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을 정치인들은 매우 민감하게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추석 명절 온가족이 둘러 앉아 나누는 이야기 속에 민심이란 것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작게는 집안 대소사에서 크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이 두런두런 나눠지는 장(場)이 바로 추석 밥상머리 아닌가. 이번 추석 차례 준비를 하면서 어쩐 일로 둘째 숙부가 도서출판 "시공사(時空社)" 이야기를 꺼냈다. 가봤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는 것이다. 시공사가 독서인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까닭은 이 출판사가 좋은 책을 널리 펴녀 두루 인간세계를 불밝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시공사가 널리 알려진 것은 이 출판사의 사장 '전재국'이란 인물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전두환의 맏아들인 까닭이다.
시공사는 지난 1990년 8월 17일에 설립되었다. 설립은 90년에 되었으나 실제 출발은 한 해 전인 1989년 2월에 "스테레오 사운드"라는 일본의 오디오 전문 계간지 "스테레오 사운드"의 한국 번역판을 출간하면서 시작된다. 1990년 8월 현재의 사명으로 명칭을 변경한 뒤 1991년 전재국 사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시공사'는 우리 국내 출판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단시일 내에 엄청난 사세 확장을 이룩한다. 특히 '시공사'가 두드러진 흔적을 남긴 분야는 한국미술연구소와 연계하여 미술서적을 발행하면서 그동안 불모지에 가깝던 국내의 미술서적의 판도를 새롭게 열었고, 1997년부터는 '시공주니어'를 출판하는 한편, 무협지, 코믹스, 잡지 "까사리빙", "유행통신", "PC플레이어", "케이크", "기가스" 등등을 냈고,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데쿠베르(Decouvertes:발견) 총서"를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여 1999년 현재 100권 이상을 발간했다. 이외에도 현대 서구사상을 다룬 ‘로고스 총서’, 종교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샴발라 총서’와 불교관련 시리즈로 ‘시공 불교경전’ 시리즈, ‘시공 불교 총서’를 비롯해 무협소설 분야의 ‘드래곤북스’, 추리소설 시리즈인 ‘시그마북스’, Sci-Fi와 판타지 전문의 ‘그리폰북스’, 예술 분야의 이론서 시리즈인 ‘시공 아트 시리즈’ 등을 펴냈다.
시공사의 성장은 눈부셨다. 1991년 첫 단행본으로 펴낸 "아랍과 이스라엘"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 "펠리컨 브리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 연속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특히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하루에 1만 권이 판매되는 진기록을 세우며 1998년에는 한해 135종의 책을 출간하여 최다 종수를 출판한 출판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3년에는 해외 예술서적 전문 수입과 도소매를 목적으로 한 아티누스(Art In Us)를 이 해에 음악전문 출판사 "음악세계"를 만들었다. 이후 시공사는 도서판매체인점 "리브로"를 만들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종합 멀티미디어 문화사업체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웰빙 라이프 스타일 포탈인 "CASA", 인터넷 만화포탈인 "코믹 플러스", 여행전문 포탈인 '저스트고펜션' 등을 가지고 있다.
이 책 "옥스포드: 20세기 미술사전"은 시공사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양장본 하드 커버에 매끄럽게 짜여진 편집, 1,800여 명에 달하는 전 세계 미술가의 생애와 활동은 물론 각종 미술사조와 그와 관련된 미술비평가, 미술관 등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진 책이다. 책도 튼튼하게 제본되었고, 오래도록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좋은 미술 사전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한국미술연구소'의 현대 미술사 전공자들이 번역에만 꼬박 1년, 교열·편집에 3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매만진 흔적이 묻어난다.
나는 시공사에서 출간된 책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다. 한 100여권쯤... 이쯤 되면 믿고 구입할 수 있는 좋은 출판사 중에 "시공사"에게 한 자리를 줄 법도 한데, 나는 "시공사" 책을 살 때 여전히 주눅들고, 어딘가 께름직하다. 나와 내 집 사람이 좋아하는 어떤 필자, 그는 정치적인 앙가주망을 했던 사람은 아니다. 그저 사람 좋은 대중적으로 읽기 편한 에세이들, 사람 만난 이야기들을 맛깔나게 쓸 줄 아는 그 정도 필자였다. 그 이가 이 출판사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리 부부는 얼굴을 마주보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 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나는 정치적으로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 시절 내 친구들이 끌려가서 얻어맞고, 고문 당했던 생각을 하면 양심상 이곳과 일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어떤 이는 나의 이런 글을 보면서 연좌제도 아니고, 부모의 잘못을 자식에게 묻는다고 날 탓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에겐 나도 할 말이 별로 없다. 어차피 나는 앞으로도 시공사에서 나온 책 중에 좋은 책, 나에게 필요한 책이 있다면 사서 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께림직할 수밖에 없다. 20여만원의 예금 잔고를 가지고 골프를 치는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나날이 성장일변도인 멀티미디어 그룹의 총수로 있다는 것, 그 자금의 출처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것, 그것은 설령 현재의 법으로, 혹은 현재 정권의 의지로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나의 양심에는 여전히 께림직한 일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야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