 말이 늦은 아들이 하나 있다.
출산 후 2년에 걸친 나의 우울증때문에...
세상에 툭 던져진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 말이 늦은 아들이 하나 있다.
우울증이 걷힌 후 내가 본 세상에서 처음 만난 존재는 아무 말도 못하는, 안쓰럽고 가녀린 어린 내 아기, 아들이었다. 내 아들은 세살이 되어 있었다....
내 아들이 살고 있었던 세상은, 먼지가 군데 군데 짓눌러 앉은 게으른 부엌과, 제대로 외출 한번 못해본 창 밖의 풍경과, 졸라도 별 반응없었던 표정없는 엄마, 그리고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자동차들....벗어 날 수 없었던, 어둠에 찌든 거실이 전부였다.
그렇게 세살이 될 때까지 말없이, 표정없이 내 곁에 조용히 머물었던 나의 작은 아기.
언제부터인지 마음 속에서 고통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고 작은 형태였기에 난 무엇인지 몰랐다.
어느날 새벽.
불현듯 잠에서 깬 나는 터져나오는 통곡으로 밤을 지샜다. 고통이 심장 한 구석에 화석처럼 굳어져버리고 그 위에 슬픔과 안타까움이 지층처럼 쌓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알게 되었다.
고통이 섣부르게 마음의 표면을 떠 다닐 땐 느낄 수 없기에 나 스스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고통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밑으로 밑으로 묻힐수록 마음의 흐릿함은 사라지고 맑아 진다는 것을. 자갈 많은 곳에 물이 맑듯...그것을 "정화"라고 부르던가.
생활이 담담해지고, 내 아들은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자는 모습을 보려 몸을 기울이면 마음이 출렁이며 고통에 자극이 들어간다. 그렇게 하루에 한번, 고통이 보이는 순간 순간 눈물을 쏟아내고 다시 담담해진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의외로 담담한 그의 글은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에게도 깊이 묻힌 고통이 있는 거겠지. 나보다 더욱 깊이 깊이 내려갔기에 그렇게 담담할 수 있겠지. 하지만, 더욱 또렷하게 자각하고 있는 거겠지.
나도 그날 이후 내 작은 아기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됐다. 담담하게, 그러나 사랑을 가득 담아서. 의식하지 않아도, 애써 결심하고 책상에 앉지 않아도 그저 마음이 아기에게 흐르는 것을 느끼면 글도 같이 흘러 편지가 된다.
그도 그런 것이었을까....그래서 편지를 쓰게 된 것일까...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넓길래 그렇게도 강렬한 고통을 수차례 고요히 묻어 둘 수 있는가 생각하니- 그의 인생이 차마 정면으로 볼 수 없을만큼 경건하게도 느껴진다.
고통이 깊이 묻힐수록 마음이 맑아진다.
그 맑아진 마음안을 들여다 보면 인생의 지혜가 청명한 푸른색의 물풀처럼 하늘거리며 자라는 것이 보이는 듯도 하다.
고통을 이기고 싶은 사람보다....마음 안에 깊이 깊이 품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를 한번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