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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 개정판 ㅣ 폴 오스터 환상과 어둠 컬렉션
폴 오스터 지음, 민승남 옮김 / 북다 / 2025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나왔습니다.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데,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어둠 속의 남자>와 세트로 꽂아두면 두 배로 예쁩니다ㅎㅎ
<환상의 책>은 비행기 사고로 아내와 두 아들, 그러니까 모든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던 짐머라는 한 남자가 그 상황에서 잠시라도 자기를 웃게 만들어준 코미디 무성영화에 대한 평론을 쓰면서 휘말리게 되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재능은 있었던,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사라져버린 라틴계 코미디언 '헥터 만'. 하지만 짐머는 그의 실종이나 사생활, 가십보다는 영화 그 자체에 집중합니다. 그를 웃게 만든 건 코미디 영화에서 헥터 만이 보여준 재능 때문이니까요. 영원히 곁을 떠나버린 가족들 이외에 다른 몰두할 것이 필요했던 데이비드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합니다. 바로 헥터 만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죠.
<환상의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헥터 만이 나타나기 전과 후. 개인적으로 헥터 만의 실체가 앨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장면이 흥미로웠어요. 왜냐면 그때의 짐머는 평소와 다른 큰 일을 겪은 후라서, 평소와 같은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하라는 말이 있지만, 일단 예기치 못한 일을 겪고 나면 그런 일이 또 벌어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는 이 문장에 엄청난 공감을 해 버려서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착시 효과가 생겼답니다. 보통 사람들은 확률적으로 엄청 희박한 일을 겪은 직후에 또 그런 희박한 일을 겪을 거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하잖아요. 하루에 이변은 한 번이면 족하단 말입니다!
초반이 '헥터 만은 왜 사라졌나'를 슬쩍 건드리면서 독자가 헥터 만을 사랑하게 한다면, 후반부는 '헥터 만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를 보여주면서 독자를 공범으로 끌어들입니다. 여기서 저는 헥터 만에게 품었던 많은 호감을 조금 덜어내게 되었는데, 이 부분은 성향 차이인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사람을 열렬히 사랑했고, 그이 때문에 인생의 항로가 뒤바뀔 정도였는데 또 다음 순간에는 다른 사람을 또 그렇게 열렬히 운명적으로 사랑하고 있으면 이게 뭔가 싶어지거든요. 심지어 헥터는 그런 사랑이 3번이나 있는 거잖아요;; 흠, 그러고보니 짐머도 그렇네요. 폴 오스터의 남자 주인공이 말하는 진실한 사랑이라는 건 믿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ㅋㅋㅋ
그 모든 사건과, 사고와, 사랑과, 미움과, 증오를 뒤로 하고... 결국 이 세상에 헥터 만의 이야기를 온전히 아는 사람은 짐머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짐머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는 그 이야기를 죽기 전까지 세상에 내놓지 않을 거고요. 그럼 이제 짐머가 죽게 되면 이 세상에 헥터 만의 삶과 영화 모두 없는 셈이 되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래서, 오히려 마음 한 켠으로는 간절히 그 증거를 바라고, 증언하고 싶어지는 것. 이 공허와 슬픔으로 가득찬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나와 같은 것을 발견하고 바라보기를 바라는 것. 그게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힘 아닐까 싶습니다.
언젠가 헥터 만의 필름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좋겠네요. 짐머의 글도 함께. 그리하여 그 모든 이야기는 다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으면. 그게 비록 헥터와 짐머를 구해주지 못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