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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 처음 만나는 페미니스트 지리학
레슬리 컨 지음, 황가한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평점 :
처음에 제목을 듣고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건축이나 도시설계에도 성별로 불평등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아니 존재할 수는 있는 건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도시는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도시 설계에 가부장제를 강화시킬 수 있는 요소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싶었어요. 그래서 궁금함에 읽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몰랐던 페미니스트 지리학이라는 분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1장 [엄마들의 도시]부터 확연히 이해가 쉽습니다. 도시는 엄마들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건 제가 최근 몇 년 동안 장애인 이동권과 함께 관심을 가진 이슈여서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대도시의 대중교통이나 건물 설계는 이동에 제한이 있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자전거, 휠체어, 유모차, 바퀴 지팡이 등 이동에 신체 외 다른 물품이 필요한 경우는 굉장히 제약이 많아요.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장애인이 이동하다가 지하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잖아요? 외국은 유모차를 옮기다가 계단에서 굴러서 어머니가 사망한 사건도 있더라고요. 도시의 구석구석이 이렇게 말하는 거죠. 야! 네가 움직이면 민폐잖아! 집(혹은 시설)에나 있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권을 박탈당하고 고립됩니다.
한국은 워낙에 땅덩어리가 작은 나라라서 아직 '교외'에 대해서 북아메리카처럼 적극적인 계급화 이동이 이루어지진 않은 것 같아요. 그저 제가 모를 뿐일 수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제가 알기론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중상류층 주류 인종들이 대거 교외로 이동하고, 넓고 개인적인 공간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는 그런 문화가 아닙니다. 전 교외야말로 모두가 서로를 잘 아는 동네, 누군가 외부인이 등장하면 바로 눈에 띄는 폐쇄적인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한편으로 여성에게 엄청나게 많은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부담시키는 구조라는 건 몰랐어요. 집은 넓어서 관리할 곳은 많고, 슈퍼나 쇼핑몰은 멀고, 학교나 회사도 멀어서 이동에는 반드시 차가 필요하며, 2명 이상의 자녀가 있을 때는 동선이 매우 복잡하고 힘들어진대요. 교외 자체가 여성의 무급 노동력을 갈아서 유지되는 시스템인 셈입니다. 도시는 교외보다는 학교/직장/마트/어린이집 등이 가까워서 (충분하진 않지만) 여성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준다네요.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혼자 있을 권리에 대해 말한 3장 [혼자만의 도시]도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화장실에 대한 부분이 놀라웠어요. 한국은 무료로 개방된 공공 화장실이 꽤 많고, 공공 화장실이라 해도 관리가 잘 되어 깨끗한 편입니다. 외국에는 화장실이 위생 및 가격에서 이용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밖에 있을 때는 화장실을 가지 못해 고통을 겪는다는 거예요. 인도에서는 여학생들이 학교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리가 시작되면 학교를 아예 가지 않기도 한다네요;;; 정말 놀라웠습니다. 화장실은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공적인 공간인데, 이런 공간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밤이 될 때까지 대소변을 참아야 한다는 건 정말 비인간적이에요! 오늘날의 도시 환경에서도 화장실 접근권이 이토록 누리기 힘든 권리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어요.
5장 [공포의 도시]는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님을 밝힘과 동시에 그래서 도시 설계는, 도시 환경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슬픈 건 이게 수학처럼 딱 떨어지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리학과 학생들도 이 부분에서 낙담하거나 짜증을 낸다고 하던데, 환경적/설계적 해결책을 아무리 찾아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단 하나의 절대방법 같은 건 없다는 데 맥이 빠질 만도 합니다.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저자는 그래도 여성 친화적(일 뿐만 아니라 노인이나 장애인 등 약자 친화적)인 도시에 가까워질 희망은 있다고 얘기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고, 그걸 바꾸기 위해 당사자들의 말을 듣는 것부터가 그 시이 될 거라고요. 제가 사는 이 나라, 이 도시가 앞으로는 나쁜 사례가 아닌 (나쁜 사례의 예로 실려 있더라고요ㅠ) 좋은 사례로서 페미니스트 지리학 책에 언젠가 등장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언젠가는, 가능하겠죠?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