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 블랙 로맨스 클럽
제인 니커선 지음, 이윤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 소설의 내용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고싶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트윗에서 우연히 보게 된 표지에 한눈에 반해(!) 읽게 된 책.

 이토록 아름답고, 고혹적면서도, 화려하고, 고독해보이는 일러스트라니!! 전체적으로 금빛을 테마로 사용해서 고급스러워보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표지에 대해서라면 몇 문단에 걸쳐서 칭찬을 해도 부족합니다. 한꺼풀 벗겨낸 표지안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새장 밖에서 그 새장의 열쇠를 물고 있는 새가 한 마리 있는데, 펜화로 그려진 그 그림 역시 전체적인 책 내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밖으로 보이는 표지가 주인공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면, 가려진 표지는 주인공 소피아의 내면을 표현하는 셈이 되어서 은유적으로도 매우 멋진 상황이 되죠. 표지의 기능이 '독자가 내용을 궁금해하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면 그 의무를 100% 충실하게 이행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황금가지 블랙 로맨스 클럽의 디자인이 추구하는 방향이 이런 쪽이라면 아주 매우 몹시 격하게 환영하는 바입니다. 간만에 수집하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는 컬렉션이 될 듯 하네요.

 

 

공포의 그 이름, 푸른 수염

 아마도 많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되지만, 푸른 수염은 유럽권에서는 아주 유명한 동화입니다. 동화라기엔 상당히 잔혹하고 끔찍한 내용이긴 한데, 많은 동화들이 알고보면 부적절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으니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니죠. 귀족인 푸른 수염은 결혼을 할 때마다 아내가 실종되어 홀로 남겨지는 수상한 귀족입니다. 다들 그 사실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는데, 그 와중에 또다시 청혼을 해서 어느 집의 귀중한 막내딸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그는 '성 안의 모든 방은 열어도 되지만, 딱 한 방만은 열어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알려 줍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 결국 막내딸은 금지된 방을 열어보고 푸른 수염의 아내들이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방을 열지 말라는 자신의 말을 어겼기 때문에 푸른 수염이 살해한 것이죠. 금기를 어긴 막내딸이 살해당하려는 찰나, 방문하기로 되어 있던 오빠들이 들이닥치며 푸른 수염으로부터 동생을 구해냅니다.

 

 사실 개인적인 애정장르는 로맨스보다는 미스터리 쪽입니다. 로맨스 소설을 폄하하거나 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학창시절에 꽤나 로맨스 소설에 심취했던 시절이 있었더랬죠. 다만 요 몇 년 사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갔을 때 고르는 책이 대개 미스터리/추리/SF/서스펜스 쪽인 인간인지라, 간만에 잡은 로맨스 소설이 흥분되기도 하고 '내 취향이 아니면 어쩌지'하고 걱정반 기대반이었습니다. 세상엔 멋진 로맨스 소설이 물론 많을 테지만, 작가별로 편차가 큰 장르 중 하나이다보니 조심스러웠어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 취향에 가까운 소설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서스펜스의 비중이 아주 높은 로맨스 소설이더라구요. 중간 정도까지는 사실상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고, 후반부는 공포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중간중간 '여러분 잊지마세요. 이것은 로맨스 소설입니다' 하는 장면장면이 없었다면 그냥 미스터리 장르라고 해도 믿었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고백하건데, 푸른 수염 모티브라는 점 때문에 저는 이 소설의 주요 전개가 '나쁜 남자' 혹은 '위험한 남자'에게 끌리며 그를 변화시키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매력적이지만 어딘가 비밀이 많은 남자주인공의 세계에 여자주인공이 폭 하고 떨어지면서 그 비밀을 밝히고 둘은 이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식의 전개일 거라고 예상했어요.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는 그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나쁜 남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남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를 상대로 동등한 게임을 펼칠 수 있다는 건 순진한 착각에 불과하죠.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아

 여주인공의 캐릭이 인상적입니다. 예쁜 옷과 화려한 장신구를 좋아하며 자신의 후원자를 남몰래 흠모하던 철없는 꼬마아가씨에서, 점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서든 을 돕고 스스로를 도우려 애쓰는 멋진 레이디로 변해가는 과정이 세세하게 잘 그려져있어요. 독자들은 소피아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거라 두근두근하는 그녀의 어리고 순진한 마음은 사랑스럽고, 노예 제도에 반대하며 사람들을 사고팔거나 함부로 대하는 방식에 불편함을 느끼는 모습은 기특하고, 후원자의 전(前) 아내들의 흔적을 찾아내어 그녀들의 모습과 인생을 상상해보는 그녀의 모습은 따뜻합니다. 그 중에서도 소피아의 매력이 단연 최고조로 빛나던 부분은 흑인 노예들을 위해 남몰래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집에 얹혀사는 손님이기 때문에 그녀는 실질적인 권한이 전혀 없어요. 하지만 그녀는 일하는 사람들을 노예가 아니라 알아가는 친구처럼 대하고, 사랑하는 두 흑인 연인이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해방운동을 하는 흑인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몰래 경고를 해주기도 합니다. 소피아는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입장의 사람이었어요. 오히려 그런 노력들이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소피아는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면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 소피아가 조금씩 버나드 씨에게서 위화감을 느끼며 거리를 둘 때마다 저도 어찌나 불안하던지요. '어? 이게 아닌데? 어?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더라구요. 아까도 언급했지만, 저는 푸른 수염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해 결국에는 버나드 씨가 '알고보면 비밀을 간직한 좋은 사람'이라거나 '이랬던 개차반을 소피아가 변화시켰답니다'하는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무서워지는 겁니다. 버나드는 너무나 교묘하고 권위적이며 강압적이었어요. 그가 알고보면 착한 사람이라거나 사랑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건 순진한 망상같아 보였습니다. 갈수록 소피아는 지금 엄청난 위험에 처해있고, 그녀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게 확실해졌어요. 도대체 그녀는 어떻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인가?!! 저는 그 해답이 푸른 수염 동화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아채고 도와주러 오겠거니 싶었어요. 그래서 제발 얼른 그녀의 오빠들과 언니가 버나드의 집에 도착하기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소피아의 가족들이 오긴 왔는데.. 버나드의 위장에 다들 홀라당 넘어가버린 겁니다!! 책은 점점 끝나가는데 소피아가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고,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족들은 오히려 소피아를 더욱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넣고.. 소피아가 가족들을 위해 사실상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장면에서는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아무도 그녀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아주지 않는거야?!!!!!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전개가 옳았던 것 같아요. 소피아가 자신과 '자신의 분신들'의 인생을 위해 스스로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줬으니까요. 소피아는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동화 속 공주님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며 자신을 구하는 주인공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동화 속 왕자님처럼 쨘 하고 나타나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없었지만, 푸른 수염이 흩뿌려놓은 악행의 씨앗들로 인해 불행해진 '소피아의 분신'을 위해 노력하고 행동하며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구요. 결정적으로, 이런 전개가 아니었다면 다들 "도망쳐!"라고 한 목소리로 외쳐준 그 '존재들'의 선량함이 이토록 와닿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비록 나는 불행해졌지만, 너까지 그러면 안 되잖아. 도망쳐 소피아! 여기서 도망치라고!!

 

 네 명의 여성을 소피아의 눈과 상상력을 빌려 등장시켜준 부분이 정말이지 무척 좋았습니다. 빅투아르, 타티아나, 타라, 아델.. 다들 나쁜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다들 악마를 보았고, 눈치챘고, 빠져나가려고 애썼고, 그러나 실패한 소피아 이전의 소피아들이었죠. 소피아가 처음부터 그 사람들을 연적이나 '내 남자의 여자' 정도가 아니라 포용력있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여자의 자매애가 얼마나 위대한지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질투심과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것은 아니잖아요~

 

 후반부까지의 흥미진진하고 긴장감넘치는 전개에 비해, 최종 마무리가 살짝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모든 일이 완벽하게 술술 풀리다니, 어쩐지 거짓말 같은 느낌이랄까요? 직전까지 어떻게 될까 마음졸이고 걱정했던 게 바보같을 정도로 싱겁게 휙 지나가 버리잖아요. 조금 더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자세하게 나왔으면 좋을텐데, 아니면 차라리 후일담을 빼고 기디언과 만나 손을 잡으며 마지막 환영(?)을 함께 보는 걸로 끝냈어도 좋을텐데, 지금은 어쩐지 절정까지 마구 내달렸던 작가가 급 의욕을 잃고 마무리를 그냥 대충 쓴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소설의 장르가 로맨스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그렇게까지 트집잡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거나 로맨스 소설- 달콤하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결말을 위해 달려가는 과정이니까요. 결말의 처리 과정에서도 소피아가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들구요. 보통은 남자주인공에 의해서 여자의 행복이 결정되기 마련이라면, 소피아는 이제 자기 자신의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었다는 느낌이거든요. 남자가 곁에 없어도, 가족들이 곁에 없어도, 든든한 하녀나 마음을 주었던 친구가 곁에 없어도, 앞으로 그녀의 일생은 내내 행복할 겁니다. 아마도.

 

 

 이 책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로맨스 소설을 읽는 기쁨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역시 주인공이 행복해지는 건 좋군요. 저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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