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읽기 - 04

손이 기억한다.

"개관하기 -> 포스트 잇 -> 밑줄 긋기"까지 왔습니다. 그 다음에 남은 것은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손으로 옮겨 적는 겁니다. 저는 손으로 적습니다. 노트나 수첩에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적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손으로 적는 것이고, 그게 영 어려울 때는 먼저 컴으로 적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적은 노트나 수첩을 애지중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해버리는 것에 비중을 두는 거지, 그걸 뭐 나의 비망록에 적어두고 두고두고 기억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기억에 안 남는 걸 어쩌겠어요. 흐흐. 하여튼 그렇게 적어둔 걸 다시 컴에 저장해둡니다. 한글 워드프로세서로 해두면 찾기 귀찮아져서 워드패드라고 하는 메모장에 그냥 적어둡니다.

종종 "박사가 옛날 박사지 요새 박사가 무슨 박사냐"는 말을 합니다. 제갈량이란 중국의 지식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융중에 묻혀 책만 읽은 사람이 세상 만사 돌아가는 일에 죄다 해박합니다. 장강에 시시때때로 동남풍이 불어오는 것도 알뿐만 아니라 도교의 무슨 비술을 익혔는지 제 수명까지 연장할 수 있는 비기를 알고 있는 인물이죠. 제갈량 시대에 출판된 책이 과연 몇 종이나 있을까요? 저는 종종 지역마다 보물을 얻는 방법이 어떻게 차이나는지 누구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테마를 정해 연구해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으리라 생각해보곤 합니다.

가령, 알라딘이 마술램프를 어디서 구하던가요? 알라딘이 마술램프를 구하는 곳은 우습게도 시장입니다. 일찍이 대상무역에 종사하던 아랍 지역의 유목민들에게 사막을 걷다가 우연히 마술램프를 구해도 되겠지만, 그네들은 상업이 발달하였기에 시장(바자)에서 마술램프를 구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우리네 전설에서 보물을 구하는 건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일까요? 대개는 산에 나무 하러 갔다가 구해옵니다. 아마 우리나라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게 산이고, 그만큼 생활과 밀접한 대상이라 그렇겠지요. 아랍에서 보물은 시장에서 돈 주고 우연히 사는 행운이지만, 한국에서 보물은 산에 올랐던 나뭇꾼이 우연히 선녀가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듯, 도깨비들 놀래켜주었다가 도깨비 방망이를 얻든, 아니면 연못의 신령에게 금도끼, 은도끼를 얻듯 우연히 습득하거나 꾀를 부려 얻는 것이죠. 그렇다면 중국에선 보물을 어찌 얻을까요? 우리와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만, 그네들은 선인들을 통해 그것을 얻나봅니다.

중국의 선인들이란 도가적인 인물들인데, 이네들은 원래 인간이지만 많은 공부와 신술비기를 익혀 선인이 됩니다. 삼국지의 유명한 황건적 두목인 장각이 비서인 태평요술서를 얻는 것도 매한가지죠. 그런데 장각이 이 책을 얻었다고 저절로 선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장각 역시 산속 동굴에 들어가서 몇년씩 태평요술서를 공부하여 선인이 되고, 도인이 되지요. 중국에서는 책이 곧 보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국의 무협영화들에 등장하는 비급이니, 비기니 하는 것도 죄다 무슨무슨 무예의 초식들을 적어둔 책입니다. 그리고 그런 비기를 익히는 동방불패니 이런 사람들도 다 그런 책을 통해 열심히 공부하고, 무공을 연마해서 초절정고수가 되지요. 이렇듯 중국에서 책이 보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책 구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중에 융중의 초려에서 농사짓고, 물고기 낚시나 하던 제갈량이 구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 과연 몇권이나 되었을까 생각해보는 건 아마 불온한 상상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시 많이 읽지는 못했을 거란 걸 상상하기는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반복하라, 가죽끈이 끊어질 때까지....

독서에 대해 전해지는 명언들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말은 가죽으로 맨 책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책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흔히 독서에 힘쓴다는 말로 해석하는데, 맞는 말이면서 당시의 독서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지를 상상케하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물론 당시의 책이 꼭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부들부들한 종이가 아니라 대나무 조각(죽편)을 엮어 만든 책이기에 가죽이 더 쉽게 떨어졌을 수도 있지만 이것을 세 번이나 끊어뜨릴 정도라면 얼마나 반복해서 같은 책을 읽었을지 상상이 가는 일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우충동(汗牛充棟) "이란 말인데 이는 소가 땀을 흘릴 만큼 수레에 실은 책의 무게가 엄청나고, 이 책을 쌓아올린 것이 용마루에 부딪칠 만큼이란 뜻입니다. 저도 이사를 몇 번 다녀봤지만, 친구들이 도와주러 다녀간 뒤 늘 하는 말이 "다음부턴 부르지 마."입니다. 이삿짐 중에 제일 힘든 이삿짐이 책짐이란 건 서재를 즐겨 이용하는 분들은 다들 알만한 내용이겠지요. 그런데 그 당시의 책은 역시 대나무였습니다. 이와 흡사한 말로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란 말이 있어요. 여성분들이 듣기엔 좀 그런 내용이긴 하지만 어쨌든 옛날 얘기니까 말씀 드리면 이 말의 뜻은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 수레에 불 불이면 잘 탔겠지요. 대나무 자체에도 기름기가 있지만 읽은 사람의 손때에서 묻어난 기름도 대단했을 테니까요.

어찌되었든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퇴계 이황 선생도 하셨던 말씀이죠. 퇴계 선생은 “책이란 정신을 차려서 수없이 반복해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두 번 읽어 보고 뜻을 대충 알았다고 해서 그 책을 그냥 덮어버리면 그것이 자기 몸에 충분히 배어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옛 선인들의 공부법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갈량도 그렇게 공부했을 겁니다. 우리 근대의 지식인들만 하더라도 책 내용을 줄줄 외우는 암송에 의한 독서법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근원수필의 저자인 근원 선생도 암기력이 매우 뛰어나서 한문 고전들을 외워서 어느 부분을 묻더라도 막힘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워낙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정보량도 많은 시대이긴 하지만, 많은 정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적지만 알찬 책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는 것이 실제의 활용이나 응용이란 측면에서 더욱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자, 개관하고, 책에 질문을 걸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밑줄 긋고, 두번 세번 읽고, 손으로 옮겨적고까지 왔습니다. 그 다음엔 뭐가 남았을까요.

책 쓰는 아마추어

그렇습니다. 그 다음엔 책을 다시 쓰는 겁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숙제를 내주면 줄거리만 줄줄 베껴서 낸 기억들이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이렇게 숙제를 하면 아마 선생님이 차근차근 일러주셨겠지요. 독후감이란 말 그대로 책을 읽은 뒤에 너의 느낌을 적는 글이란다. 앞으론 줄거리를 베끼지 말고 네 감상을 적어보렴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줄거리를 요약해보라고 시키고 싶네요. 만약 그것이 문학작품이 아니라면 더욱더 줄거리를 요약해보는 일을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줄거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책의 구조를 빼내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구성해내는 걸 의미하죠.
아마 학교 다니면서 공부할 때 다들 해본 일일 겁니다.
예를 들어 한 권의 책을 선정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의 목차를 봅시다.

제1부 인간과 시장

경제학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 제레미 벤담
시장경제도 계획경제다 : 아담 스미스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꼬리가 개를 흔든다? :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
'대박'의 경제학
사회보험, 위험의 국가 관리
마약, 매매춘, 포르노의 경제학
누구나 자기 몫을 가질까?

경제학 카페의 제1부는 "인간과 시장"입니다.
제1부에서 유시민은 고전경제학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론적인 의미에서 경제란 무엇인가를 논한 뒤에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요약하고, 다시 맬더스의 경제학 이론을 다룹니다. 뭐 내용은 지대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들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목차에 모든 것이 나와 있습니다. 그걸 앞서 제가 말씀 드린대로 차근차근 해본 뒤에 본인이 읽고, 포스트잇 붙이고, 밑줄 긋고, 손으로 옮겨적고 난리 친 것을 조금씩 타이핑 해 놓는 겁니다. 이때 그저 베끼는 것도 방법입니다만, 자신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저자의 응답만이 아니라 본인이 알아낸 지식들을 함께 담아놓는 겁니다.

가령 "유시민의 경제적인 관점이 모두 옳아. 아, 유시민! 너는 왜 그리 멋진 말만 골라서 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 이외에 아무론 생각도 들지 않는다면 구태여 제가 말씀드린 방법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호, 유시민! 그래, 이런 부분은 그대가 하는 말이 맞아. 나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어. 하지만 말이야. 유시민 선생!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다른 학자들은 그대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던데, 나 역시 이 부분은 그들의 말이 더 맞는 것 같거든." 한다면...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비판적인 재구성이 가능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당신만의 관점을 재구성하여 그 글 속에 녹여낼 수 있다면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세요.

처음엔 좀 어렵겠지만, 몇 번 노력하고 공부하다 보면 그 방면에 대해 이런 제목의 책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줌마가 연 경제학 카페
- 유시민 씨 그건 좀 아니예요."

제1부 인간과 시장
경제는 밥그릇 싸움이다.
경제? 아직도 한다고 생각해, 경제는 되는 거여
맬더스 씨, 정신 차리세요.
'대박'의 경제학과 소시민의 꿈
사회보험, 국가 관리의 위험성을 폭로하며
결혼도 매춘이다.
이제 여성의 몫을 주장할 때다...


이 얘기가 꿈만 같은가요? 뭐, 김어준이니 한비야니 하는 사람이 날 때부터 잘 나갔던 건 아니죠. 흐흐.  까짓거 책 한 권 못 내보면 어때요? 대신에 경제학에 대한 기초는 확실히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다음 번엔 계통 밟아 읽는 책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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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9-1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읽었습니다. 출력이라도 해야 될까봐요. 다음 번 계통읽기, 요즘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stella.K 2004-09-17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군요. 추천 한방 때리죠.^^

▶◀소굼 2004-09-1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선읽기 후추천^^;;그리고 이어지는 퍼가기;

stella.K 2004-09-17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굼님, 어제 전 선추천, 후읽기했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더 재밌어요. 별차이 없지만. 제가 1등으로 추천했걸랑요. 알아 줄 것도 아닌데...

가을산 2004-09-17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역시 관록이 묻어나네요!
전 책을 한번씩도 읽기 힘든데, 어찌하면 반복까지 할 수 있으려나요? ㅜㅡ
계통읽기도 기대하겠습니다.

▶◀소굼 2004-09-17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추천이 재밌긴 한데...추천하기 버튼이 밑에 있어서..다 읽고 한거에요^^;

바람구두 2004-09-17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뭐 추천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요. 선추천후추천 가지고 두 분이 다툼하시니... 글 쓴 저로서는 심히 즐겁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년 여름에 시원한 냉면이나 한 그릇씩 하실까요? 흐흐.

stella.K 2004-09-17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면은 지금 먹어도 맛있어요. 사 주세요.^^

_ 2004-09-17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음에 간직하든, 일회성이든지간에, 손으로 직접 한번 쓴다는데에 공감해요. 전 예전까지는 옆에 꼭 공책하나 두고, 쓰고는 했는데, 요즘은 너무 게을러져서 ㅠㅠ
퍼갈게요~ 물론 추천한표 남기고 ^^

바람구두 2004-09-1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공짜 너무 밝히면 머리털 빠져요. 흐흐.
버드나무님/ 저야 추천을 너무 밝히는지라... 흐흐

프레이야 2004-09-18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책읽기 연작, 잘 읽고 있습니다. 계통읽기도 기대됩니다. 늘 좋은 글 보며 감사드리고 싶네요. ^^

바람구두 2004-09-18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서재이다 보니 이런 류의 글들에 반응이 좋군요. 다들 일가견들이 있는 분들이라 글 올리며 많이 신경쓰였답니다. 다들 감사합니다. 후한 평가 주셔서요... 산그림자, 혜경님... 모두

마태우스 2004-09-1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유시민 책에 대해 "왜 맞는 말만 하는거야"라고 하는 부류예요... 하지만 앞으로는 님의 말씀대로 좀 생각을 하면서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글답게 추천이 두자리 숫자네요. 저도 당근 동참^^

마냐 2004-09-20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별 필요는 없어보이지만, 그래도 추천. 정말 도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