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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쩐 : 하 - 김원석 극본
김원석 지음 / 너와숲 / 2023년 3월
평점 :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법조계, 그 중에서도 검찰에 대한 믿음이 아예 사라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법조인들이야말로 비리와 부패의 온상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엊그제도 검찰이 그만두고 나서 1년 이내에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에 법무부 장관이 반대를 한다는 기사가 났더라고요? 당장 오늘 수사하던 대상에 내일 의탁할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1년도 너무 짧다 싶은데 당장 지금 대통령부터가 그런 나라에서 뭘 기대하겠어요.. 에휴입니다..
어쨌든! 그런 시대에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정의로운 검사'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믿지 않아요. 그래서 아마 이런 드라마가 나온 거겠죠? <법쩐>은 법과 절차만으로는 거악(巨惡)을 막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법조+시장+정치 카르텔을 박살내기로 마음먹은 주인공의 복수극입니다. 드라마이니만큼 당연하게 주인공이 복수에 승리하고 악은 패배하면서 마무리되는 게, 판타지이면서도 통쾌한 맛이 있어요. 그 와중에 '법과 권력을 가진 악당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까?'는 고민이 보이는 지점이 좋았습니다.
저는 드라마/영화/연극/뮤지컬 등을 대본집으로 보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완성된 영상이나 무대와는 다른 맛이 있어요. 특히 대사는 그대로이지만, 작가의 의도가 명백히 담긴 지문 같은 건 텍스트가 아니면 소비자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예를 들어 <법쩐>에서는 태춘이 외국에 있는 운용의 도움으로 수사를 진행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 작가님이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삼촌과 조카가 함께 작업하는 느낌'이라고 적어 놓으셨더라고요. 물론 영상연출로도 작가의 의도가 다 전달될 때가 있지만, 그걸 작가님은 이런 문장으로 표현했구나 하는 걸 보는 게 무척 좋습니다.
대본집 앞에 인물소개를 거의 25페이지 가까이 써 놓으셨더라고요? 이 정도면 배우들이 처음 받아보는 시놉시스가 아닐까 싶었어요. 그것만 읽어도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상황이 쫙 정리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책 뒤편에 작가님의 인터뷰가 있는데, 작가님이 꼽으신 명대사나 아쉬운 부분 같은 걸 들을 수 있어서 만족! 드라마에서는 아마 현장의 한계로 장미로 바뀐 듯 한데, 작가님은 주인공 운용이 윤 대표에게 항상 '카네이션'을 선물한 것으로 설정하셨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장미랑 카네이션은 뜻하는 바가 많이 달라서, 확실히 카네이션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긴 해요. 이런 식으로 구상과 실제가 틀어진 부분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텍스트로 읽다보니까 드라마를 보고 싶어지는 매직~~!!! 법과 절차를 믿지 않게 되었던 '우리 편' 중 몇몇이 다시 법과 절차를 지키는 쪽으로 돌아선 부분도 좋았어요. 아무리 현실이 개똥같아도,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해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싶지는 않잖아요ㅠ 가끔 정말로 100이면 100 다 유혹에 넘어가겠다 싶은 순간, 의외로 원칙을 지키는 소수의 보통 사람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굴러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극 중 남계장처럼요!
요즘 드라마 대본집이 많이 나와서 너무 좋네요. 세상 모든 드라마가 다 나와줬으면.. 하는 작고도 거대한 바람을 가져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