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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이방인 - 194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첫 문장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의 명작! 단 한 문장으로 주인공 뫼르소의 성격과 태도를 보여주는 걸 보면, 확실히 작가가 보통 내공이 아니에요~ 카뮈는 이 작품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라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렵지 않을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의외로 책이 꽤나 얇은데다 내용도 딱히 어렵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금방 읽을 수 있어요:)
뫼르소는 왜 그 아랍인을 죽였나?
<이방인>은 첫 문장만큼이나 주인공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죄 동기로도 유명합니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사람을 죽이는데, 그 이유가 '햇빛이 눈을 찔러서'거든요. 아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잖아요? 혹시 숨겨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건 없습니다. 정말로 뫼르소는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인 거예요. 정말 말도 안 되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설 속에서 뫼르소의 담담한 심리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 진술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죽일 만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뫼르소라는 사람은 그 순간 총을 쏠 수도 있는 사람이고, 진짜로 쐈을 뿐이라는 게 수긍이 된달까요. 뫼르소가 감정이 없는 잔혹무도한 싸이코패스이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검사 측에서 그렇게 주장하긴 하지만요. 다만 말이 없고 조금은 무심한, 현대인 같은 느낌은 있어요.
뫼르소가 그렇다고 평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굉장히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침묵할지언정 거짓으로 순간을 회피하지는 않죠. 심지어 자기 목숨이 걸려있어도 그래요!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 손쉽게 사형을 벗어날 수 있는데도 굳이 진실을 말해 모두를 불편하게 합니다. 변호사도, 판사도, 기자도, 여자친구도.. 모두 그에게 어떤 '답'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지 않아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진실을 말하겠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고결한 태도죠. 이게 굉장한 지점입니다. 이런 보기 드문 덕목을 갖춘 뫼르소가,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것이죠.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요? 참고로 카뮈는 뫼르소를 두고 '현대의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거기에 동의하냐 동의하지 않냐는 물론 독자 개개인의 몫이에요.
뫼르소가 살인자라는 건 불변의 사실입니다. 뫼르소는 아무 죄도 없는 한 아랍인을 죽이고, 그에 대해 아무런 비애나 죄책감 따위를 가지지 않고 있거든요. 그가 사형을 받는 건 마땅한 죗값을 치르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문제는 뫼르소의 재판 과정입니다. 거기서 보여지는 온갖 부조리가 마치 이 사형이 부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극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정말로 죽은 피해자를 위해서 벌을 주는 거라면, 죽은 피해자에게 아무 잘못이 없었고 그의 죽음은 부당하다는 데 포커스가 맞춰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법정에서 뫼르소를 비난하는 근거는 '어머니가 죽었는데 울지 않았다', '어머니 관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여자를 만나 섹스를 하고 야한 영화를 보러 갔다' 등등 살인사건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상의 모습이에요. 보다못한 변호사가 피고는 살인죄로 기소된 거라고 항변할 정도로 엉뚱한 것들만 물고 늘어집니다. 말도 안 되는 재판이에요. 물론 그 때문에 뫼르소의 거짓말하지 않는 태도가 더 도드라집니다. 눈물 몇 방울 흘리고, 그 아랍인이 자기를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기만 했어도 무죄 땅땅 확정이거든요. 프랑스인이 아랍인을 죽이는 건 별 문제가 안 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차별에 대한 고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차별인가?
소설 속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다음 모두가 죽은 아랍인은 아예 지워버리고 뫼르소에만 집중하는데, 이것이 인종주의적인 or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아예 그런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작품 속에서 고발하고 있는 것인지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보통 이런 주제를 다루면 모 아니면 도 확실하게 드러나는 편이잖아요. 그런데 <이방인>은 관련 자료나 기사를 찾아봐도,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더라고요. 카뮈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건 차별이다 혹은 아니다 단언하지는 못 하는 것 같아요. (이런 논쟁조차 카뮈가 그토록 부르짖는 부조리처럼 생각되는 면이 있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작가 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전개나 묘사에 인종차별적인 부분이 있고, 만약 이게 현실 고발이었다면 소수자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의 근거는, 뫼르소가 아무 죄도 없는 아랍인을 죽였다는 걸 작가가 아주 분명하게 서술한다는 점을 듭니다.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영역을 침범한 것도, 방아쇠를 당긴 것도, 전부 아랍인이 아니거든요. 카뮈는 그 아랍인은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뫼르소가 그를 죽였다는 걸 대놓고 보여줍니다. 워딩 하나하나가 뫼르소의 잘못을 지적해요. 예를 들어 그 아랍인이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뒤돌아서면 끝날 일'이라고 본인이 생각하기도 하죠. 만약 카뮈가 정말 인종차별자였다면 아랍인에 대한 정당방위처럼, 혹은 그 비슷하게 얼버무렸겠지 않냐 하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랍인이었다면, 극중에서 아무 잘못 없이 살해당한 후 이름도 애도도 없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피해자를 굳이 아랍인으로 설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불쾌했을 것 같아요. 당시 프랑스인-아랍인 두 집단이 인종적으로 동등하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죠. 만약 일본인이 <이방인> 같은 소설을 쓰면서 식민지 시대 한국인을 이런 식으로 그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일본인이 한국인을 살해하는데, 정작 그 한국인은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흔적도 아무것도 없고, 독자들은 정작 살인범의 실존주의적 고뇌에 공감하고 이입하게 만들어져 있다면..? 이 작품 자체가 인종차별을 강화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분이 상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찾아봤는데 그래서 실제로 <이방인> 속 아랍인을 다루는 태도를 두고 비판적인 시각도 많더라고요. 한국에도 출간된 <뫼르소, 살인사건> 같은 작품은 아예 <이방인>에서 살해된 아랍인의 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작품에서는 지워진 피해자와 그 주변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고 해요. <이방인>을 재밌게 보신 분들이라면 함께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유명한 만큼 작품 바깥의 이야깃거리도 많은 편이라, 다 읽고 찾아보시면 재미가 2배! <이방인> 관련해서 '아랍인' 관련 오역 논란이 꽤나 시끄러웠는데, 오역은 아니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 논란 과정에서 제가 몰랐던 프랑스어 원문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왜 아랍인을 중간에 무어인이라고 표현하는지 설명해놓은 포스팅을 봤는데, <이방인>에서 '그 아랍인' 하면 딱 한 명, 피해자를 지칭하는 게 될 수 있도록 작가가 고심한 흔적이래요~ 그 외에도 감옥 묘사에서 안은 남자들의 공간, 바깥 면회장은 여자들의 공간처럼 느껴지게 단어를 섬세하게 골랐다고 하네요. 프랑스어는 단어 자체에 여성형 남성형이 다 따로 있으니까, 원문을 읽으면 그런 정서를 바로 캐치할 수 있나봐요. 저는 프랑스어를 못 하는지라ㅠ 원문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런 작품을 번역하려면 번역가 역시 엄청나게 애써야 할 것 같아요. 덕분에 저는 편안하게 한국어로 작품을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운인지! 번역가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쇼..!!!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